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장] 탈태환골 2
천음동.
백자안이 석실 안에서 조용히 앉아 가부좌하고 있었다.
그의 몸 주위에는 신비로운 금빛 기운이 가득했다.
천음반선의 권고대로 서둘지 않고 일단 몸 상태부터 점검하는 중이었다.
세밀한 점검이 시작된 지 사흘째.
물론 점검과 함께 회복운공도 병행해 다가올 싸움에 대비했다.
‘구중천심공이 팔성에 달했구나. 마지막 단계인 구성에 달하지 못해 아쉽지만, 그래도 탈태환골로 단숨에 두 단계를 올린 것은 괄목할 만하다. 게다가 지난 사흘간 천서에 수록된 여러 실전무공들도 모두 익혔으니, 그 위력은 아마도 팔대무공 못지않을 것이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모두 구층까지 있는 구중천심공을 팔층까지 익힌 것도 놀라운데, 그에 따른 실전무공들 역시 탈태환골 덕분에 저절로 연마하게 된 점이 기뻤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실력이다. 적들은 무수히 많지만, 실제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고수는 전무한 편이니까. 은둔반선들을 결집시키기 전까지는 오로지 내 실력으로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백자안이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그러자 얼굴이 노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신선계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은둔반선 중 한 명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었다.
지난 사흘간 틈틈이 외부로 나가 신선계 상황을 알아본 결과 외적인 부분은 이전과 큰 다름이 없었다.
물론 이곳 천음봉은 정심회 반선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정심봉과는 분위기가 달라, 아직 정확한 사정은 몰랐다.
‘지존검과 천마검을 되찾기 위해서는 일단 정심회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 다행히 정심회에서 세력 확대를 위해 수시로 은둔반선들의 가입을 받고 있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도 가능할 것이다. 일단 정심봉으로 간다.’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계획은 은둔반선 중 한 명으로 행세하며 일단 정심회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정보 획득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인 것을 고려해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가 은둔반선으로 활동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신분을 숨기기에 좋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천음반선에게 들은 내용에 따르면 신선계에는 무수히 많은 반선이 있다고 했다.
그 중 정심회 반선들의 수는 대략 일만 정도.
나머지는 모두 은둔반선으로 분류가 되었다.
하지만 은둔반선들 모두가 정심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은둔반선들은 원칙적으로 중립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심회 반선들도 원래는 은둔반선들이었다.
다만 정심회에 반대해 세운 단체의 이름이 은둔회였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은둔반선들이 비록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때가 되면 신선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정심회 반선들을 정리할 개연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신선계에서는 매일 새로운 은둔반선들이 나타난다고 하니, 신선비급을 익힌 나를 의심하는 자는 드물 것이다. 그 점은 다행이라 할 수 있겠군.’
백자안이 조심스럽게 천음동을 나왔다.
신선운 하나를 불러 그 위에 올라탔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서약의 돌이 있는 서약봉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존검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서약봉 주위에는 가공할 절진이 펼쳐져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나마 이전에 한 번 가본 정심봉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정심봉으로 가자!’
슈우우우.
백자안을 태운 신선운이 빠르게 날아갔다.
얼마 후 도착한 정심봉 주위에는 예상대로 정심회 반선들이 가득했다.
원래 정심봉 표면에 있는 동굴 속에서 대거 기거하고 있기도 하지만, 인근에 있던 반선들이 거의 모두 모인 것 같았다.
다만 아직 어떤 대회가 열리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준비를 하느라 한창 바쁜 모습이었다.
백자안이 착지한 곳은 정심봉 꼭대기였다.
정심봉 위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정심각이 구름 사이로 거대한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백자안은 이전에 백 층 규모의 그곳 일 층 취의청에서 신선재판을 받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재판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심회에 가입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었다.
물론 위장 가입이긴 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여야 했다.
