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장] 지존맹 3
백자안과 천산객, 장초 세 사람이 낙양에 도착한 것은 영웅대회 닷새 전이었다.
내일부터 비무대회 예선이 열리기 때문에 마침맞게 도착한 셈이었다.
백자안은 가장 먼저 방일화에 대한 소식을 수소문했으나, 그녀가 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백자안이 안도한 것은 물론이었다.
객잔 이층에 큰 방을 하나 잡고 여장을 푼 세 사람은 일층으로 내려와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그동안 쉴 새 없이 마차를 타고 오느라 제대로 식사다운 식사를 못 했었다.
그래서 한 끼 정도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다들 있었다.
“하하하! 다들 고생이 많으셨소. 이제 장 공자는 내일 예선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오?”
천산객이 술을 한 잔 먹으며 물었다.
일행의 식사는 이제 거의 다 끝나가고 죽엽청 한 병을 시켜 대작하고 있었다.
“네. 내일부터 사흘간 예선전이 벌어지고 하루 쉰 후 영웅대회 당일 본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데 지존객께서도 이번 지존비무(至尊比武)애 관심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왕이면 함께 참가했으면 합니다.”
지난 닷새간 제법 친해진 듯 장초가 미소를 지으며 백자안을 바라봤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실력이 부족한 제가 참가해봤자 무슨 좋은 결과가 있겠습니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욕이 있었지만, 지금 보니 참가자가 너무 많아 어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러지 말고 참가해 보시오. 지존객 역시 아직 젊은데 도전을 두려워해서야 되겠소?”
천산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백자안이 물었다.
“혹시 천산객께서도 이번 지존비무에 참가하실 생각입니까?”
“하하하. 그걸 어떻게 알았소? 사실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나이가 많아 자격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단념했었소. 한데 알고 보니 나이 제한이 없다는 게 아니오? 게다가 본선에만 올라도 무림맹 정식무사 자격을 준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내 능력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반드시 합격하실 겁니다.”
백자안과 장초가 덕담했다.
하지만 백자안은 여전히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가 한가하게 비무시합에 나갈 상황은 아니었다.
알아봐야 할 사항이 너무나 많았다.
물론 그중 급선무는 바로 방일화의 구출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새로 보수를 한 금마옥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 이번에 공사를 하면서 그 장소마저 완전히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무림맹 지하에 있던 금마옥이었지만, 지난번에 입구 부근이 완전히 파괴된 바 있었다.
그래서 아예 다른 장소로 옮긴 것 같았다.
다만 여전히 무림맹 지하에 있어 새로 만든 게 아니라 보수라는 표현이 들어간 듯했다.
“저는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선이 사흘간 벌어진다고 했습니까?”
“그러하네. 하지만 일차, 이차, 삼차로 나뉘기 때문에 사흘을 모두 참가해야 본선에 오를 수 있을 걸세.”
“아! 그럼 내일 일차를 통과해야 그다음 날 이차 시험을 볼 수 있고, 이차도 통과해야 삼차 시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군요.”
“그러하네. 워낙 많은 인원이 참가하기 때문에 내일 일차시험에서 대부분 탈락할 것이네. 아마도 특수 기관이나 진법이 설치되어 있겠지.”
천산객이 안색을 굳혔다.
그 역시 자신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우승자에게는 어떤 혜택이 있습니까?”
“우승자에게는 부맹주 자리가 주어진다고 하네. 이번에 방일화가 금마옥에 갇히면서 부맹주 자리가 공석이 되자, 백 대협께서 부맹주 자리를 우승자에게 주기로 결정하신 것이지. 아마도 그 때문에 참가자가 열 배 이상 늘어났을 것이네.”
“으음······.”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부맹주 자리가 걸려있다는 말에 그 역시 솔깃해진 것이다.
‘일단 오늘 밤 일화를 구출한 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 * *
지존맹 총단 지하.
