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장] 지존맹 2
“절대황녀께서 여황제가 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한데 귀하는 뉘십니까?”
“아, 저는 무명소졸에 불과합니다. 지존객(至尊客)으로 불러주시면 될 겁니다.”
백자안이 얼굴을 조금 붉히며 말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촌장 집에 있는 객방이었다.
이전에 그가 살던 집이라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새 촌장은 집을 사들인 후 대대적인 개조를 해 이전과 달라진 부분도 많았다.
백자안과 함께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둘 다 무림인이었는데, 예상대로 낭인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천하를 떠돌다가 백자안의 고향 마을에 이렇게 들른 것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사십 대 중년인으로 별호는 천산객(天山客)이라 했다.
다른 한 명은 백자안과 비슷한 이십 대 청년이었다. 별호는 따로 없고 그 이름이 장초(長草)라 했다.
두 사람 역시 서로 초면이었으며, 이곳에서 친해졌다고 했다.
촌장과 인사를 나눈 백자안은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객방으로 안내되었다. 일종의 식객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쉽게 친해지며 담소를 나누게 된 것이었다.
촌장에게서 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백자안으로서는 이들 두 식객에게 무림과 황궁의 일을 묻고 있는 중이었다.
그 결과 무림의 상황은 예상대로였다.
반야마신이 자신으로 행세하며 지존맹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게다가 백자안의 우려와 달리 큰 문제 없이 맹주직을 수행해 칭송이 자자하다고도 했다.
백자안으로서는 안도하면서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종의 음모 아래 무림인들에게 신뢰감을 주려고 일부러 연극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백자안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절대황녀의 복귀였다.
중간지대 망부곡에 있는 망부석 중 하나로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녀가 황제가 되었다니 실로 놀랄 만했다.
백자안이 다시 물었다.
“절대황녀께서 황제로 등극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전대 황제께서는 돌아가셨다는 겁니까?”
“어떤 전대황제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천산객이 웃으며 물었다.
“그야 절대황녀의 부친을 말하는 겁니다.”
“그럼 전전대 황제라 할 수 있겠구려. 승상 출신이었던 전대황제는 백자안 대협에게 죽임을 당했으니까.”
“네.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하하. 그동안 산속에라도 있었던 것이오?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사정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좀 말씀해주십시오.”
“그럽시다.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천산객이 뜸을 조금 들인 후 말했다.
“일단 전전대 황제께서는 붕어하셨소. 승상 그놈이 황위를 찬탈한 후 황궁 깊은 곳에 유폐를 시켜두었는데, 반년 전 낙양 영웅대회에 참석하러 가기 전에 그만 죽여 버렸던 것이오. 절대황녀께서 황군을 이끌고 황궁에 복귀해 수색하다가 그 시신을 발견하고 대성통곡했다는 후문이오.”
“절대황녀께서는 장사성 전투 때 실종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당시 절대황녀께서는 정심회 반선들에게 붙잡혀 있었다고 하오.”
“신선계에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하지만 현재 지존맹주로 계시는 백자안 대협께서 구출해오셨소. 치료를 위해 중간지대란 곳에 가셨던 백 대협께서는 회복 후 신선계로 가셨고, 그곳에서 정심회 반선들과 마신들을 제거한 후 절대황녀까지 구출해 오신 것이오. 이후 절대황녀께서는 황군을 인계받았고 곧바로 황궁으로 돌아가 부친의 죽음을 확인했소. 이후 그녀가 조정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된 것은 순리가 아니겠소? 지금은 황궁 내 반역도 잔당을 모조리 숙청하고 왕도정치를 펼치고 있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오.”
“으음, 그랬었군요.”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처음에는 절대황녀의 복귀 소식이 너무나 반가웠지만, 반야마신이 그녀를 데려왔다는 말에 의구심이 들었다.
‘절대황녀 역시 가짜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구나. 물론 진짜 공주를 구출했을 수도 있지만, 반야마신 그자가 공주의 황제 등극까지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까 들으니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난다는 것 같던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하하하. 정말 강호 소식을 전혀 모르는구려. 우리가 가는 것은 바로 낙양 지존맹 총단이오. 열흘 후 지존맹 총단에서 영웅대회가 열리는데, 그때 백 대협과 여황제 두 분의 혼인식도 거행될 예정이니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소?”
“아!”
백자안이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반야마신과 절대황녀의 혼인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장 공자께서도 가십니까?”
“네. 이번 혼례식은 무림과 황궁이 하나가 되는 큰 행사라 할 수 있지요. 혼례식 전에 대회가 시작되는데 비무대회가 벌어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실력이지만 저 역시 참가해서 실력을 평가받아볼 생각입니다.”
“네. 아무쪼록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한데 현재 지존맹 부맹주는 어떤 분이 맡고 있습니까? 백 대협의 제자이신 방일화 여협이 맡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변동이 없습니까?”
“방일화 말이오?”
천산객이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물었다.
분위기가 좋지 못하자 백자안 또한 의아한 표정이었다.
“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녀는 지금 금마옥에 갇혀 있소.”
“죄목이 무엇입니까?”
“반역죄요. 그녀는 백 대협이 안 계시는 동안 지존맹 부맹주로 맹주 대행 임무를 수행했소. 하지만 권력에 취했다고나 할까. 백 대협이 복귀하신 후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자, 그만 백 대협을 시해하려 했던 것이오. 백 대협을 죽인 후 주화입마로 위장하려 했던 것인데, 사전에 이를 알아차린 백 대협께서 그녀를 제압하셨소.”
“아! 어찌 그런 일이······.”
