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장] 서약의 돌 1
[제65장] 서약의 돌
휘우웅.
한차례 바람이 정심봉 위로 불었다.
일만여 정심회 반선들과 마신들이 모두 백자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마신의 지목을 받고 겁도 없이 그에게 다가간 백자안은 비교적 태연했다.
천상선녀가 나타났을 때 그는 잠깐 우군이 생겼음을 느끼고 기뻐했었다.
여전히 자신이 천족의 후예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었지만, 천계의 사자라는 존재의 등장에 든든함을 느낀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천상선녀는 훌쩍 떠나가 버렸다.
몇 가지 경고를 남기긴 했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다시 백자안은 혼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마신의 지목을 받게 되었으니,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천마신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천마신만 죽이면 나머지 백대마신은 자동으로 죽게 된다. 이후 정심반선마저 죽게 되면 정심회 반선들 역시 매우 동요할 것이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
백자안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만 한 가지 불안요소는 구중천심공을 아직 대성하지 못한 점이었다.
총 구 단계인 구중천심공을 팔 단계인 팔성까지 터득했지만, 마지막 한 단계가 부족했다.
하지만 천마신 역시 아직 완전한 봉인해제를 이루지 못한 상황.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충분히 모험을 걸어볼 수 있었다.
백자안이 천마신과 삼장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천마신이 무심히 물었다.
“그대가 백자안인가?”
“고독반선이라 합니다.”
백자안이 일단 부인을 했다.
순간적이지만 천마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불리한 상황에서 스스로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고독반선이라. 정심반선. 이자의 말이 맞소?”
“그렇습니다. 다만 신원이 불확실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경고의 의미로 같이 있던 와룡반선이란 자를 어젯밤 처단했지요.”“처단하려면 이자를 해야지 왜 주변인을 한 것이오?”
“혹시 공범이 있을까 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심단을 복용했으니 배신하는 즉시 죽게 될 겁니다.”
“그게 사실이오? 진짜 백자안이라면 절대 정심단을 복용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너무 과민했던 것인가.”
천마신이 다시 한번 백자안을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대가 백자안인가?”
“아닙니다. 저는 고독반선입니다. 백자안이란 자는 지금 중간지대에 있는데 어찌 이곳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검명이 동시에 그대를 향했다. 그것은 그대가 지존검과 천마검의 현 주인이라는 말이지.”
“억울합니다. 저는 백자안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백자안이 진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마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지존검과 천마검의 검명이 그렇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 작은 소리였고 오직 천마신 자신만이 손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검명이 백자안을 향했다는 것 역시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음파의 파동 방향과 거리를 생각했을 때 백자안이 틀림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백자안이든 아니든 죽어야 한다. 내게 의심을 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정심반선도 동의하시오?”
“물론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아무 지위도 없는 일개 반선 주제에 감히 제 자리를 탐하더군요. 백자안이 아니라면 아마도 은둔회 간자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허락하신다면 저희가 처단하겠습니다.”
“정심반선 그대가 직접 죽이려는 것이오? 하기야 정심단을 복용했다고 하니 고독을 발동시켜 쉽게 죽일 수 있겠군.”
“아직 내상이 회복되지 않아 먼저 고독을 발동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게다가 훈련을 잘 받아서인지 아직 배신할 마음을 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죽을 위험에 처해야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정심반선이 백자안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자신은 천마신에게 패했지만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신선신공 완성으로 승산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많았었다.
‘고독반선 저자를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화근이 될 것이다. 감히 내 자리를 넘보다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정심반선이 옆에 있는 집법반선에게 눈짓을 했다.
집법반선이 고개를 끄덕인 후 백자안에게 다가갔다.
“너는 내가 직접 처형하겠다.”
“죄목이 무엇이오?”
“반역죄다. 너는 사사로이 정심회주 자리를 탐냈고 무엇보다 수상한 점이 너무 많다. 총회주께서도 너를 백자안으로 지목하셨으니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죽어야 한다.”
“그것이 정심회의 율법이오?”
“그렇다.”
“좋소. 하지만 내가 만일 정심반선 저자를 죽이면 어떻게 되오? 내가 아는 정심회의 율법은 회주를 죽인 자가 신임 회주가 된다는 것인데, 내 말이 틀렸소?”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회주님을 죽일 수 없다.”
“정심단을 복용했기 때문이오?”
“그렇다. 이제 더 할 말이 없느냐?”
집법반선이 소매 속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영롱한 초록빛을 띠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법보인 것 같았다.
상대가 진짜 백자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자신의 최고 절기를 펼치려는 것 같았다.
백자안은 양손을 수평으로 들어 공격에 대비했다.
그때였다.
정심반선이 말했다.
“내 비록 내상을 입어 고독반선 너를 의념으로 죽일 수는 없으나, 네가 집법반선을 공격하면 곧바로 본회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어 소멸하고 말 것이다. 이래도 정체를 밝히지 않을 것이냐?”
“내가 백자안이라고 시인하라는 것이오?”
“그렇다. 그러면 잠시 목숨을 연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심반선이 말을 한 후 옆에 있는 천마신을 쳐다봤다.
천마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심반선 그대는 역시 대단하오. 정심회를 계속 이끌어가기에 충분하오. 저놈이 백자안이라면 생포를 해서 서약봉으로 데려가라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서약봉에는 오래전부터 우리 정심회 반선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결계도 여러 개 걸려있고, 진법도 많이 있지요. 총회주께서 우리 정심회와 동맹을 맺은 것도 서약봉까지 무사히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인정하오. 다만 그까짓 결계와 진법이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봉인해제가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주변이 안정된 것이 좋지요.”
“그 점 역시 인정하오. 한데 저자가 백자안이라면 굳이 서약봉까지 데려가서 죽일 필요가 있겠소?”
