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장] 구천마녀 3
절대황녀의 치료 방법을 두고 생긴 백자안의 고민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무리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여황제를 상대로 음양화합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백자안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바로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일각 정도.
일각이 지나면 절대황녀의 몸은 그대로 터져 즉사하고 말 것이었다.
그녀가 죽는 것을 방치하는 것 또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자안은 자신이 알고 있는 비술들을 계속 떠올렸다.
특히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선비급에 수록된 비술들이었다.
워낙 많은 비술이 있어 실제로 펼쳐본 것은 극소수이지만, 그중에 음독을 해독하는 비술이 있긴 있었다.
그 내용은 조금 특이했다. 만약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음약에 중독이 되었다면 그 음약의 기운을 흡수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환자의 음독을 해독시킬 수 있지만, 그 독이 치료를 한 사람 몸으로 이동한다는 점이었다.
의사가 환자 대신 중독되는 셈이니 그 방법은 현실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백자안은 사태의 시급성을 고려하여 그 전이해독술(轉移解毒術)을 펼치기로 했다.
‘차라리 내가 음독에 당하는 것이 회복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다만 한 시진 정도 방어력을 상실할 것이 확실하구나. 만약 구천마녀가 그것을 노렸다면 그 또한 큰일이다.’
백자안이 석실 문 앞에 급히 보호진을 쳐두었다.
호법이 없었기에 진법으로 방어막을 쳐둔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이해독술을 펼치는 것이었다.
순간 백자안이 조금 주저했다.
일단 독을 자신의 몸으로 이동시킨 후에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명심법과 구중천심공을 익힌 나의 경우는 다르다. 내 몸은 만독불침이니 설사 중독이 되더라도 한 시진 정도 회복운공을 하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석실 문 앞에 쳐둔 보호진법 역시 그동안 적을 막아내 줄 것이다.’
백자안이 막 온몸의 혈관이 터지려 하는 절대황녀의 기해혈에 우수를 갖다 댔다.
전이해독술을 펼치니 그녀의 몸속에 있던 음독이 백자안의 손으로 흡수되었다.
백자안의 손이 벌겋게 변한 것은 그때였다.
백자안은 자신이 음독에 중독된 것을 느꼈으나 흡수를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공을 높여 그 속도를 더욱더 빠르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음독이 모두 백자안의 손에 흡수되었을 때 절대황녀가 짧은 신음성을 내며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백자안은 그녀를 바닥에 눕힌 후 가부좌를 틀고 회복운공에 들어갔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매우 다급해 보였다.
예상은 했었지만, 음독의 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음독이 다른 사람 몸으로 이동하면 그 독성이 배가되는 성질이 있는 것을 몰랐구나. 내 계산이 잘못되었다. 무엇보다 마계의 독이라서 그런지 나 또한 뚜렷한 해독방법을 모르겠구나.’
백자안이 손에 모인 음독을 발산시켜 삼매진화로 태우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발 때문인지 독성이 다시 두 배 이상 강해졌다.
백자안이 구중천심공을 극성으로 펼쳐 다시 한번 해독을 시도했다.
순간, 꿈쩍도 하지 않던 음독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다만 방어력이 급격히 약화한 것이 문제였다.
최대한 변수를 줄이기 위해 호신강기를 남겨두었으나, 해독을 위해 그 내공마저 사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여유가 있었다.
바로 보호진법 때문이었다.
적이 나타난다고 해도 한 시진 정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 백자안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외부 적의 침입도 없고 해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음독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상황.
아무리 마계의 특수독이라고 하지만 백자안의 몸은 만독불침이었다.
사실 이번 음독도 중독이라기보다는 기혈방해의 의미가 더 컸다.
‘조금만 더. 다 됐다.’
백자안이 자신의 몸속에서 음독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을 느끼며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몸속의 독이 완전히 해소되는 순간.
인간의 몸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 순간적이지만 정지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백자안은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음독이 완전히 해소된 바로 그 순간.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백자안의 뒤에서 쓰러져 있던 절대황녀가 갑자기 일어나 일장을 후려친 것이었다.
팍.
“으윽!”
백자안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음독은 제거되었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투투툭.
절대황녀가 백자안의 마혈을 찍었다.
이미 기혈이 뒤틀려 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백자안이 별 반항도 못 해보고 당하고 말았다.
“대체 왜?”
백자안이 당황한 표정으로 절대황녀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빛이 아까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설마······ 구천마녀라는 계집이 바로 너였느냐?”
“호호호. 그렇다. 네놈을 제압하기 위해 여황제의 몸을 잠시 빌렸다. 너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확실히 절대황녀 그 계집이었으니까.”
“으으······ 감히 폐하의 몸을 탈취하다니.”
백자안이 분노했다.
황제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상대에 대한 분노였다.
“호호호! 재미있구나. 나는 네놈 성격을 간파한 후 이번 작전을 계획했다. 이미 네놈의 무공이 너무 높은 경지에 도달해 정면으로 싸우면 내가 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폐하는 어떻게 된 것이냐?”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아비의 몸을 천마신이 취한 것처럼 나 역시 몸을 빌린 것뿐이니까. 지금은 황제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날 죽일 생각이냐?”
“물론이다. 네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차질이 벌어졌는데, 어찌 살려두겠느냐? 하지만 그전에 네놈이 할 일이 있다.”
구천마녀가 품속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붉은빛을 내는 것이었다. 구천마녀가 그것을 백자안의 왼 손목에 채웠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수갑처럼 꽉 꼈다.
