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신선맹 3
흑도맹 무사들의 충성맹세에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누가 봐도 중과부적의 열세였지만 백자안의 기도가 그것을 만회하고 있었다.
백자안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과 달리 흑도맹 무사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따르려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흑도인들 상당수는 어쩔 수 없이 흑도의 길에 들어선 경우가 많았다.
위선적인 정파 무사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도 허다했다.
결국 그렇게 흑도인이 되어 그중 소수는 그야말로 악인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 정도가 심한 자들은 이미 대부분 숙청한 바가 있었다.
‘그래, 나 혼자 수백만 무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처음에는 몰라도 나중에는 흑도맹 백만 무사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시합을 벌여 신선맹주가 되려는 처음 계획은 이미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어떻게든 정면으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장무맹과 천축무맹, 그리고 황궁 무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백자안을 비롯해 흑도맹 무사들을 섬멸하기 위해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의 병력은 무려 사백만에 달했다.
흑도맹 무사가 백만이니 사대 일의 병력 차이였다.
나머지 수백만 군웅들은 일단 대연무장 뒤편으로 물러났다.
대부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어느 한쪽을 위해 싸울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불과 일각의 시간도 되기 전에 백자안을 비롯한 흑도맹 무사들은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불사대불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백자안! 네놈이 정말 무덤을 파는구나. 네놈 혼자 죽으면 되지 왜 가만있는 흑도맹 무사들까지 죽이려는 것이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흑도맹 무사들 중 투항하려는 자는 지금 나와라.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네놈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최후의 경고.
불사대불의 말에 흑도맹 무사들이 잔뜩 움츠렸다.
백자안의 기세에 놀라 충성맹세를 했지만 이제야 현실을 직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백자안에 대한 기대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상황보검을 높이 든 채 우뚝 서 있는 백자안은 별 동요가 없었다.
흑도맹 무사들은 그의 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그대들에게 한 가지 제의를 하고자 하오.”
“무엇이냐?”
우주존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원래 자신의 성격대로라면 일장에 백자안을 죽였을 것이었다.
사실 오늘 이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라 할 수 있었다.
백자안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가 신선맹주가 되었을 것이었다.
최종대리자가 되는 것 또한 미리 반야마신과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다.
황제 또한 그를 무림왕으로 책봉할 준비를 마쳤다.
단 하나의 문제는 불사대불과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그의 무공이 몇 수 위라 할 수 있었다.
요컨대 반야마신 외에는 천하에 자신의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백자안이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 본 백자안의 기도는 역시 명성 그대로였다.
하긴 백자안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드러낸 기도에 조금 위축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아직 개별 공격을 못 하고 있었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그대들이 무림을 다스리기 위해 많은 무림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하니 전면전보다 수장끼리 개별 전투를 벌여 승부를 결정짓도록 합시다.”
“수장끼리 말이냐?”
“그렇소. 본인은 혼자서 상대하겠소. 다시 말해 원래대로 시합해보자는 것이오. 아마도 본인이 패하면 흑도맹 무사들은 모두 그대들을 따를 것이오.”
백자안의 말에 군웅들이 술렁였다.
흑도맹 무사들 또한 얼굴을 붉히며 반박하지 못했다.
백자안 한 명의 무공만 믿고 대치 중이라, 버팀목이 사라지면 언제든 투항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후후! 나쁘지 않은 제안이구나. 사실 네놈을 제외하고 나머지 흑도맹 놈들은 우리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괜히 나서다가 목숨만 잃게 될 뿐이지. 좋다. 너의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우리도 하수인들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 쪽에서 나설 무사들은 따로 제한을 두지 않겠다. 네놈 말대로 수장끼리만 붙으면 병력이 절대 우세한 우리가 손해이기 때문이지. 그렇게라도 하겠느냐?”
“좋소. 그럴 줄 알고 있었소.”
백자안이 담담한 태도를 여전히 유지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비무대.
포위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장소를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칠십이 채주와 호법 등 흑도맹 지휘부 고수들은 단상에서 내려와 흑도맹 무사들과 함께 있었다.
비무대 밑에 있던 방일화가 급히 말했다.
“사부님. 제가 먼저 놈들을 상대할게요.”
“아니다. 일화 너는 대기를 하고 있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방일화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비록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백자안이 이미 어떤 결단을 내린 것을 짐작한 때문이었다.
‘그래, 혹시라도 사부님께서 쓰러지시면 내가 보호해드려야 해. 상대 전력이 압도적이니 정면 승부는 어렵다. 최악의 상황이 되면 사부님을 모시고 이곳을 빠져나간다.’
방일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백자안 혼자서 이 많은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계획대로 시합을 통해 신선맹주가 되었다면 뭔가 돌파구를 마련했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자, 그럼 바로 시작하지.”
우주존자가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순간, 천축무맹의 최고수들이라 할 수 있는 백대존자가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백여 명의 존자들.
그들은 조금 전 전음을 통해 우주존자로부터 명을 하달받은 상태였다.
그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불사대불이었다.
우주존자가 먼저 나섰지만 그래도 공격을 개시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미룰 줄 알았다.
한데 의외로 천축무맹 고수들을 먼저 내세워 백자안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먼저 백자안 저놈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신선맹 내에서 지분권을 확대할 수 있다.’