새롭게 만들어진 금마옥 가장 구석진 곳 한 감방 안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으······.”
고문으로 인해 온몸이 피투성이인 소녀.
바로 방일화였다.
백자안의 제자로 지존맹 부맹주까지 되었던 그녀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혈도가 찍혀 있는데다가 감방 벽에 특수 쇠사슬로 이중으로 묵혀 있었다.
지금은 반쯤 실신한 상태였다.
원래는 의식이 없어야 정상인데 통증이 너무 커서 그마저도 가능하지 않았다.
끼이익.
감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한데 그는 바로 백자안이 아닌가.
아니 백자안으로 역용한 반야마신이었다.
놀랍게도 그동안 그가 직접 방일화를 신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철썩.
반야마신이 뺨을 후려치자, 방일화가 눈을 떴다.
서서히 꺼져가던 생명이 마지막으로 다시 타오르는 듯 눈빛이 번쩍였다.
“후후후! 계집! 어차피 네년은 중독이 되어 얼마 버티지 못한다. 어서 말해라. 네년이 백자안에게 배운 무공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살고 싶지 않으냐?”
“퇫!”
방일화가 반야마신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하지만 반야마신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방일화가 이번에는 소리 내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주위 음파가 차단되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곳은 금마옥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게다가 반야마신의 명에 의해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아예 감옥을 만들 때 반야마신 한 사람만 드나들 수 있도록 맹주 집무실과 연결해 놓았던 것이다.
“할 수 없군. 말을 하지 않으면 네년을 죽일 수밖에. 어차피 중독으로 죽게 되겠지만 네년을 직접 죽여 백자안 그놈에게 당한 동료마신들의 원한을 갚겠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사부님께서 나타나셨느냐?”
“후후후! 처음부터 백자안 그놈만 찾더니 궁금하긴 한 것 같구나. 하기야 그러니까 단번에 나의 정체를 간파했지. 하지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나의 역용은 완벽한 것이었는데, 어떻게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느냐?”
“사부님의 체취 때문이다. 어서 말해라. 사부님은 어떻게 되셨느냐?”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방일화가 회광반조 현상을 드러내며 무섭게 재촉했다.
반야마신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이야기해 주지. 일단 백자안 그놈은 죽었다. 네년이 실망할까 봐 그동안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놈이 죽은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이야기다.”
“그럴 리가 없다. 사부님께서는 그렇게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백자안이 죽은 것은 확실하다. 신선계 서약봉이 파괴되면서 육신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소멸해버렸으니까. 그러니 너도 집착을 버리고 내 말을 들어라. 백자안 그놈은 만약을 위해 분명 네게 무공을 남겼을 것이다. 아니 네가 그동안 배운 심법이라도 이야기해 주면 된다. 내가 알아서 그 심법의 정수를 깨달으면 되니까.”
반야마신이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방일화가 눈을 빛냈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욕구라기보다 좀더 확실히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보였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 자세히 이야기해보아라. 그러면 나 역시 한번은 고려해보겠다. 사부님께서 전수하신 기본심법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
“후후후! 좋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뭐든지 물어봐라. 다시 말하지만 너는 중독으로 인해 불과 한 시진도 버틸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해독을 시키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개소리하지 말고 사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그날 일을 자세히 설명해라.”
방일화가 재촉했다.
그러면서 재빠르게 무명심법을 운기했다.
그것은 그녀로서 마지막 시도였다.
물론 그동안 무명심법을 통해 해독과 해혈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상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엇보다 반야마신의 점혈 수법이 워낙 특이해 풀 수 없었다.
해혈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독은 더욱더 불가능했다.
한데 조금 전 회광반조 현상이 일어나며 역설적으로 무명심법의 운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방일화는 처음 그 사실을 몰랐으나 반야마신이 백자안의 무공을 계속 요구하자, 자신도 모르게 무명심법을 운기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기혈이 뚫리게 되었다.
