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장] 마계살수 3
“휴우! 어렵구나! 마음만으로 무공을 익힌다는 것이······.”
백자안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있는 곳은 모옥에 마련된 자신의 방이었다.
원래 이 모옥은 방일화가 지은 것인데, 한 달 전 백자안이 깨어나자 그를 위해 방을 한 칸 더 만든 바 있었다.
백자안이 모옥에서 나와 천천히 무저곡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지난 한 달간 요양을 통해 이제 걷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니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활력이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어느 정도 무공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문제는 앞으로도 가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단전이 파괴되면서 무공이 폐쇄되었다. 일부라도 심단전을 형성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를 어떻게 극복한단 말인가. 오늘로써 예정된 한 달이 끝나는데, 과연 이대로 무저곡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애초 그가 한 달 후 계곡 밖으로 나가 저항 세력을 모으려고 했던 것도 어느 정도 무공을 회복한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마제가 내단을 빼앗아가면서 백자안의 단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강도가 너무 심해 무공이 전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였다.
내단이 사라지면 그의 목숨도 유지될 수 없다던 말이 실감 날 정도였다.
이제야 조금씩 기억나고 있지만, 당시 백자안은 정말 죽음의 문턱에 갔었다.
하지만 회오리바람의 신비한 기운 덕분인지 그의 몸에 자체 방어력이 생겨 돌로 변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귀식대법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완전히 그때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신체가 특수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던 백자안으로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한 달 정도면 어느 정도 무공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최소한 삼할 정도만 회복해도 강호로 나가서 웬만한 적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천계비고에서의 무공 상승이 놀라웠기 때문에 기대가 컸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실망 그 자체였다.
‘차라리 그때 마제 그자와 정면승부를 벌였어야 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어설픈 연극을 펼쳤던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구나.’
백자안이 나직이 탄식했다.
그러면서 계속 무저곡 안을 거닐었다.
이렇게 천천히 산책하노라면 머리도 맑아지고 무거웠던 마음도 한결 편안해지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무공을 펼칠 수 없는 몸이라도 무림으로 나가야 할지 결단이 필요했다.
‘그래. 일단 일화 이야기를 들어보자. 강호 소식을 듣고 온다고 했으니, 그에 따라 계획을 수정하면 될 것이다.’
백자안이 안색을 풀었다.
지금 당장 풀 수 없는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상황이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공 생각을 하면 다시 답답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를 더욱더 답답하게 하는 것은 무공 외에 다른 비술도 펼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원래 그가 아는 비술 중에는 내공이 필요 없는 것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 비술 역시 형식적이라도 단전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사용했던 무명폭잠공이 있었다.
무명폭잠공은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내공이 없어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 역시 형식적이라도 단전이 필요했다.
잠재력을 모을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백자안의 경우는 단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어떤 공간도 없었다.
최후의 수단이 바로 마음의 단전, 즉 심단전이었지만 이 역시 지성자가 되어야만 가능했다.
‘남은 것은 진법 정도인데, 그것들 역시 대부분 형식적인 단전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라 난감하구나.’
벡자안이 씁쓸해했다.
그가 아는 진법은 대부분 상승진법이었다. 나뭇가지나 돌 몇 개를 이용해 만드는 일반진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그런 일반진법만으로 고수들을 상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일화가 올 때가 되었는데······.’
백자안이 하늘을 쳐다봤다.
까마득한 절벽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독 안개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 백자안의 무공 실력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높이였다.
‘만약 일화가 돌아오지 않으면 영락없이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야겠군.’
백자안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새삼 방일화라는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방일화 역시 사부를 혼자 놔두고 무저곡 밖으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자안이 무공을 회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 그녀가 좀 더 시간을 갖기 위해 나간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무림 상황이 큰 변동이 없다면 좀 더 무저곡에서 백자안과 함께 지내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다른 목적도 있었다.
백자안으로부터 무명노승이 있을만한 곳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백자안이 낙양 총단을 떠나 태산으로 갈 때 무명노승과 미리 이야기해둔 비밀 연락처였다.
예감이 좋지 못했던 백자안이 미리 무명노승과 비상 연락망 가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던 것이다.
한 달 전 백자안이 돌에서 회복된 후 그 사실을 방일화에게 알렸다. 이번에 그녀가 나가려 하자 그곳에 한번 가볼 것을 권했던 것이다.
‘일화가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운공을 시도해보자. 심단전의 일부라도 형성되면 일주천이 가능할 것이다.’
백자안이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햇볕이 따뜻해 굳이 모옥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무저곡 안의 맑은 공기 덕분에 야외가 더 운공에 적합한 면도 있었다.