불사대불이 급히 명을 내려 지휘부 고수들을 출동시켰다.
장로와 호법 등 천축무맹과 비슷하게 백여 명이었다.
그야말로 서장무맹의 핵심 고수들이라 할 수 있었다.
백자안은 양 맹의 고수 이백여 명과 대치하며 눈을 빛냈다.
명실상부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의 최고 실세라 할 수 있었다.
‘일단 이놈들부터 제거하면 놈들이 매우 당황할 것이다. 그다음은 불사대불과 우주존자, 황제를 죽인다.’
백자안이 내공을 끌어올려 상황보검에 담았다.
절대내공을 가진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절대검강을 펼칠 생각이었다.
절대검강은 구중천심공 삼성 이상부터 펼칠 수 있었다. 백자안의 경우 지금 삼성을 달성했기에 가능했다.
또한 이 절대검강은 여러 번 펼칠 수 있어 단 한 번 펼친 후 기진하고 마는 무명폭잠공보다 유리했다.
‘지금 나의 내공은 거의 무한대라 할 수 있다. 절대검강을 실전에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백자안이 다시 한번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겉으로 봐서는 상황보검을 수직으로 높이 들고 있는 자세 그대로였다.
그때였다.
천축무맹과 서장무맹의 이백여 고수가 일제히 장풍을 날렸다.
쏴아아.
거대한 해일처럼 날아오는 이백여 개의 장세.
놀랍게도 작은 산 하나를 무너뜨릴 정도의 강력한 장력이 서로 부딪히지도 않고 날아왔다.
백자안으로서는 처음 당해보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였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백자안이 상황보검을 밑으로 내리며 가볍게 원호를 그렸다.
순간, 금빛 검강이 사방으로 펼쳐나갔다.
마치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검강.
숨죽이며 지켜보던 군웅들의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빛을 발산했다.
“저런!”
“아니!”
우주존자와 불사대불의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양 맹의 이백여 고수들이 쏟아낸 장세들이 급격히 허물어지고 그들의 몸에 절대검강의 파편들이 박히는 것이 보였다.
“크윽!”
“으윽!”
비명이 난무하며 피보라가 솟구쳤다.
군웅들이 놀라서 보니, 이미 백자안을 공격했던 이백여 고수들이 온몸이 찢겨 나간 후 즉사해있었다.
반면 백자안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처음처럼 상황보검을 높이 들고 있는 그는 미동도 없었다.
와아아.
숨죽이고 있던 흑도맹 무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맹주님 만세!”
“맹주님 만세!”
원래 강자에게 쉽게 굴복하는 성질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라 이제 노골적으로 백자안을 지지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백자안의 무위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제는 달랐다.
천축무맹과 서장무맹의 핵심 지휘부 고수들이 일거에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정말!”
우주존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했지만 백대존자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몰살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는 불사대불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위협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우주존자. 아무래도 안 되겠소. 우리 두 사람이 합공해서 놈을 죽입시다. 아니 폐하께서도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불사대불이 우주존자와 황제를 번갈아 살펴봤다.
우주존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때가 아니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놈 역시 내상을 입었을 것이오. 아직 우리에게는 삼백만의 무사가 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소. 시간은 우리 편이 될 것이오. 게다가 황궁에서 온 고수들이 아직 건재하오. 최악의 상황이 와도 놈을 죽일 수 있을 것이오. 폐하께서도 안심하십시오.”“물론이오. 한데 반야마신은 어디에 있소?”
황제의 질문에 우주존자가 안색을 굳혔다.
‘하필이면 지금 마신께서 신선계로 들어가셨단 말인가. 봉인 해제를 앞둔 천마신으로부터 급히 연락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너무 공교롭구나. 하지만 신선계 안에서도 마신께서 이곳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최악의 순간에는 도움을 주실 것이다.’
우주존자가 생각을 마친 후 말했다.
“반야마신은 필요한 때가 되면 나타날 겁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알겠소. 우리 황궁에서도 백대고수를 내보내겠소.”
“아! 감사합니다.”
우주존자가 반색했다.
불사대불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황제의 명을 받아 황궁 백대고수가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백자안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핏물이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우주존자의 예측대로 조금 전 출수하면서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사실 서장무맹이나 천축무맹 한 곳의 고수들만 상대했다면 이 정도의 내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양 맹이 합공을 가했고 그 위력은 경천동지할 정도였다.
백자안이 방어와 동시에 공격까지 가하기에는 절대검강의 위력이 부족했었다.
아니 위력이 부족했다기보다 아직 능숙하지 못한 탓이 컸다.
절대검강을 완벽히 펼치려면 최소한 구중천심공이 오성에 달해야 안전했다.
하지만 워낙 상황이 긴박해 무리를 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지금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지금 쓰러지면 끝장이다. 차라리 지존금광을 펼치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명백히 나의 실수다.’
백자안이 떨리는 몸을 최대한 자제하며 다시 내공을 끌어올렸다.
지금 상태에서는 급격한 변화를 주기 어려워 다시 절대검강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정도는 더 가능할 것 같다. 이후가 문제다. 한데 놈들의 무공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구나. 개개인의 무공이 반선들과 비교해 절대 약하지 않다. 황궁 고수들 역시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면 큰일인데 걱정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