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장] 우담화 2
마계 뇌옥.
마계자루에 담겨 이곳에 가둬진 백자안은 종일 자루 안에 있었다.
가까스로 자루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지옥염화지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운공도 가능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 뇌옥에 도착했을 때 다시 여러 혈도를 찍혔다.
마계 뇌옥의 옥장이 혹시 몰라 직접 혈도를 찍은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옥염화지에서 당한 내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특수 독으로 어떤 고수라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시 말해 장소를 옮겼지만, 여전히 그는 지옥염화지에 있는 셈이었다.
‘삼중으로 제압된 셈이구나. 하기야 꼼작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게 하나든 열 개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백자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자만심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었다.
마계의 힘은 생각한 것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시 의기소침해질 수는 있지만, 그에게는 근원적인 어떤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를 믿어야 한다. 지금 내게 희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잠시 맛보았던 지극한 깨달음의 경지다.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백자안이 묵상에 잠겼다.
운기조식은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것은 가능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지옥염화지에서 깨달았던 깨달음의 일부가 떠올려졌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 내용이 아니라 느낌이었다.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깨달음의 일부가 이미 그의 몸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순간, 천마력이 다시 일어났다.
백자안이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운공을 시도했다.
‘이런 상태에서도 다시 기운이 살아나다니 역시 이곳이 마계라서 그런 것인가.’
천마력은 지옥염화지에서도 살아났다가 마계심판관에게 제압되면서 사라진 바 있었다.
한데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아무래도 깨달음의 일부가 되살아나면서 천마력 또한 다시 회복된 것 같았다.
‘일단 지옥염화지에서 당한 내상부터 회복한다. 하기야 천마력은 지옥염화지에 그렇게 구애받지 않았었지.’
백자안이 천마력을 운공하며 일주천을 시도했다.
무명심법이나 구중천심공은 아니었지만, 일반 내공심법의 원리로 일주천이 가능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옥염화지에서 당한 내상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것은 특수 독이었기에 일종의 해독이 된 셈이었다.
그다음은 옥장에게 당한 혈도를 푸는 일이었다.
한데 이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무명점혈술을 펼치자 막힌 혈도가 그대로 풀렸다.
내상이 회복되자 무명심법과 구중천심공이 가능해진 것도 컸다.
이제 남은 것은 마계자루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쉽게 풀 수 있었다.
원래 마계자루 안에서는 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미 천마력으로 운공이 가능해지자 그 제한 역시 사라진 것이었다.
부우욱.
마계자루가 찢기며 백자안이 마침내 자루 밖으로 나왔다.
온몸이 자유롭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간수는 감방 바깥에 없었다.
그가 갇혀 있는 곳은 마계 뇌옥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곳으로 간수들은 입구 쪽에 있었다.
내친김에 감방 문을 열려던 백자안이 멈칫했다.
저벅저벅.
감방 쪽으로 들리는 발소리 때문이었다.
백자안은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기다렸다.
애써 감방문을 열 필요 없이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가 진성마신들을 상대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단 부딪혀 본 후에 생각할 문제였다.
덜컹.
감방 문이 열리며 다섯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바로 허공대마신을 비롯한 마계심판관들과 이중마인, 그리고 옥장이었다.
“아니!”
이중마인이 마계자루에서 나온 백자안을 보고 놀랐다.
마계심판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놈이!”
하지만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해온 사람은 바로 옥장이었다.
백자안이 탈출하게 되면 가장 먼저 문책을 당할 사람이 바로 그였다.
참고로 그 역시 진성마신이었다.
슈우욱.
그의 우수가 빠르게 다가와 백자안의 목을 움켜쥐었다.
우두둑.
목뼈가 그대로 부러지며 백자안의 목이 꺾였다.
“이런!”
허공대마신이 안타까워했다.
어이없게 백자안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백자안이 진성마신의 살수를 당해낼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마계자루에서 벗어났기에 어느 정도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백자안이 축 늘어져 시체로 변하자, 이중마인 역시 다급한 표정이었다.
“큰일 났군요. 천상선녀 그 계집이 지금 총군사님과 협상 중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이놈을 데려오라고 한 명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큰일입니다.”
허공대마신이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하지만 이놈과 교환할 것이 있다고 총군사님이 말씀하셨는데······.”
“교환을 하려는 분은 아마 총군사님이 아니라 마제님일 것이다. 어떤 것도 마제님을 속일 수 없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옥장이 고개를 숙였다.
뇌옥대마신(牢獄大魔神)으로 불리는 그 역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오. 일단 시체부터 확인하시오. 몸속에 지존검과 천마검을 숨긴 것 같으니 진짜 죽었다면 그것들을 모두 토해낼 것이오.”
“네.”
뇌옥대마신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마계심판관의 지위는 마계 장로와 동등했기 때문에 옥장에 불과한 그는 명을 따라야 했다.
뇌옥대마신이 백자안의 시체에 손을 댔을 때였다.
피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시체가 한 줌 고름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뇌옥대마신이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허공대마신이 허공마검으로 그 고름을 이리저리 휘저어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으음, 지옥염화독(地獄炎火毒)에 의해 몸이 녹아내린 것 같소. 하지만 조금 이상하군.”
