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장] 서약의 돌 2
서약봉.
신비한 안개가 늘 끼어 있는 이곳에 일만여 정심회 반선과 마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정심봉에서 단체로 이동해온 그들이었다.
그중에는 백자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선들과 마신들의 포위 아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을 따라왔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적으로 오려 했다면 무수히 많은 진법과 결계를 돌파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쉽게 이곳에 왔구나. 그만큼 위험부담도 있었지만 헛되게 힘을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
백자안이 서약봉 정 중앙에 우뚝 솟아나 있는 바위 하나를 봤다.
마치 비무대처럼 윗부분이 평평한 바위였다.
그 면적 또한 매우 넓어 한 번에 백 명 이상도 올라갈 수 있었다.
백자안과 천마신 두 사람이 대결을 벌이게 충분했다.
백자안이 유심히 본 것은 서약의 돌의 기운이었다.
서약의 돌은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백자안은 곧바로 몸속에 있던 천력이 그 기운에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존검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했다.
천마신이 말했다.
“백자안! 여기까지 왔으니 곧바로 대결했으면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혹시 지금이라도 투항할 생각이 있느냐?”
“어차피 나를 죽일 생각이 아니오? 투항하든 안 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그건 아니다. 네가 투항하면 나는 너의 무공을 폐한 후 그 피만 빼낼 수 있다. 무림인에게 무공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니, 지존검 역시 너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 새 주인을 섬길 것이다.”
“거절하겠소. 자신이 있다면 꼼수를 부리려 하지 말고 정정당당히 겨룹시다.”
백자안이 신형을 날려 서약의 돌 위로 올라갔다.
천마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막상 백자안과 대결을 하려니 뭔가 찜찜한 기분을 느낀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마신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총회주님.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총회주님의 목숨은 우리 백대마신의 목숨과도 같습니다. 놈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필시 어떤 사술을 쓸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약속에 굳이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검마신(劍魔神) 그대였구려.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놈이 투항을 거부했으니 우리 중 아무나 나가서 죽이면 그만입니다. 총회주님이 직접 나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제가 먼저 놈을 상대하겠습니다.”
“으음, 알겠소. 놈이 사술을 쓰는지 한번 시험해보시오. 누구라도 백자안 저놈을 죽이는 마신에게는 백마회 부회주 자리를 주겠소.”
“감사합니다.”
검마신이 매우 기뻐하며 서약의 돌 위로 올라갔다.
백대마신 중 천마신을 제외하고 가장 무공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였다.
물론 백대마신 중에는 일부러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마신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검마신이 그러했다.
백마회 부회주 자리를 줄곧 노리고 있던 그에게 이번 대결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백자안 저놈을 죽여 부회주가 된 후 기회를 노려 총회주 자리까지 노린다.’
검마신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스르릉.
붉은 검기를 뿜어내고 있는 검은 다른 검보다 두 배나 더 컸다.
하지만 그 예기는 그 어떤 검보다 날카로웠다.
‘쉽지 않겠구나. 보통 실력이 아니다.’
백자안이 흠칫했다.
그가 상황보검을 몸속에서 꺼낸 것은 그 직후였다.
검술 대결에 있어 두 사람의 실력이 비슷하다면 병장기를 지닌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마련이었다.
백자안은 이번에도 절대검강을 날릴 생각이었다.
상대는 단 한 명이었지만 검마신의 무공이 엄청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검마신마저도 이긴다면 그 실력이 확실히 검증되는 셈이었다.
“백자안! 죽이기 전에 네놈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 언제까지 역용할 셈이냐?”
“소원이라면 보여주겠소.”
백자안이 역용을 풀고 본모습을 드러냈다.
반선과 마신들이 웅성거렸다.
백자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의 얼굴을 처음 본 사람이 대다수였다.
“역시 새파랗게 젊은 놈이었구나.”
“그건 아니오. 나 역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소.”
백자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반로환동한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칫 실수하면 목숨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검마신이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이제 정말 출수를 하겠다. 일초가 만초고 만초가 일초라 할 수 있으니, 일검에 승부를 보겠다.”
“일검승부는 나 또한 찬성이오.”