‘이곳의 기운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뭔가 전환점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한 달이란 기한을 둔 때문인지 너무 조급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중심을 본다면 심단전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백자안이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눈을 감고 마음의 단전을 찾았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그 속에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실 그의 몸에 특수한 기운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운마저 없었다면 절대 돌에서 다시 회복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백자안이 찾고 있는 기운은 바로 방일화가 무명진기를 자신의 몸속에 넣어주었을 때 반응을 보였던 그것이었다.
꼭 집어 어느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몸속에 잠재해있던 그 기운이 깨어나 자신을 깨웠던 것이 틀림없었다.
‘기운은 단전에만 모이는 것이 아니다. 세맥에도 얼마든지 모일 수 있다. 그것들을 마음으로 관조할 수만 있다면 심단전의 형성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백자안은 마음으로 자신을 봄으로써 심단전을 형성하려 했다.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다. 몸이 허상이라면 단전 역시 허상에 불과한 것. 마음으로 본다면 있고 없음에 초연할 수 있다. 따라서 심단전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저 초연한 마음속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일 뿐.’
백자안은 천천히 여러 법문을 떠올렸다.
다행히 그동안 익혔던 훌륭한 법문들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중 그가 되새겨보는 것들은 바로 무형검의 이론들이었다.
‘무형이란 형식이 없다는 것. 여기서 형식이 없다는 것은 실체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다. 형식의 있고 없음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내 몸 역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 마음이 그런 상태에 도달하면 장애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형식이 없으면 장애도 없게 되는 것이다. 심단전은 그런 깨달음의 상태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굳이 애써 찾을 필요 없이 이미 존재하는 마음자리에 그것이 있지 않을까.’
백자안은 서서히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지 않았지만,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정말 내 단전이 파괴된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정말 내가 내단을 빼앗긴 것일까. 무공이 폐쇄되었다고 낙담했었는데 과연 그럴까. 왜 나는 미리 포기했을까. 사실 내단 같은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도 않았지 않은가.’
백자안은 머릿속에서 뭔가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단전 부위 상처는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기실 단전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해혈에 자리 잡은 기운의 집합체라 할 수 있지. 나는 왜 그것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물론 지금 그가 마제의 손에 단전이 파괴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었다.
마음이 근본이고 외부 공격에 침범을 당하지 않는다면, 단전을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들었을 때 수양을 하면 그러한 마음을 몰아낼 수 있듯이, 마음도 언제든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깨달음이 든 것이다.
‘심단전의 위치는 반드시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 중(中)을 잡아야 이(理)에 도달할 수 있는 법. 그렇다면 마음의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마음이 평정해지는 순간 알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몸이 더욱더 가벼워졌다.
백자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매우 놀랐다.
단순히 기분으로만 생각했는데 몸이 십장 높이까지 떠올라 있었다.
내공 없이 이 정도 높이까지 떠 있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심단전을 형성한 것인가.’
물론 심단전이라 해도 극히 일부이겠지만, 적어도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닥친 문제는 허공에 떠 있는 몸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눈을 감았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상태에서 다시 내려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무 대책 없이 십장 높이에서 추락하게 되면 사망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백자안은 심호흡을 한 후 마음의 중심을 잡았다.
담담한 마음으로 심단전을 한번 어루만져준다는 느낌이었다.
‘일단 내려가야겠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조금씩 연습하면 될 것 같다. 너무 욕심내지 말자. 겨우 실마리를 얻었을 뿐이니까.’
백자안이 의념을 일으켜 서서히 몸을 하강시킬 바로 그때였다.
백자안의 머리 위로 뭔가가 나타났다.
쉬쉬쉬익.
파공성에 급히 고개를 들어 올린 백자안의 안색이 굳어졌다.
귀면탈을 쓴 세 명의 살수.
품 자형을 한 그들이 빠르게 무저곡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마계살수!’
백자안이 그들의 정체를 추정하며 급히 아래로 내려왔다.
허공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경지까지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지상에서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쿵.
다소 투박한 착지를 한 백자안이 위를 쳐다봤다.
귀면탈 사내 세 명이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 신법만 봐도 절세고수임이 틀림없었다.
방일화를 통해 귀면탈 모양까지 들었던 백자안으로서는 그들이 마계살수임을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을 직접 상대할 것인가의 여부였다.
다행히 계곡 아랫부분에 안개가 엷게 끼어 있어, 그들이 아직 백자안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무리할 필요 없다. 아직 심단전이 견고하지 못하니 무조건 내가 패한다. 은둔술로 몸을 숨긴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백자안이 급히 은둔술을 펼쳤다.
심단전의 일부가 생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스슷.
그의 몸이 연기처럼 변하더니 가까이 있는 절벽 면으로 사라졌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절벽 표면에 몸이 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은둔술로 인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얼마 후 마계살수 세 명이 무저곡 바닥에 착지했다.
척척척.
“방일화 그 계집의 흔적이 절벽 위에서 발견되었다. 샅샅이 뒤져라.”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