“무엇이 이상합니까?”
이중마인의 물음이었다.
그가 보기에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허공대마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이놈이 우리 이목을 모두 속이고 탈출한 것은 아니겠지. 분신술이 그렇게 뛰어날 수는 없을 텐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놈은 분명 진짜였습니다.”
“일단 고름을 담아간다. 총군사께서 보시면 진위를 알아내실 수 있을 것이다.”
허공대마신이 품속에서 붉은 통 하나를 꺼내 고름을 담았다.
“군사전(軍師殿)으로 갑시다.”
허공대마신이 신형을 돌려 뇌옥 바깥으로 향했다.
이중마인 등 나머지 일행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하하하! 오랜만이오. 천상선녀.”
“오랜만이군요. 마선생님.”
천상선녀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앞에는 마계 총군사 마선생이 앉아 있었다.
천계사자 자격으로 온 그녀는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고 이렇게 마선생과 독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녀가 원한 바는 아니었다.
사실 보다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마제를 직접 만나보고 협상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백자안을 데려가는 일은 실무적인 절차가 필요해 마선생과 협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백자안 그자는 본계의 사자를 살해하는 중죄를 저질러 지금 마옥(魔獄)에 갇혀 있소. 우리는 율법에 따라 그자를 처형하려 했으나, 천계의 긴급한 부탁으로 형을 조금 미루어 놓았소.”
“원하는 게 뭔가요? 백자안 그분을 풀어주는 대가로 마계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하하하. 역시 천계제일지(天界第一智)로 손꼽히는 천상선녀답소. 천상선녀도 알겠지만 백자안 그자가 우리에게 붙잡힌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소.”
“일종의 업보란 말씀인가요?”
“그렇소. 나는 예지력으로 그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물론 우리 마제님께서도 마찬가지요. 모든 것은 운명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어서 말씀하세요. 원하는 것을. 다만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힘이 없어 이렇게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우리 천계와 마계 사이의 전면전을 막기 위해서일 뿐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하하하. 아무래도 좋소. 다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말씀하세요.”
“다들 알다시피 백자안 그자는 그동안 무림의 수장이 되어 많은 일을 했소. 무림의 일을 제외하면 정심회 반선들과 백대마신을 제거한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그 결과 지금 신선계는 은둔반선들이 다시 지배하는 곳이 되고 말았소. 그동안 정심회와 백대마신을 지원해온 본계로서는 실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직접 관여하지 못하는 것이 양계의 약속이 아니었던가요?”
“물론이오. 그래서 백자안 그자에게 본계 사자를 죽인 죄만 물으려 하는 것이오. 사실 말이지 백대마신 그자들은 본계의 반역자들이었소. 감히 일반마신 주제에 본계의 질서를 부정하고 반역을 꾀하려 했소.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능력을 깨닫고 신선계로 진출하려 했지. 물론 그 때문에 신마대전이 벌어지고 말았지만, 본계는 그 전쟁에 원칙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소.”
“그 점은 우리도 알고 있어요. 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요?”
“백자안 그자의 삶과 무공에 천계가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소. 대체 그자의 정체가 무엇이오? 마제님의 추측대로 그가 정말 천계 태자로 생사천겁 중이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것은 본계의 사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하하하. 부인하지 않는 것을 보니 천계 태자가 맞는 것 같구려. 이제야 의문점이 풀리는 것 같소. 천계 태자가 진정한 태자 자격을 갖춰 향후 천제가 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할 생사천겁 때문에 이렇게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오? 직접 무력으로 개입하면 생사천겁이 실패할 테니까 말이오.”
“원하는 것을 말씀하세요. 마계에서 그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이니 어서 말씀하세요.”
“좋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우담화요. 나의 예지력에 의하면 천계 태자의 생사천겁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와 있소. 다만 처음부터 결론이 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그가 지금 본계에 잡혀 온 것이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백자안 그분이 우리 천계의 태자인지 아닌지는 말씀드릴 수 없으니 너무 확신하지 마셨으면 좋겠군요.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우담화를 달라는 제의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우담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이에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우담화를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하하하!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발뺌하다니. 좋소. 이렇게 나온다면 백자안 그자는 죽게 될 것이오. 본계 사자를 죽인 죄로 처형하는 것은 우리가 먼저 평화협정을 깨트리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오. 이상이오. 이만 천계로 돌아가시오.”
“너무 성급하시군요. 백자안 공자를 보여주시면 천제께 한번 건의를 해보지요.”
“으음, 좋소.”
마선생이 고개를 끄덕인 후 손뼉을 치자 한 사람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호법대마신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총군사님.”
“백자안 그자를 군사전으로 데려왔소?”
“허공대마신 등이 데리러 갔으니까 곧 올 겁니다.”
“알겠소. 하하하. 들었소? 천상선녀께서 그자의 얼굴을 보자 할 줄 알고 이미 명령을 내려놓았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알겠어요. 다만 백자안 공자의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겼다면 절대 좌시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