사실 그녀의 무형공력이 좀 더 깊었다면 반야마신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반야마신이 말했다.
“사실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천마녀께서 전해준 말씀이니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구천마녀는 또 누구냐?”
“그분은 마계의 사자님이시다. 그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무림과 신선계를 오가는데 아무 장애가 없는 분이시지. 아니 마계까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니 나보다 훨씬 마력이 높은 분이다.”
“알았다. 어서 말해라. 사부님께서 어떻게 소멸하였다는 말이냐?”
“얼마 전 천마신께서 정심회와 우리 백마회의 총회주가 되신 날에 벌어진 일이다.”
반야마신이 천천히 서약의 돌이 파괴된 그 날 일을 설명했다.
백자안이 정신을 잃고 그 육신이 무저곡으로 이동되기 전까지의 일이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었다.
놀랍게도 그 내용은 거의 정확했다.
“당시 서약의 돌이 폭발하며 일만여 반선들과 백대마신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그 시신들 역시 서약봉 전체가 무너져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 네놈 사부 역시 그 와중에 온몸이 가루가 되어 가장 먼저 소멸하고 말았다.”
“정심회 반선들과 백대마신 모두가 죽었다는 말이냐?”
“그렇다. 그야말로 서약의 돌의 저주를 받은 셈이지.”
“구천마녀라는 계집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느냐?”
“그것은 바로 신선경 덕분이다. 신선경은 정심회주인 정심반선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특징 중 하나가 그날 있었던 일들이 모두 거울 속에 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구천마녀께서 서약봉에 도착했을 때는 거대한 돌무덤이 조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시신을 한 구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지.”
반야마신이 말을 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방일화가 말했다.
“너는 동료 마신들이 모두 죽었는데 슬퍼하는 표정이 아니구나.”
“후후후! 당연하지. 사실 천마신을 비롯해 백대마신들이 예정대로 무림으로 왔으면, 가장 피해를 볼 사람은 바로 나였다.”
“천마신에게 지존맹주 자리를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냐?”
“그렇다. 역시 백자안의 제자답군. 하지만 누가 봐도 불공정하지 않으냐? 무림을 평정한 것은 바로 나다. 한데 마신들의 대표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천마신에게 맹주 자리를 넘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천마신 그자 역시 죽었느냐? 내가 알기로 그자가 죽으면 다른 마신들도 모두 소멸한다고 들었는데······.”
방일화가 말을 하며 계속 무명심법을 운기했다.
그 덕분에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위기가 조금씩 해소되고 있었다.
물론 아직 해혈이 된 것은 아니지만, 중독 현상은 조금씩 해소되고 있었다.
반야마신이 껄껄 웃었다.
“나 말이냐? 나는 신선계와 무림을 오가는 특수 능력을 지니고 있어 그러한 제한에 구속되지 않는다. 천마신이 죽어도 저절로 내가 죽는 것은 아니지. 다만 다른 마신들과 달리 천마신의 경우 부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점은 우리 사부님도 마찬가지가 아니야? 당시 육신이 사라진 것이 소멸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순간 이동하신 것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
“그럴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다만 아까 말했지만 천마신의 경우는 가능하지.”
“지금 보니 너는 천마신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것이구나. 그가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 사부님의 무공을 배워두려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냐?”
“후후후! 그렇다. 구천마녀께서 말씀하시더군. 백자안 그놈의 무공이 사실 천마신 보다 높았다고. 천마신이 그놈의 아비 몸을 빼앗지 않았으면 반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야. 그때 상황은 아까 설명해줬으니 됐고, 이제 네가 배운 무공을 말해라.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여황제가 되신 절대황녀와 네놈이 혼인한다고 들었다.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후후후! 내가 자랑으로 한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혹시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냐?”
반야마신이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백자안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은 섬뜩했다.
방일화가 애써 침착하며 무명심법 운기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더 있으면 혈도를 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