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장] 우화등선 4
‘역시 소문대로구나. 백마회의 수장답다.’
정심반선이 흠칫했다.
천마신과의 사전 기세 대결에서 밀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신선경을 이용한 신공을 펼치지 않으면 이기기 힘들 것 같다.’
정심반선이 오른 소매를 한번 흔들자, 거울 하나가 그의 손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신선경이었다.
원하는 어떤 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는 기이한 법보였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었다.
신선경은 원래 병장기로 만들어졌으며, 그 비밀을 알게 되는 자는 천하무적이라고.
정심반선이 그동안 연마한 신공이 바로 이 신선경의 비밀과 연관이 있었다.
천마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신선신공(神仙神功)을 연마한 것이오?”
“그렇소. 신선신공은 오직 신선경을 통해서만 펼칠 수 있는 것으로 어떤 상대도 제압할 수 있소. 한번 펼치면 십중팔구 상대의 목숨을 거두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패배를 받아들이면 출수는 하지 않겠소.”
“거절하겠소. 신선신공이 비록 대단하긴 하나 이미 본인은 절대경지에 달했소. 이는 정마를 초월한 경지로 굳이 무공에 이름을 붙인다면 극마신공(極魔神功)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천마신이 말을 한 후 두 손으로 합장을 했다.
여전히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정심반선이 신선신공을 펼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천마신이 자만심 때문에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을 때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실 정심반선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혹여 천마신이 지존검이나 천마검을 사용하지 않을까였다.
한데 적수공권으로 자신을 상대한다고 하니 분노와 함께 자신감이 치솟았다.
‘이놈이 신선경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구나. 잘되었다.’
쏴아아.
신선경에서 붉은 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마치 빠르게 퍼져나가는 연기처럼 붉은 기류는 거침없이 천마신을 감쌌다.
천마신이 합장한 손을 펼치며 일장을 날린 것은 그 직후였다.
꽈아앙.
장력와 붉은 기류가 충돌하며 엄청난 폭음이 일었다.
“으윽!”
정심반선이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으으······.”
비무대 끝에서 연신 비틀거리는 그는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반선들과 마신들이 놀라서 보니 그의 손에 들려있던 신선경이 어느새 둘로 쪼개져 있었다.
누가 봐도 그의 패배였다.
“으으······ 역시 대단하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소.”
정심반선이 둘로 쪼개진 신선경을 다시 붙였다.
순간, 신선경 안에서 붉은 수실을 단 화살 한 대가 발사되었다.
휙.
누구도 생각 못 한 공격이었다.
게다가 그 빠르기가 마치 빛의 속도와도 같았다.
“신선시(神仙矢)로군!”
천마신이 흠칫하며 우수를 흔들자, 날아오던 신선시가 한 차례 부르르 떨리며 그대로 돌아갔다.
푹.
어깨에 신선시가 박힌 정심반선이 다시 비틀거렸다.
천마신이 빠르게 다가와 그의 가슴을 우수로 내리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심반선이 비무대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땅바닥에 착지하기 전 다시 한번 반전이 일어났다.
정심반선이 신선경을 원반처럼 앞으로 던진 후 몸을 솟구쳐 그 위에 몸을 실은 것이었다.
시합 규칙상 비무대를 떠나더라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한 아직 패배가 아니었다.
천마신이 흠칫하며 정심반선을 쳐다봤다.
정심반선을 태운 신선경은 어느새 열 배 이상 커져 있었다.
정심반선이 소리쳤다.
“신선신공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오!”
휙휙휙.
신선경에서 빛의 줄기 같은 것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바로 신선강기였다.
이는 신선경 내에 숨겨둔 비장의 무기로, 일반 강기보다 수십 배는 강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천마신으로서는 뜻밖의 반격이 아닐 수 없었다.
꽈앙.
천마신의 호신강기에 부딪힌 신선강기 다발이 요란한 폭음을 냈다.
천마신이 은잠술로 숨겨둔 천마검을 꺼낸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파파파파.
천마검이 신선강기를 쳐내자 콩 볶는 소리가 나며 불꽃이 튀었다.
천마신의 왼손에 지존검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쉬이익.
이기어검술로 날아간 지존검이 호선을 그리며 정심반선의 허리를 베어갔다.
푸화확!
피가 솟구치며 정심반선의 허리가 갈라졌다.