다행히 반선들의 세계는 무림과 달라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정심회에 가입하려면 기본적인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지. 지난번에 이런 경우를 대비해 돌아가신 반선 한 분의 인적사항을 습득해둔 것이 천만다행이구나.’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
사실 지금 그가 역용하고 있는 얼굴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 얼굴은 천음반선의 동료로 은둔회 반선 중 한 명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은둔회 활동을 채 하기도 전에 천수를 다해 죽고 말았다.
그 사실은 오직 천음반선만이 알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그의 인적사항에 대해 백자안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이왕이면 실제 반선으로 있었던 분의 행세를 하는 것이 안전하겠지.’
백자안이 마음을 편안히 하며 정심각 대문 앞으로 갔다.
대문 앞에는 경계를 서고 있는 정심회 반선 스무 명이 있었다.
“귀하는 뉘시오? 정심회원이라면 정심패(正心牌)를 보여주시오.”
수문반선(守門半仙)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말이었다.
“고독반선(孤獨半仙)이라 하오. 정심회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해서 왔소이다.”
“고독반선? 으음, 한번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우두머리 수문반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신선계 내 세력 확충에 매진하고 있는 정심회 측에서 스스로 온 자를 돌려보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은둔회 쪽 간자일 가능성을 배제 못 해 철저한 검사와 안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여태까지 신선계 안에서도 가장 심처에서 수도를 해왔소. 그러기 때문에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 것이오. 내가 필요 없다면 곧바로 돌아가겠소.”
“하하하. 아니오. 신선계 반선이라면 누구든 환영하오. 이는 회주님의 명이시며 본회의 규율이기도 하오. 입회 절차는 알고 오셨소?”
“잘 모르오. 그동안 혼자서 수도만 하다가 정심회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온 것이오. 솔직히 지금 신선계 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소이다. 마신들이 봉인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그게 사실이오?”
“하하하. 정말 깊은 동굴 속에서 수도만 한 분이구려. 백대마신이 봉인을 푼 것은 오래전 일이오. 다만 백대마신 중 수장인 천마신만 남았는데, 이제 사흘 후 있을 선마대회(仙魔大會)에서 천마신이 서약의 돌을 부수면 그마저도 봉인을 완전히 풀게 되오. 우리 정심회는 마신들의 모임인 백마회(百魔會)와 동맹을 맺고 신선계 내부를 재편할 것이오.”
“재편이라 함은 무슨 뜻이오?”
“하하하! 정말 모르는 것이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 천마신이 완전히 봉인해제를 하고 서약의 돌마저 부수면 우리 반선들을 옥죄던 만년서약이 무효가 되오. 아니 그것뿐이겠소? 서약의 돌이 부서지면 바깥 세계와 단절된 우리 신선계의 문 또한 다시 열리게 될 것이오. 문제는 우리 회주님과 천마신 중 어느 분이 총회주가 될 것인가인데, 이번 대회 기간 동안 결론이 날 것이오.”
“아! 그렇소? 그럼 재편은 이번에 선출된 총회주가 하게 되겠구려.”
“그렇소. 고독반선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 신선계에 있는 반선들은 협동심이 너무 부족하오. 그래서 은둔반선들을 대거 찾아내 그들도 동참시킬 생각이오.”
“동참을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자들은 오로지 죽음뿐이오.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은둔회에 가입해 반역을 도모할 테니까 말이오.”
“황제가 신선계에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반역이오?”
“총회주께서 곧 황제가 아니겠소? 신선계 문이 열리면 총회주께서 속세에서의 황제 지위까지 가지게 될 것이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총관과 나누도록 하시오. 어서 모셔가도록 하시오.”
“네.”
수문반선 중 한 명이 대답과 함께 백자안을 정심각 안으로 데려갔다.
총관 집무실이 있는 곳은 정심각 이층이었다.
사흘 후 있을 선마대회 준비로 바쁜 와중이지만 정심총관(正心摠管)은 마침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총관님. 이분은 고독반선이라 하며 직접 우리 정심회에 가입 의사를 밝혔습니다.”
“오! 그렇소? 최근 스스로 가입 의사를 밝힌 은둔반선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야 대세를 파악한 것인가?”
