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장] 우화등선 1
[제64장] 우화등선
다음 날 아침 정심봉.
이른 아침부터 반선들이 대거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정심회 소속 반선들이었다.
정심회주의 소집령에 따라 선마대회에 앞서 자체 회의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회의장은 정심각 옆에 위치한 공터였다.
공터라고는 하지만 광장처럼 넓은 곳이라 한 번에 백만 명도 수용이 가능했다.
일만여 정심회 반선들이 대부분 참여했지만, 공간이 넉넉한 이유였다.
워낙 많은 반선이 참석해 이번 모임은 회의라기보다 대회를 방불케 했다.
그래서일까.
모레 열리는 선마대회와 구별해 정심대회(正心大會)라 부르는 반선들도 많았다.
백자안은 단상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와룡반선과 함께 앉아 있었다.
따로 의자는 없었다. 지휘부 고수와 달리 일반 반선들은 모두 가부좌를 하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수도하는 사람들이라 그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백자안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수백 명의 지휘부 반선들을 쳐다봤다.
그중 낯익은 반선은 바로 정심회주와 집법반선이었다.
사회를 맡은 정심총관 역시 어제 만난 바 있었다.
옆에 있던 와룡반선이 말했다.
“오늘 회의에서 그동안 궁금했던 일들이 많이 풀리길 바라겠소. 하기야 나 역시 마신들과의 동맹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긴 하오.”
“선마대회에 앞서 이런 전체 모임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많다는 증거인 것 같소. 일단 지켜보면 알 것 같구려.”
백자안이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되긴 했다.
정보에 목말라 하고 있는 그였기에 최소한 천마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고 보니 천마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구나. 좀 더 좋은 기회가 있다면 굳이 모레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존검과 천마검을 회수하는 게 더욱더 좋을 것이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지위는 정심회 내부에서도 최하위라 할 수 있었다.
와룡반선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정심회 내부에서 그 지위를 높이려면 공적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공과를 판단하는 데 정심회주의 주관이 많이 작용해 결국 측근들만 요직을 꿰차고 있다고 했다.
‘생각 같아서는 정심회 반선들을 모두 제거하고 싶지만, 힘이 너무 부족하구나. 정심회주와 집법반선 두 사람만 봐도 이전보다 도력이 수십 배 강해진 것 같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구중천심공을 팔성까지 익힌 후 자신감이 상당했었다. 하지만 적들 역시 강해진 것을 보고 긴장한 것이었다.
‘결국, 은둔반선들의 도움이 필수이겠구나. 나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다.’
백자안이 마음을 다스렸다.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서였다.
불안감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특히 백자안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림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무림에 대한 정보가 통제되고 있을까? 모레 선마대회 때에는 반야마신도 참석할까?’
많은 의문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심총관이 단상 앞으로 나왔다.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참고로 이번 모임은 보기 드물게 전체 회합이라 여러 반선의 의견을 취합해 명칭을 정심대회로 하기로 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짝짝짝.
박수가 쏟아졌다.
대신 무림대회와 달리 함성은 없었다.
대부분 묵묵히 박수만 칠뿐이었다.
백자안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개별수행이 원칙인 반선들답구나. 그들이 정심단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모두 모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정심총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럼 먼저 회주님을 비롯해 우리 정심회의 지휘부 반선들을 소개하겠습니다. 평소에 개별 수련으로 인해 자주 보지 못한 분들이 많을 테니, 이번 기회에 낯을 익혀두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 정심회를 이끌어 가고 계신 회주님을 소개합니다.”
짝짝짝.
박수와 함께 정심회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심회주 정심반선(正心半仙)이라 하오.”
정심회주, 즉 정심반선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곧이어 소개된 사람은 집법반선이었다.
“집법반선이오.”
그다음은 정심회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백대반선(百大半仙)이었다.
백 명의 원로 반선으로 구성된 백대반선은 그 상징성이나 실력으로 볼 때 백대마신과 견줄 수 있었다.
백대반선의 대표는 따로 태상반선(太上半仙)이라 불렸다.
쉽게 말해 무림맹의 태상장로와 같은 지위였다.
그 때문일까.
태상반선은 은연중 정심회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로 부회주가 없는 정심회 조직의 특성상 유사시 회주 대행을 맡을 자격이 그에게 있었다. 정심반선 역시 그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나머지 지휘부 역시 빠르게 소개되었다. 정심회 내부에 십여 개의 조직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심총관이 말했다.
“여러 반선께서 모레 이곳 정심봉에서 거행될 선마대회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 좋으니 질문을 해주시면 회주님을 비롯해 지휘부 반선들이 설명해줄 겁니다. 질문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주십시오.”
정심회 반선들이 처음으로 웅성거렸다.
다들 눈치를 보는 표정이었다.
정심단을 복용한 그들로서 대놓고 정심회주를 비난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일까.
다들 시선이 태상반선에게 모였다.