“신선한 피일수록 그 효과가 뛰어납니다. 서약의 돌은 지존검을 각성시킬 무한한 힘이 있습니다. 백자안 그놈을 서약봉 앞에서 죽여 그 신선한 피를 뿌린다면, 지존검이 총회주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섬길 겁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절대마력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했소. 사실 나는 고독반선이라 자칭하는 저자가 백자안이든 아니든 큰 상관이 없소. 다만 왜 지존검과 천마검이 저자를 보고 검명을 터뜨렸느냐는 것이오.”
“너무 자신 있어 하시는군요. 아까 여기에 온 천상선녀를 잊으셨습니까? 천계에서 반드시 노림수가 있을 겁니다.”
“노림수라면 설마 서약의 돌을 이용해 나를 소멸시키려는 것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다만 가끔 나타나는 신선경의 계시를 참조했다는 것만 알려드립니다.”
“신선경의 계시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겠군. 좋소.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저자를 생포하십시오. 지금 보니 저자는 절대 자신의 정체를 순순히 밝히려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저도 그냥 죽이면 될 것 같았습니다. 한데 지금 사전 기세 대결을 보니 집법반선의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잘 보았군. 보통 도력을 가진 자가 아니오. 여기서 혼자서 저자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오. 집법반선은 물러나시오.”
“네. 총회주님.”
집법반선이 급히 비무대 옆으로 물러났다.
사실 그 역시 조금 전 백자안과의 짧은 기세 대결에서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일방적으로 밀리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백자안은 무심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지금 그는 혼자였다.
천마신이 물었다.
“진짜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가 백자안이냐?”
“대답을 정말 듣고 싶소?”
“그렇다. 확실한 대답을 해준다고 하면 너의 질문에 대해 나 역시 솔직히 대답해주겠다.”
“으음······.”
백자안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더 이상 정체를 숨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한 가지 묻겠소. 지난날 삼의맹 무사들과 영웅맹 무사들이 대거 시신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들이 지금 중간지대에 석상으로 변해 있는 것이오?”
“하하하! 그 사실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정말 네가 백자안이구나. 중간지대에서 빠져나오다니 대단하군.”
“나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석상으로 변해 있는 사람들을 살릴 수가 있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지성자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사실 그들을 중간지대로 보낸 것은 내가 한 일이다. 당시 아직 봉인이 덜 풀렸지만 내게는 중간지대로 무림인들을 날려 보낼 수 있는 마력이 있었지.”
“왜 그런 짓을 한 것이오? 그러한 짓이 그대가 봉인을 푸는 데 도움이 된 것이오?”
“그렇다. 역시 총명하구나. 천족의 후예답다. 나는 봉인을 풀기 위해 선천진기가 필요했고, 특수 이동대법을 의념으로 펼쳐 그들을 모두 중간지대로 날려 보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의 특수 이동대법은 다른 이동대법과는 매우 다르지. 일종의 흡수대법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아 나 스스로 지존검의 주인이 되려는 것이다. 이제 설명이 되었느냐? 네가 백자안이냐?”
천마신이 그래도 의심스러운지 백자안 스스로 본인임을 밝히기를 요구했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백자안이오.”
“하하하! 이제야 실토했군. 네가 지금 어떤 실수를 했는지 아느냐?”
“모르오. 다만 한 가지 더 물어보겠소. 내 가족은 어디에 있소?”“그것은 알려줄 수 없다. 돌로 변해 중간지대에 있을 수도 있고 내가 모처에 숨겨두었을 수도 있지. 아니면 이미 모두 죽여 버렸을 수도 있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만약 내가 죽게 되면 영원히 그들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그들의 목숨과 내 목숨을 연동시켜두었기 때문이지. 그러니 알아서 해라. 네놈이 비록 천계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 부분만큼은 천계 역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다만 한 가지 제의를 하고자 하오.”
“무엇이냐?”
“우리 두 사람의 대결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소. 하지만 장소를 옮겼으면 하오. 그대에게 유리할 수도 있으니 굳이 반대는 하지 않으리라 믿소.”
“혹시 서약봉에서 대결을 하자는 것이냐?”
“그렇소. 그대가 나를 죽이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나 역시 어차피 그곳에 가봐야 하기 때문이오.”
“후후후! 약삭빠른 놈! 네놈이 그곳에서 지존검의 각성을 이루려는 것 같구나. 네놈 뜻대로 순순히 따라줄 것 같으냐?”
“마음대로 하시오. 아시다시피 나는 이미 정심단을 복용했소. 그 때문에 누구와 싸우든 곧바로 고독이 발동되어 죽을 가능성이 크오. 그러면 신선한 피를 서약봉까지 가져가기 힘들 것이오.”
“특수 이동대법으로 가면 간단하지. 하지만 너의 제의를 수락하겠다. 서약의 돌 앞에서 너를 죽이면 그 효과는 극대화될 테니까. 무엇보다 너는 나보다 약하다. 그 어떤 변수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네놈 가족 걱정 때문에 나를 죽일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야. 아니지. 정심단 때문에 아예 공격도 제대로 못 하겠군.”
“그대는 쓸데없는 말이 많군. 어서 서약봉으로 갑시다.”
“좋다. 정심반선 그대도 정심회 반선들을 데리고 따라오시오. 이미 그곳을 지키고 있던 반선들에게는 이야기를 해두었소?”
“네. 사실 이미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두었습니다. 가기만 하면 됩니다.”
“고맙소. 서약봉에 도착하면 일만 반선들로 하여금 보호 진법을 펼치게 해주시오. 혹시라도 천계의 방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보답은 반드시 하겠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년서약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숙원이기도 합니다. 어서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