“이것이 무엇이냐?”
“호호호! 나의 구천마장(九天魔掌)을 격중당하고도 말은 잘하는구나. 역시 소문대로 대단한 놈이군. 하지만 네놈의 내장이 이미 뒤틀린 것을 잘 안다. 그 상태에서 내공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게다가 특수 점혈까지 당했으니 네놈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어 마계의 법보인 구천마갑(九天魔匣)까지 채웠으니 조금 과했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나를 어찌할 셈이냐?”
백자안이 운공을 시도했으나 역시 아무런 내공도 모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나를 죽이려 한다면 피할 방법이 없겠구나.’
백자안이 낙담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네놈을 일단 살려둔 것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해 네놈이 흡수한 서약의 돌의 기운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뜻이냐?”
“네놈 피로 살릴 마신들과 반선들이 중간지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너는 나를 따라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팔다리만 자르고 몸뚱이는 남겨 목숨을 부지하게 해줄 용의가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지난번 신선계 서약봉에서 죽었던 마신들과 반선들이 모두 중간지대로 갔단 말이냐?”
“그렇다. 천마신 한 명만 빼고 모두 중간지대로 이동되어 돌이 되고 말았지. 이게 다 바로 네놈 때문이다. 그 바람에 정심회 반선들과 마신들을 관리해야 할 내 입지가 크게 약해졌다.”
구천마녀가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에라도 백자안을 죽일 기세였다.
백자안이 흠칫했으나 이내 안색을 회복했다.
상대가 흥분할수록 자신이 이 위기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지금도 계속 운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비록 구천마녀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아 내부 장기가 완전히 가루가 될 뻔했지만, 그의 선천진기까지는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격을 받은 당시 즉사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구천마녀가 어느 정도 힘을 조절한 결과였다.
아직 백자안을 살려두어야 하므로 그녀 역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백자안을 제압하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지는 그녀였다.
“지금이라도 나는 널 죽일 수 있다. 마계 총단의 징계를 받겠지만, 그렇다고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마계 총단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성마신이냐?”
“호호호. 그건 몰라도 된다. 아쉽지만 마계가 직접 개입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천계 때문인가?”
“그렇다. 어느 쪽이라도 묵계를 깨트리면 마계와 천계 간 전면전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두 곳의 힘이 비등해 그것은 그 누구도 바라고 있지 않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마계사자로서 너를 죽여도 상관없는 것이다.”
“복잡하군. 좋다. 천계와 마계가 서로 사실상 전면전을 벌일 수 없는 점은 나도 이해를 한다. 아니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그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이 있다.”
“무슨 의문이냐?”
“백대마신 역시 마계 출신으로 아는데 왜 그들은 직접 개입을 했던 것이냐? 그들은 분명 신선계 장악을 시도했고 심지어 일부는 무림까지 진출했었다. 그것은 천계와 마계 상호간의 묵계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백대마신은 이미 봉인을 당했기 때문에 더는 마계에 속해있지 않다. 그들이 마계가 아닌 신선계에 봉인당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그럼 봉인되기 전에는 마계의 마신들이었느냐? 만일 그렇다면 그들 역시 처음에는 진성마신이었단 말인가?”
“백마회 마신들이 원래 마계 소속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진성마신이 아니라 일반마신에 불과했다. 마계의 모든 요직을 진성마신이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은 그들은 다른 일반마신들과 함께 마계를 나와 신선계로 진출한 것이다.”
“그래서 천계에서 천신들을 보내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냐?”
“그렇다. 천신과 마신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지. 하지만 그것은 전면전은 아니었다. 마계에서 즉시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고 발표했기 때문이었지.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진성마신들은 굳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영화가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천계로서도 전면전은 부담이 되었기에 그런 마계 총단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계 일반마신들의 이탈은 상당했고, 그들의 수장이 바로 천마신이었다.”
“으음, 그렇게 된 것이로군. 그럼 전쟁의 결과 천계가 승리했고 마신들에 대한 봉인 역시 그때 이뤄진 것인가?”
“그렇다. 천계와 마계의 양 주력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피해는 매우 컸다. 하지만 천계의 지원을 받은 천신들과 달리 마계의 지원을 받지 못한 마신들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승리한 천신들은 살아남은 마신들을 봉인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했었지. 하지만 오랜 세월이 다시 흐르자 마신들의 봉인이 풀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였다. 하지만 네놈 때문에 모든 게 어그러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이용해 다시 마신들을 부활시키려는 것인가? 그것이 마계의 뜻인가?”
“그렇다. 이미 한번 봉인을 푼 바가 있는데 어찌 두 번 부활을 시키지 못하겠느냐? 다만 이번에는 네놈의 힘이 꼭 필요하다는 차이뿐이지.”
구천마녀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백자안은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운기를 시도했으나 여전히 실패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여러 의문을 풀고 싶은 그였다.
“정심회 반선들과 백대마신들이 죽지 않고 중간지대로 이동되어 돌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천신들이 서약의 돌을 이용해 안배해두었기 때문이지. 천계에 있는 진성천신(眞性天神)들은 정말 무서운 놈들이다. 그런 안배를 해두었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구천마녀가 말을 한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보호진법이 풀어진 석실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마의를 입은 평범한 노인이었다.
“구천마녀님. 저놈이 또 혈도를 풀려고 수작을 벌이고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호호호. 알고 있어요. 조금 늦게 오셨군요. 천마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