“으윽!”
정심반선이 비명과 함께 마침내 비무대 밑으로 추락했다.
그의 허리는 반쯤 갈라져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심총관이 급히 달려가 금창약을 뿌리자 금세 지혈이 되었다.
워낙 내공이 심후해서인지 외상에 비해 내상은 그렇게 깊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정심반선이 품속에서 단약 세 알을 꺼내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전신에서 일어나며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허리 상처는 물론이고 신선시에 당한 어깨 부위도 아물기 시작했다.
무서운 회복력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들 그가 이전에 대왕정심단을 복용했기 때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시합 결과는 그의 패배였다.
다시 비무대 위로 오른 정심반선이 포권을 했다.
“내가 졌소. 이제 천마신 그대가 총회주요. 다만 약속대로 우리 정심회의 자치권을 인정해주시오.”
“알겠소. 약속은 지키겠소.”
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신들은 물론이고 반선들 역시 결과에 승복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정심반선은 신선경을 다시 원래 크기로 줄여 갈무리했다.
천마신 또한 지존검을 회수해 천마검과 함께 다시 원래대로 숨겨두었다.
그가 검을 숨기는 방법은 백자안과 유사했다.
소매 속으로 검들이 들어가는 것 같더니 어느새 사라졌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천마신 저자의 무공이 실로 대단하구나. 봉인이 완전히 풀린다면 내게 기회가 없을 듯하다. 일단 지존검과 천마검을 저자가 갖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기회를 노려 회수해야겠군.’
백자안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천마신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회수할 방법이 없었다.
천마신이 말했다.
“본인이 총회주가 되어 기쁘게 생각하오. 하지만 본인의 무공은 마계에 계시는 진성마신(眞性魔神)님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오. 진성마신님들의 목표는 바로 천계 정복이오. 하지만 그 전에 본인은 중원무림을 정복해 반선들과 마신들의 무공을 더욱더 높여놓을 것이오. 그 과정이 우화등선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소. 나는 여러 반선이 우화등선을 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고 도울 것이오. 다만 그때까지는 모두 본인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오. 다들 아시겠소?”
와아아.
짝짝짝.
반선들과 마신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중에는 백자안의 것도 있었다.
‘천마신보다 훨씬 무공이 뛰어난 진성마신들이 마계에 있다니. 만약 그들이 마음대로 활동을 한다면 그야말로 대책이 없겠구나. 내 능력이 이렇게 보잘것없게 느껴지다니······.’
백자안이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점점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당장 천마신에게 지존검과 천마검이 있는 것을 보고서도 자꾸 행동을 미루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약봉이 있는 곳으로 가면 이미 늦을 수도 있다. 그 전에 내가 지존검이라도 확보해야 서약의 돌을 파괴하지 않고 각성 수준에서 활용할 수 있다.’
백자안이 서약의 돌에 대해 생각했다.
지존검으로 서약의 돌을 내리치면 지존검의 각성으로 은둔반선들을 소환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파괴하면 만년서약이 무효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봉인 해제의 경우는 어떨까.
지금까지의 정보로는 서약의 돌이 파괴되면 천마신의 봉인해제가 완성될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천마신 저자가 지존검과 천마검을 사용할 때 뭔가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비록 자신의 마력으로 두 검을 통제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죽지 않는 한 여전히 두 검의 주인인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약의 돌이 파괴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봉인 해제가 완성된 천마신이 절대마력으로 두 검의 완전한 주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원래는 죽은 나의 피를 이용해 두 검에서 나의 흔적을 지워야 하지만, 절대마력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이곳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나을 듯하구나. 정심반선은 내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천마신의 경우 싸우는 도중 지존검이라도 진정한 주인인 나를 알아보고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결단을 내리고 단상 위로 올라가려던 찰나.
허공 한가운데서 구름 하나가 날아왔다.
구름 주위에 금빛 광채가 대단했다.
누군가 그 구름을 보고 소리쳤다.
“천계운(天界雲)이다!”
“천계운이라면 천계에서 떠다니는 구름이 아닌가!”
“천계사자가 왔다!”
반선들이 떠들어대는 와중에 구름은 정심봉에 내려섰다.
그제야 구름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한데 예상과 달리 선녀같이 아름다운 백의소녀가 서 있지 않은가.
“천상선녀(天上仙女)!”