백자안이 상황보검을 수평으로 들어 검마신을 겨누었다.
그대로 앞으로 찔러나가면 검마신의 가슴을 찌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검마신의 검이 자신의 정수리를 둘로 쪼갤 것이었다.
백자안은 검마신의 검로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문제는 속도였다.
누구든 속도가 빠른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컸다.
다만 백자안은 절대검강을 펼침과 동시에 검을 찔러 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검강만으로 승부가 날 가능성도 있었다.
백자안은 신중했다.
‘절대검강으로 저자를 죽이기는 힘들다. 일단 호신강기를 깨트린 후 쾌검으로 심장을 노린다.’
한편 검마신은 여전히 검을 수직으로 세운 채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래도 백자안이 먼저 공격해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뭐 하느냐? 어서 공격해라.”
검마신이 공격을 재촉했다.
백자안이 절대검강을 날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쏴아아.
검마신이 검을 앞으로 내리쳐 검강을 막았다.
꽈아앙.
검마신의 검에서 뿌려진 검강이 백자안이 날린 절대검강과 부딪히며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으윽!”
거대한 먼지구름과 비명.
폭발로 인한 먼지구름 때문에 잠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드러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백자안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정수리 쪽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으로 봐서 검마신의 검에 호신강기가 뚫린 것 같았다.
검마신은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다만 검을 허리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후후후! 네놈 작전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네놈이 쾌검식으로 심장을 노렸지만, 내 몸에는 검기막으로 이루어진 반탄강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이제 완전히 목을 베어주마.”
검마신이 득의한 표정으로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하지만 첫발을 떼는 순간에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으윽!”
반선과 마신들이 놀라서 볼 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검마신의 심장이 그대로 터져버렸다.
“켁!”
검마신이 그대로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무리 마신이라지만 심장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같았다.
백자안이 비틀거리며 일어난 것은 그 직후였다.
머리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치명상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마신 한 명을 상대하는데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으로 보여 상황이 더욱더 악화한 것은 사실이었다.
천마신이 말했다.
“역시 천족의 후예답군. 하지만 내상을 입었으니 더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천마신이 눈짓하자, 이번에는 마신 다섯 명이 나섰다.
백마회의 오대장로가 바로 그들이었다.
백자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검마신까지는 죽일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이 매우 컸다.
그런 와중에 백마회 오대장로의 합공은 큰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차라리 남아 있는 힘으로 지금 바로 천마신 저자를 죽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놈이 내 가족의 목숨과 연동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나, 사실로 확정되지 않았으니 모험을 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순간의 망설임 때문이었을까.
백자안이 천마신을 공격하기 전에 이미 백마회 오대장로가 서약의 돌 위로 올라왔다.
‘할 수 없군. 이놈들까지만 죽이자.’
백자안이 상황보검을 다시 들었다.
백마회 오대장로는 품자 형으로 서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단순히 장풍으로 공격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뿜어낼 장풍은 절대 단순한 게 아니었다.
합공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장풍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사실 오대장로 개개인의 장풍은 수백 자루 병장기보다 견고하고 위력이 컸다.
한 명의 장풍만으로 작은 야산 하나를 날려 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위기다! 과연 내가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번에는 다른 마신들과 반선들이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진퇴양난이구나.’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도 잠시 곧바로 백마회 장로 다섯 명의 합공이 가해졌다.
쏴아아.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경력이 다가오자, 백자안 역시 상황보검으로 절대검강을 일으켰다.
꽈아앙.
거대한 폭음이 일며 백마회 장로 다섯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들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예상과 달리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백자안은 여전히 그대로 서 있었다.
한데 그의 배에 못 보던 비수 하나가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피가 흐르지 않아 처음에는 사람들이 잘 몰랐다.
하지만 자루까지 배에 박혀 있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으으······.”
백자안이 비틀거리며 천마신을 쳐다봤다.
다들 보지 못했지만 백자안은 볼 수 있었다.
자신과 백마회 장로들과의 격돌이 있을 때 천마신의 소매 안에서 비수 한 자루가 날아왔다는 것을.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 백자안 역시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백마회 장로들의 장풍을 절대검강으로 막아내느라 호신강기가 가장 약해져 있을 때였다.
