[제77장] 분신술 3
“가장 시급한 것은 지금 대별산에 주둔하고 있는 무황연합군 오십만 무사를 격퇴하는 일입니다. 맹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림혈맹 총군사 혈천자의 물음이었다.
어제 무림혈맹주가 된 이후 백자안이 그와 처음으로 독대하게 된 자리였다.
혈괴자 신분으로 맹주가 된 백자안으로서는 어떻게 보면 가장 까다로운 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었다.
그 때문일까.
처음에는 혈천자를 제거하고 다른 사람을 총군사로 삼으려고도 생각했었다.
자칫 잘못하면 혈천자에게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고 결과 그러지 않았다.
혈천자를 곧바로 제거하면 마계총살수의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마계 동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모든 일은 신중히 처리해야 했다.
“생각 중이오. 총군사의 의견은 어떻소?”
“지금이라도 총공격을 감행해 놈들을 소탕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놈들의 병력이 계속 불어날 겁니다. 그동안 지휘체계가 불안정해서 소규모 병력만 파견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기세를 몰아 전 무사들을 이끌고 대별산으로 진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기야 놈들이 오십만까지 불어날지는 나도 몰랐소. 전면전을 벌이게 되면 우리 역시 큰 피해를 볼 것이오.”
“그 말씀은 마계살수들의 지원을 바라시는 겁니까?”
“그렇소.”
“하지만 총살수 말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더군요. 자신들은 총단 방어만 도움을 주겠다고.”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그야 백자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전임 총살수가 백자안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신임 총살수 역시 몸을 사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힘만으로 놈들을 대적하는 것은 안 되오. 그래서 사실 한 가지 계책을 생각 중이긴 하오.”
백자안의 말에 혈천자가 눈을 빛냈다.
“무슨 계책입니까?”
“유인작전이오. 놈들을 이곳 총단으로 유인해 몰살시키는 것이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놈들을 유인하려면 총단을 비워야 하는데 무사들을 숨길 장소가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수백만 명도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이 총단 지하에 있으니까. 입구가 무너져 공사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마계살수들의 도움을 받으면 금방 복구할 수 있을 것이오.”
“입구라 하심은?”
“이전 금마옥이 있던 장소요. 지금 감옥은 다른 곳에 만들어졌는데, 이전 금마옥이 있던 곳을 복구하면 지하 광장과 연결된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아!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수하들이 중원무맹의 총군사였던 만박서생의 집무실을 수색하다가 지도 한 장을 발견한 적이 있었소. 지도에 의하면 이전 금마옥과 연결된 지하 광장이 있었소. 하지만 입구가 붕괴되어 확인할 수 없었소.”
“그 정도 규모의 지하 광장이 있다면 우리 무림혈맹 무사들뿐만이 아니라 마계살수들도 모두 숨길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자취를 감춘 사실이 알려지면 대별산에 있는 무황연합군 오십만 무사들이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놈들은 독 안에 든 쥐 꼴이지요.”
“그렇소. 다만 총단으로 유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내가 총단 전체에 봉쇄진법을 펼쳐놓을 생각이오. 그 봉쇄진법은 특수한 효능이 있는데, 바로 진 안에 갇힌 자들의 내공을 제한하는 것이오. 그때 우리가 지하 광장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놈들을 공격한다면 큰 피해 없이 소탕할 수 있을 것이오. 어떻소? 내 계획이······.”
“훌륭합니다. 지금 바로 총살수에게 알려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단 지하에 있는 광장은 이전에 그가 한번 갇혔던 곳이었다.
당시 그는 탈출구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만박서생이 가르쳐준 대로 지존령기를 이용하여 지하 광장 전체를 폭발시키려 했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천상여의주의 도움으로 외부로 통하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적이지만 그때 당시를 떠올려 이번 유인작전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무림혈맹 무사들과 마계살수 모두를 지하 광장에 모이게만 할 수 있다면 화약을 터뜨려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총살수 그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그게 조금 걱정이구나.’
* * *
지하 광장과 연결된 구 금마옥의 보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백만 마계살수들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백자안과 혈천자로부터 유인작전 계획을 전해 들은 총살수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마계살수들이 공사를 맡게 되었던 것인데, 생각보다 무너진 곳이 넓지 않아 이전 금마옥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의심을 살 것을 우려해 이전에 새롭게 만든 감옥은 아예 폐쇄해 버렸다.
따라서 이젠 이전 모습 그대로 금마옥이 복원된 셈이었다.
물론 백자안의 안내로 비밀통로와 연결된 지하 광장도 지휘부 고수들이 가서 사전답사를 했다.
이 모든 게 불과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봉쇄진법을 펼쳐두고 지하 광장에 무사들을 숨겨두는 일뿐이었다.
밤늦게 맹주 집무실에 모인 세 사람.
바로 백자안과 혈천자, 그리고 총살수였다.
이제 작전 계획을 최종 점검하고 실행에 옮길 때였다.