태상반선이 안색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상반선이오. 단도직입적으로 회주님께 묻겠습니다. 모레 있을 선마대회 때 총회주 자리를 놓고 천마신과 겨루기로 되어 있는데, 기권하실 겁니까? 아니면 진짜로 총회주 자리를 목표로 최선을 다해 싸우실 겁니까? 천마신이 총회주가 되면 우리 모두 그의 명을 따라야 하니, 확실히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태상반선 그대의 의문을 풀어주겠소. 나는 절대 기권을 하지 않을 것이오. 천마신과 싸워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다만 우리 정심회와 백마회는 이미 동맹을 맺었으니, 나를 비롯하여 반선들 모두 그 결과에 승복해야 할 것이오. 사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리기 위해 오늘 정심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오.”
“천마신의 무공은 극에 달해 있어 비록 완전히 봉인을 풀지 못했어도 회주님의 경지를 능가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겁니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것이오. 최근 나의 신공이 완성되었으니 천마신 역시 쉽게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오.”
“회주님 말씀을 들어봐도 역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시군요. 차라리 백마회와의 동맹을 무효화하고 우리 정심회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마신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때는 그들이 봉인 상태였습니다. 그 기운만 간접적으로 받아 괴수와 요괴들의 준동을 억누를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백마회에 우리 정심회가 넘어갈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설사 내가 패해 천마신이 총회주가 되더라도 우리 정심회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기로 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 정심회는 백마회와 한배를 탄 상황이오. 백마회와 동맹을 끊는다면 아마도 천계가 움직여 우리를 징벌하려 할 가능성이 크오. 그나마 백마회가 우리 뒤에 있기에 천계가 간섭하지 않는 것이오.”
“천계가 우리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은 관례입니다. 오히려 백마회와 동맹을 맺는 것이 천계 천신들의 노여움을 살 겁니다.”
“태상반선. 그대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소. 이번에 예상대로 서약의 돌이 파괴되면 만년서약의 굴레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되오. 하지만 반대로 천계의 간섭이 노골화될 가능성이 크오. 그동안은 상징적인 계시나 암시로 우리에게 경고했다면, 이제는 직접 천신들을 보내 통제를 가할 수 있다는 말이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
“으음······.”
태상반선이 안색을 굳혔다.
그 역시 알고는 있었다.
신선계 외부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만년서약이 천계 불간섭 원칙과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정심반선이 말했다.
“우리 정심회 반선들의 최종 목표는 단 한 가지 우화등선이오. 하지만 우화등선을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은 실제 무림에 이상향을 만들어 다스리는 것이오. 비록 모레 내가 패해 천마신이 총회주가 되더라도 사실 큰 상관이 없소. 마신들이 천신들을 막아주는 방패막이가 될 것이고, 우리는 무림 이상향 건설을 통해 우화등선하게 될 것이니까. 도대체 무엇을 걱정한단 말이오?”
“좋습니다. 하지만 무림을 다스린다고 무슨 우화등선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태상반선의 말에 반선들이 웅성거렸다.
기본 전제를 부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심반선이 노한 표정을 지었다.
“신탁을 부정하는 것이오? 우화등선 후 가게 될 곳은 그야말로 절대 이상향이라 할 수 있소. 또한 그곳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미지의 장소라 할 수 있소. 하지만 그동안 여러 수련 방법을 연구했지만 실제 우화등선에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소.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르오. 우리로서는 그 사람이 우화등선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소. 하지만 신탁과 계시로 인해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났소. 그 결과물이 바로 무림을 이상향으로 만들어 우화등선 후의 세계와 같게 하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두 세계가 동기화가 되어 그 매개체인 우리가 우화등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오. 물론 마지막에 무림인들이 대거 희생되어야 하겠지만, 그건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무림을 말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목표가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오.”
정심반선이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더는 반대하는 반선이 나오지 않았다.
이의를 제기했던 태상반선조차 섣불리 다시 반박을 못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반선 중 한 명이 일어나서 단상 쪽으로 걸어왔다.
한데 그는 바로 백자안이 아닌가.
이야기가 더는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아 직접 질문을 던지러 나온 것이었다.
“저는 이번에 정심회에 가입한 고독반선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회주님께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해보시오.”
정심반선이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최근까지 절대은둔 수도를 했기 때문에 현 상황에 대해 의문이 많습니다. 먼저 여쭤보고 싶은 것은 현 무림의 상황입니다. 당금 무림은 누가 다스리고 있습니까?”
“하하하! 그 점도 어차피 가르쳐주려고 했소. 그동안 보안에 붙인 것은 혹여 딴마음을 품은 반선들이 나타날 것을 우려해서였소.”
“딴 마음이라면 혹시 개별적으로 반선들이 무림으로 들어가 독자 지배를 하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절대은둔반선 출신답게 총명하시구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현재 신선계와 무림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은 반야마신뿐이오.”
“마신도 역시 사람이었군요. 하기야 우화등선을 한다고 해도 신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백자안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떤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정심회 반선들을 통렬히 꾸짖고 싶었지만, 아직 그럴만한 깨달음이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비꼬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다.
정심반선 역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림은 지금 반야마신이 다스리고 있소. 이제야 밝히는 것이지만 그는 백자안으로 행세하고 있소. 무림인들은 그가 진짜 백자안인줄 알고 있소.”
“······.”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결국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그럼 반야마신 그자가 그때 나타나지 않은 것도 내가 중간지대로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예견했다는 말이로군. 하기야 무림에 이상향을 건설하려면 무림인들의 신망을 얻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내 얼굴과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데 마신들도 우화등선을 바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