회복운공을 하던 정심반선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반선들과 마신들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상선녀는 천계의 인물이었다.
천상선녀가 유명한 것은 그녀가 천계와 신선계의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정심반선은 신선경을 통해 천상선녀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천상선녀라고 해요. 천계의 수장이신 천제(天帝)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어요.”
“흥!”
천마신이 불쾌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다른 백대마신 역시 냉랭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심회 반선들을 다들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선계에서 수도하고 있는 반선들은 원래 천계의 비호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그런 관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독립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모임이 바로 정심회였다.
정심회 반선들은 보란 듯이 천계의 영향에서 벗어나 마신들과 교류를 시도했다.
그 결과 백마회와 동맹까지 맺게 된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역시 우화등선과 관련한 갈등이 있었다.
반선들은 우화등선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천계의 도움이 거의 없고 성공하는 반선들도 거의 없었다. 그러자 천계에 대한 반발심이 커진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천계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정심회 반선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안색이 어느 정도 회복된 정심반선이 말했다.
“천제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이오?”
“천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백마회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정심회를 해체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만약 마신들을 도와 서약의 돌을 파괴하게 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천신들을 직접 보내겠다는 뜻이오?”
“그렇지는 않아요. 천계는 신선계 내부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지킬 겁니다. 다만 천제님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대리자를 내세워 징벌을 가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대리자라 함은 혹시 천족의 후예라는 백자안 그자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제가 전하는 말씀은 이것이 끝이에요. 그리고 천마신께 전할 말씀도 있어요.”
“무엇이오?”
천마신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천상선녀가 담담히 말했다.
“정심회 반선들과 달리 그대를 비롯한 백마회 마신들은 천계에서 직접 단죄가 가능하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어요. 만약 서약의 돌을 파괴하면 대리자뿐만 아니라 천신들이 직접 그대들을 단죄할 거예요.”
“하하하! 지금 우리 마신들을 겁박하는 것이오? 천계가 직접 우리를 공격하면 마계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천계와 마계의 전쟁이 벌어지는 꼴을 보려면 마음대로 하시오. 다만 천계의 대리자와는 기꺼이 대결에 응하겠소. 내가 보기에 천계의 대리자라면 백자안 그자일 것 같은데, 그자는 천족의 후예로 오래전부터 오늘과 같은 일을 대비해 천계에서 안배해둔 것으로 알고 있소. 요컨대 백자안 그놈만 제거하면 아무리 천계라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오. 물론 마계 역시 천계가 나서지 않는 한 직접 개입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니 천계의 이름을 빌려 우리를 협박하는 것은 그만두시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대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순리에서 벗어나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세력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거예요. 천계 대리자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상황에 따라서 대리자를 통해 천계의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도 있으니까.”
“후후후! 이제야 시인을 하는군. 사실 조금 전 전한 천제의 말씀이란 것도 거짓이란 걸 잘 알고 있소. 천상선녀 그대가 우리를 위협하기 위해 꾸민 것이지. 그렇지 않소?”
“역시 천마신답군요. 설사 그대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제 말이 또 틀린 것은 아니에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의 뜻을 잘 생각하세요. 제 말에 설혹 거짓이 있었다고 해도 그 결과는 큰 차이가 없을 거예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의미도 잘 생각하시기를. 제 말을 무시하면 이번에는 재봉인이 아니라 영구 소멸이 되고 말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어요.”
천상선녀가 말을 마친 후 다시 천계운을 타고 사라졌다.
반선들과 마신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총회주님. 별일 없겠습니까?”
정심반선이 정중하게 천마신을 향해 물었다.
천마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천계와 마계는 서로를 견제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으므로 섣불리 먼저 움직일 수 없소. 요컨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상대는 오직 백자안 그자뿐이오.”
“하지만 백자안 그자는 중간지대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는 이미 중간지대에서 빠져나왔소. 조금 전 지존검과 천마검이 검명을 터뜨렸소. 주인이 돌아왔다는 이야기지.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지도 모르오.”
천마신이 말을 한 후 우수를 뻗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한데 그 사람은 바로 백자안이 아닌가.
지목을 당한 백자안이 천천히 단상 쪽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승부를 볼 수밖에 없겠구나. 천상선녀가 그냥 돌아간 것이 아쉽지만, 최선을 다한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제8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