정심총관이 매우 기뻐하며 백자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은연중 눈빛이 날카로운 것이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것 같았다.
“고독반선이라 하오.”
“으음, 한두 번 정도 들어본 것 같소. 신선계 어느 쪽에서 수도를 하셨소?”
“외곽 쪽이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중간지대와 가까운 곳이오.”
“아! 중간지대 쪽은 자칫 빨려 들어갈까 봐 반선들이 거의 안 가는 곳인데, 그곳에 있었다면 신선계 소식은 잘 모르겠구려.”
“그러하오. 한데 심사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요즘은 뜸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둔회 반역자들이 출몰해 신선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었소. 그 때문에 간자를 가려내기 위해 간단한 심사를 하게 된 것이오.”
“그렇구려. 이왕 할 거면 바로 합시다.”
“좋소. 번거로운 시험은 아니니 너무 불쾌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하지만 우리 정심회가 마신들과 손을 잡은 것을 오해하는 반선들이 아직 많다고 들었으니, 그대 역시 이해를 바라오.”
“알겠소. 하지만 나는 간자가 아니오.”
백자안이 짐짓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이게 다 백자안 그놈 때문이오.”
“백자안이 누구요?”
백자안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정심총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우리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존재요. 아직 백자안 그놈을 모르는 것을 보니 역시 철저한 은거수도를 하셨구려.”
정심총관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자안은 이제 신선계 내에서도 유명 인사였다.
이는 백자안이 서불마신과 황궁마신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 상세한 내용은 무림과 신선계를 오가는 반야마신과 신선경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심사를 지금 바로 할 수 있겠소?”
백자안이 짐짓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심총관이 물었다.
“물론이오. 사실 심사는 매우 간단하오. 우리가 주는 약을 하나 먹게 되면 그 즉시 정심패를 주겠소.”
“무슨 약인데 그러시오? 혹시 독약이오?”
“하하하. 독약은 아니오. 독약이라면 어찌 우리 정심회 반선들 모두가 복용했겠소? 원칙적으로 자율을 주는 대신 최소한의 통제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오.”
“그게 그 말이 아니오? 일종의 고독 같은 것으로 회원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 같구려.”
“하하하. 생각보다 겁이 많구려. 귀하가 먹게 될 약은 정심단(正心丹)이란 것으로 배신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도력을 높여주는 영단이오. 정심단을 거부하면 반역자로 간주되어 즉결 처형을 받게 되니 순순히 먹는 게 좋을 것이오. 어떻게 하겠소?”
정심총관의 말에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총관실로 들어왔을 때 주위에 은신해있는 반선들이 스무 명가량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정심총관이라는 이자의 무공도 매우 높을뿐더러, 은신해 있는 반선들의 무공도 수준급이다. 정심각 각층에도 반선들이 가득 차 있으니, 지금 싸움을 벌이게 되면 지존검과 천마검을 회수하는 일이 더욱더 어렵게 된다. 아무래도 만독불침인 내 신체를 믿어볼 수밖에 없겠구나.’
백자안이 결단을 내리고 말했다.
“하하하. 누가 먹지 않는다고 그랬소? 정심회 반선 모두가 복용했다면 나 역시 어찌 거부할 수 있겠소? 복용하겠으니 어서 주시오.”
“잘 생각하셨소. 솔직히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정심단을 복용한다니 기쁘오. 하기야 이제는 은둔회 조직이 거의 와해되어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있소. 문제는 중간지대로 들어간 백자안 그놈이오. 이번에는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하겠지만, 워낙 상식을 뛰어넘는 놈이라······.”
정심총관이 투덜대며 정심단 한 알을 꺼냈다.
백자안이 정심단을 받은 후 곧바로 입에 넣었다.
샤르르.
정심단이 입안에서 그대로 녹아내리며 뱃속으로 들어갔다.
백자안으로서는 실제 중독이 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실제 배신을 하기 전에는 모르겠구나. 하지만 느낌상 별 영향이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