“공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맹주께서 말씀하신 지하 광장 역시 이백만 무사들을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혈천자의 말에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가 많았소. 총살수께서는 따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하하하. 아니오. 이번 작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매우 훌륭하오. 다만 여전히 우려되는 것은 백자안 그자의 무공이오. 그는 전대 총살수와 십만혈군을 죽였소. 무황연합군 놈들을 이곳 총단으로 유인해 제거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듯하나, 백자안 그놈을 제거하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닐 듯하오. 맹주가 설치한다는 봉쇄진법 역시 그자를 가둬두긴 힘들 것이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총살수께서 따로 복안이 있으실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혈천자의 말에 총살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러하오. 이번에 놈들이 총단으로 올 때 우리 마계에서 특별고수들이 파견될 것이오. 하나 같이 대단한 무공을 지닌 분들이니 놈을 척결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오.”
“마계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일전에 들으니 마계가 최종 승리를 거뒀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번에는 백자안의 질문이었다.
그동안 천계와 마계 상황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던 그였다.
하지만 총살수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어 답답해하던 차였다.
“으음, 이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구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 마계가 천계와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맞는 말이오. 천제를 비롯해 천계 고수들이 우리 마계 총단을 기습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말았으니까. 놈들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살아 돌아간 자는 극히 드물었소.”
“아! 역시 마계가 승리했군요. 그럼 천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제를 비롯하여 무림 일에 간섭하던 천선생과 천상선녀의 생사가 궁금하군요.”
“천제는 우리 마제님과 일대일 대결을 벌여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소.”“아직 살아 있단 말입니까?”
“그렇소. 천제는 우리 마제님과 마찬가지로 불사의 몸에 가깝소. 오직 지성자만이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소.”
“그 말씀은 아직 마제께서 완전한 지성자가 되신 것은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게 다 지성을 이루는 최후의 순간에 천계 놈들이 기습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오. 하지만 마제님의 무공은 이미 극한에 달한 상태이셨소. 비록 지성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거의 도달했기에, 천제는 마제님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오. 아, 그리고 천계의 총군사 천선생과 천상선녀는 마계 총단에 포로로 잡혀 있소.”
“천제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지금 천계 총단에 있소.”
“천계 총단을 아직 점령하지 못했습니까?”
백자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계가 최종 승리를 거뒀다고 해서 당연히 천계 총단이 함락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총살수가 안색을 굳혔다.
“천계 총단은 지금 봉문 중이오. 폐쇄 진법을 가동해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버렸소.”
“아! 그럼 지금 천계 총단에 있는 고수는 어느 정도 됩니까?”
“그것은 아직 모르오. 비록 마계 총단을 기습한 병력은 대부분 몰살되었으나, 여전히 많은 고수가 천계 총단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소. 다만 그런데도 우리 마계가 최종 승리를 거뒀다고 하는 것은 봉문을 했기 때문이오.”
“봉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림과 달리 천계와 마계에서 봉문의 의미는 매우 무겁소. 원칙적으로 봉문을 하게 되면 천년 간 활동을 할 수 없소. 봉문으로 인한 폐쇄진법을 외부에서 강제로 깨트릴 수도 없게 되오.”
“으음, 외부 활동을 천년 간이나 못하게 되나 외부 적을 그동안 막아줄 수는 있으니,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셈이군요.”
“그렇소. 하지만 마제께서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놈들을 섬멸할 생각을 가지고 계시오. 천년이란 세월이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결국 봉문은 끝나기 때문이오. 봉문이 풀리면 그때는 천계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기에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발본색원하려는 것이오.”
“그것이 가능하기는 합니까?”
“물론이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오. 천계의 봉문이 가히 절대적이긴 하나 지성자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소. 그래서 마제님께서 다시 수련에 들어가신 것이오.”
“지성자가 되기 위해서 말입니까?”
“그렇소. 지금 우리 마계의 모든 고수는 마제님의 지성 달성을 돕기 위해 마력을 보태고 있소. 우리 힘만으로 무황연합군 놈들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오.”
“그래도 특별무사들을 보내주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마제님의 특별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오. 죽은 줄 알았던 백자안 그놈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마제께서 놈을 생포하든지 그게 어려우면 시체라도 가져오라고 명하신 것이오. 이제 어느 정도 이해되시오? 요컨대 조만간 마제께서 지성자가 되시게 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될 것이오. 지성자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니까. 멀지 않았소.”
“그렇군요. 역시 위대하신 마제님이십니다. 사실 천제가 회복 불능의 중상을 입은 이상 마제님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백자안 그놈이 있긴 하나, 놈 역시 마제님께 당한 적이 있으니 적수가 되진 못할 겁니다.”
백자안이 말을 한 후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천계가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구나. 지금이라도 내가 지성자가 된다면 늦게라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으련만······.’
무형검 최후의 경지인 지성에 대해 생각하자 백자안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성의 경지는 가히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절대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천제와 마제 역시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마제가 지성자가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 전에 내가 먼저 지성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일단은 무림혈맹 놈들과 마계살수들부터 제거해야 한다. 총살수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나 마계에서 파견한다는 특별고수들이 마음에 걸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