비수를 막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호신강기로 비수를 퉁겨내려 했는데 예상과 달리 배에 박혀 버린 것이었다.
천마신이 말했다.
“백자안 너의 단전은 이미 파괴됐다. 혈도 역시 모두 막혀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말이 틀렸느냐?”
“으으······.”
백자안이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천마신을 봤다.
천마신은 여전히 황금빛 가면을 쓰고 있었다.
“비겁한······.”
백자안이 천마신을 노려봤다.
아직 피가 흐르지 않고 있었으나 천마신 말대로 단전이 파괴되었는지 내공이 모이지 않았다.
백자안이 급히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 결과 단전이 아직 파괴된 것은 아니었으나, 큰 충격으로 그 기능이 정지되어 있었다.
경직되어 그 입구가 막혔다고나 할까.
단전 부위 기해혈 전체가 막혀 있었다.
막힌 것이 뚫리지 않는다면 단전의 기능은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파괴된 것과 큰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백자안이 급히 무명폭잠공을 일으켰다.
무명폭잠공은 위기 때마다 그를 구해주었던 비술이었다.
하지만 배에 박힌 비수는 그것 또한 용인하지 않았다.
마치 천잠사에 의해 온몸이 결박당한 듯 옴짝달싹 못 했다.
“후후후! 백자안! 헛수고하지 마라. 네놈은 이제 끝장났다. 다만 죽기 전에 네가 할 일이 있다.”
천마신이 우수를 흔들자 백자안의 배에 박힌 비수가 꿈틀거렸다.
순간, 비수를 타고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바로 백자안의 피였다.
그 피는 곧바로 서약의 돌에 떨어지며 스며들었다.
천마신이 은잠술로 숨겨두었던 지존검과 천마검을 꺼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후후후! 백자안 네놈은 여기서 몸속에 있는 피를 모두 흘린 뒤 죽게 될 것이다. 정심반선! 지금 바로 서약의 돌을 파괴할 것이니 서약봉 주위를 반선들로 하여금 지키게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보호진법을 발동하겠습니다.”
정심반선이 정심회 반선들에게 명을 내리자, 일만여 반선들이 정심봉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모두 신선운을 타고 있었다. 동심원 모양으로 봉우리를 감싸자 원형 고리 같은 것이 생겨났다.
천마신이 말했다.
“고맙소. 서약의 돌은 오랜 세월 반선들을 구속했고, 우리 마신들이 봉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도 했소. 하지만 그 구속력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약해졌소.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했고, 오늘 비로소 봉인을 풀게 될 것 같소.”
천마신이 지존검과 천마검 모두 백자안을 향해 겨누었다.
순간, 바닥에 고여 있는 백자안의 피가 두 갈래로 날아와 지존검과 천마검의 검신에 흡수되었다.
이제 백자안이 죽게 되면 그 피는 죽은 피가 되어 두 보검 역시 새 주인을 찾게 될 것이었다.
새 주인은 물론 천마신이었다.
이미 절대마력으로 구할 이상 지존검과 천마검의 검혼을 눌러놓은 상태였다.
이제 백자안만 피를 모두 흘려 죽게 되면 두 보검의 진정한 주인이 될 사람이 바로 천마신이었다.
정심반선을 비롯한 정심회 반선들은 호법을 서면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정심반선이 안색을 굳혔다.
‘저대로 가면 천마신의 힘이 너무 강해진다. 우리 정심회가 마신들에게 끌려가서는 안 되는데······.’
정심반선이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다.
백자안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자안은 곧 몸속의 피를 모두 쏟아내고 죽을 운명이었다.
정심반선의 관심은 이제 서약의 돌에 쏠렸다.
백자안의 피가 스며들자 서약의 돌 또한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황금빛 서약의 돌이 서서히 선홍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백자안은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으면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피가 빠져나가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져 온몸의 힘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구중천심공을 대성하지 못하고 중간지대에서 나온 것이 패착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백자안이 허물어지려는 몸을 억지로 버티며 의지를 굳세게 했다.
품속에 갈무리해두었던 또 하나의 천상여의주가 금빛을 발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