“그녀 또한 많은 무림인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에 실로 충격적이었소. 하지만 백 대협께서 어찌 거짓말을 하시겠소?”
“그래도 제자라서 목숨을 살려준 겁니까?”
“그렇소. 백 대협께서 자신이 제자를 잘못 가르친 책임이라 자책하며 그녀를 금마옥에 영구히 가두었소.”
“무림맹 지하에 있는 금마옥 말입니까? 그곳은 일전에 파괴되지 않았습니까?”
“얼마 전에 새롭게 보수를 해서 이전보다 더 견고해졌다고 하오.”
“그렇군요. 절대황녀의 황제 등극 못지않게 충격적인 소식이군요. 권력을 위해 사부를 시해할 그런 성격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하하. 어찌 사람 마음을 알 수 있겠소? 다만 항간에는 맹주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질투심 때문에 그랬다고도 전해지오.”
“질투라면 혹시 백 대협과 절대황녀의 혼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방일화가 사부인 백 대협을 사모했는데, 공주와 혼인한다고 하니 질투심에 사로잡혀 시해하려 했다는 이야기요. 그녀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맹주 자리에 대한 권력 욕심보다는 설득력이 강하긴 하오. 하지만 아무 근거가 없는 풍문인 것 또한 사실이오.”
천산객의 말에 백자안이 다시금 안색을 굳혔다.
‘질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보나 마나 반야마신 그자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워 일화를 모함한 것이 틀림없다. 낙양에 도착하면 일화부터 구출해야겠구나.’
백자안이 마음을 다스린 후 말했다.
“방일화 여협에 대해서는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혹시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은 없습니까?”
“왜 없겠소? 지금도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존맹 내부에도 상당히 있다고 하오. 뭔가 오해가 있었다면서 말이오.”
“그래서요? 공정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까?”
“백 대협의 명으로 금마옥에 갇혔으니 감히 누가 이의를 달겠소? 하지만 잡음이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백 대협이 이전처럼 또 가짜라는 악의적인 주장도 펼친다고 하오. 그래서 이번 영웅대회 때 방일화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오. 원래 반역죄는 공개처형이 원칙이니 실제 감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오.”
“그건 너무 나간 주장 같군요. 그나저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 역시 낙양으로 가고 싶군요. 특히 비무대회 소식에 관심이 갑니다.”
“아! 그렇소? 그럼 혹시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소? 비싼 돈을 주고 마차 한 대를 빌려놨는데 한 사람이라도 더 타면 부담이 덜 되지 않겠소?”
“으음,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공을 펼쳐 가는 것이 더 빠르겠지만 그만큼 공력 소모가 큰 것 또한 사실이었다.
혼례식 또한 열흘이나 남아 있다고 하니 그렇게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장초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비무대회 예선전 때문에 제가 마차를 빌리자고 했습니다. 가장 빠른 마차라고 하니 속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네.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지요.”
백자안이 말을 한 후 자신이 부담해야 할 몫의 은자를 주었다.
“하하하. 이거 원래는 그냥 태워드려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우리 낭인무사들 주머니 사정이야 뻔하지 않겠소? 강호 소식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시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알려드릴 테니까.”
천산객이 웃으며 말했다.
백자안이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
“혹시 마교나 동방무맹 소식에 관해서 알고 있습니까?”
“아쉽게도 그 부분은 백 대협께서도 잘 모르고 계신다고 하오. 일단 다들 알다시피 마교와 동방무맹 무사들은 삼의맹 소속으로 사천성에 지원을 갔다가 도중에 천축무맹의 공격을 받아 전멸을 당했소. 이후의 소식은 끊긴 상태요. 다만 동방무맹은 기존에 동방에 남아 있던 무림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금씩 그 세력을 회복하고 있다고 알고 있소.”
“그럼 불패마왕 소식은 전혀 모르겠군요.”
“그렇소. 하지만 항간에는 삼의맹 무사들 상당수가 실종되었고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긴 하오. 그들이 있는 곳이 중간지대라는 말도 있소.”
“중간지대란 곳이 신선계와 가까운 곳입니까?”
“백 대협 말씀으로는 신선계 외곽지대에 일종의 금지로 중간지대란 곳이 있다고 하오. 백 대협께서 중간지대에 가셨을 때 실종된 무인들이 있는지 조사해봤으나 워낙 광대한 지역이라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오. 그래서 지금은 아직 소식이 없는 사람은 십중팔구 사망한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요.”
“으음, 그랬군요.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이번에 백 대협과 여황제께서 혼인하시면 무림과 황궁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그 점에 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이번 혼례로 인해 두 분의 지위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하니까. 다만 무림과 황궁이 이번 혼례를 통해 일치단결하여 새로운 이상향을 건설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있소. 자세한 것은 대회장에 가봐야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렇군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옆방에 가서 조금 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합시다. 마부 한 명을 구해놓긴 했지만, 일단 마차에 타면 마음대로 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푹 자두도록 하시오.”
“네. 그럼.”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촌장이 특별히 그에게 배정해준 방이었다.
촌장과는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백자안은 이전에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고 하며 마을 이야기를 꺼내 그의 환심을 샀던 것이 주효했다.
방에 들어온 백자안은 가부좌를 하고 회복운공에 들어갔다.
죽음 직전에 되살아난 격이기에 후유증이 뒤늦게라도 나타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은 거의 회복되어 있었다. 지금 걱정이 되는 것은 바로 방일화의 안위였다.
전전대 황제가 결국 황궁에 유폐된 후 죽음을 맞이한 것과 같이 방일화의 목숨 또한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신세였다.
‘일화의 관상은 절대 요절할 상이 아니었다. 대회 시작 전에 처형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