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적 반로환동-186화 (186/250)
  • [제60장] 녹림왕 2

    “저 말입니까?”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림왕이 자신을 대결 상대로 지목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도전자로 막 나서려던 찰나였다.

    ‘불감청 고소원이라고 하더니, 자연스럽게 기회가 주어졌구나. 잘된 일이다.’

    백자안이 내심 기뻐하며 단상 앞으로 나왔다.

    청산객이 물었다.

    “왕 호법께서는 대결 제의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자안의 수락에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형식적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다지 기대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청산객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 대결 한 번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겠습니다. 왕 호법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하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실 최근 신공을 완성해 무공이 급상승해 있던 터라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녹림왕께서는 사정을 봐주려 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하하하. 기백이 좋소. 서로 최선을 다해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합시다.”

    녹림왕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호법 주제에 감히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등 거만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놈을 일장에 죽여 본보기로 삼아야겠다. 대충 혼을 내려 했는데 지금 보니 그 정도로는 안 될 듯하구나.’

    녹림왕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백자안 역시 천천히 따라 올라갔다.

    두 사람의 간격은 삼장 정도.

    장풍을 날린다면 그 위력이 직접 작용해 큰 타격을 받을 게 분명했다.

    “왕 호법! 서로 편하게 장력 대결을 하는 게 어떻겠는가?”

    “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먼저 비무대 밑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이지요?”

    백자안이 청산객을 바라봤다.

    청산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비무대 밑으로 먼저 떨어지면 패배하게 됩니다. 자, 그럼 시작하십시오!”

    청산객이 오른손을 들었다.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시합이 개시되었다.

    군웅들 역시 함성을 보내며 분위기를 달궜다.

    녹림왕과 백자안이 서로 장풍을 날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녹림왕은 체면상 단 한 번의 대결로 끝내기 위해 최대의 공력을 담았다.

    통합맹주 선출 시합 때는 기권할 생각을 하는 그에게 이번 시합은 공개적으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백자안은 조금 고민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리 최근에 무공이 높아졌다고 미리 밝혔다고는 하지만 일장에 녹림왕을 죽이면 의심을 살 가능성이 컸다.

    일단 영웅대회 때까지 흑도맹을 이끌 생각을 하는 그로서는 이후의 일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녹림왕의 공세가 너무 강했다.

    백자안 역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칫 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래, 어쩌면 내 실력을 완전히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일장을 날렸다.

    쏴아아.

    꽈앙.

    “으윽!”

    녹림왕이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가 비무대 밑으로 떨어졌다.

    쿵.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저런!”

    “저럴 수가!”

    군웅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녹림왕은 별다른 내상을 입지 않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비무대 밑이라 이미 그의 패배가 확정된 후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녹림왕이 승복하지 않고 다시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백자안이 흠칫했다.

    마지막에 힘을 줄여 녹림왕의 목숨을 취하지 않은 것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녹림왕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했으나 다시 마음을 돌린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반야마신 때문이었다.

    영웅대회까지 사흘이나 남은 지금 백자안이 자신의 실력을 모두 보여주면 반드시 의심을 사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영웅대회 때까지 최대한 실력을 숨기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녹림왕이 변수였다.

    “승복할 수 없다. 네놈이 사술을 쓰다니! 다시 붙어보자.”

    “이미 패배하셨습니다. 이제 녹림왕은 바로 접니다.”

    “개소리하지 마라. 나는 멀쩡하다. 생사결을 벌여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대결을 벌일 것을 제의한다. 거절하는 자는 패배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너무 억지를 부리는군요. 총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미 승부가 난 대결을 이런 식으로 다시 하는 것이 정당합니까?”

    “으음······ 그것은······.”

    청산객이 안색을 굳혔다.

    누가 봐도 녹림왕이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녹림왕의 몸 상태가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이 상태에서 백자안의 승리를 선언하면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관전하고 있던 상록채주 역시 녹림왕을 거들었다.

    “이번 시합은 무효요. 아직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 대결에는 분명 큰 문제가 있었소. 그렇지 않다면 어찌 녹림왕께서 내상을 전혀 입지 않으셨겠소? 더구나 내가 알기로 현직 녹림왕은 대결에서 패할 때 생사결을 제의해 재대결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소. 따라서 재대결에는 아무 문제가 없소. 다만 아무리 어떤 암중 요소가 개입했다고 해도 이번이 마지막 대결이 되어야 할 것이오.”

    “으음, 상록채주의 말이 옳습니다. 재대결을 벌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은 다시 준비해주십시오. 생사결이 부담이 되면 지금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왕 호법! 어떻게 하겠습니까?”

    청산객이 은근히 백자안의 기권을 권유했다.

    하지만 백자안은 냉소를 지을 뿐이었다.

    “흥! 어림없는 소리! 사실 최근 제가 얻은 기연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을 수십 배 초월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일장으로 녹림왕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오래도록 모셔온 분이라 배려를 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배려를 모르고 오히려 생사결을 제의해 죽이려 하니 저 역시 가만히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가증스러운 놈! 입을 찢어 놓겠다!”

    녹림왕이 분노하며 강기를 날렸다.

    바로 최근 그가 대성한 녹림강기였다.

    쏴아아.

    백자안이 흠칫하며 장풍으로 응수했다.

    꽈앙, 하는 폭음과 함께 인영 하나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쿵.

    비무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추락한 그는 바로 녹림왕이었다.

    한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즉사한 것이 아닌가.

    군웅들이 경악한 것은 물론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제는 비무대 위에 태연하게 서 있는 백자안에게 모여졌다.

    백자안이 상황보검을 꺼냈다.

    상황보검은 최근 특수 처리를 해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보검의 기운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백자안이 기호지세라 생각하고 검강을 허공에 날렸다.

    기둥처럼 뻗어 나간 강기가 허공에 글자를 새긴 것은 그 직후였다.

    <흑도천하(黑道天下)>

    “아!”

    “오!”

    군웅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백자안의 무위에 감탄한 것이었다.

    대세를 파악한 청산객이 소리쳤다.

    “새 녹림왕이 탄생하셨습니다. 총채주이자 흑도맹주이신 녹림왕께 인사를 드립니다.”

    털썩.

    청산객, 상록채주 등 흑도맹의 지휘부 고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백만 흑도 무사들 또한 일제히 무릎을 꿇어 충성을 맹세했다.

    백자안이 무형지기로 그들을 일으켰다.

    무려 백만의 무릎을 펴게 한 것으로 절대내공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오!”

    허공에 강기로 글자를 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녹림왕 만세!”

    “맹주님 만세!”

    순식간에 무사들을 장악한 백자안이 소리쳤다.

    “나는 이제 녹림왕으로서 모두를 대표할 것이다. 나의 명이 곧 법이니 이를 어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존명!”

    “명심하겠습니다.”

    백만 무사들의 충성맹세가 이어졌다.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흑도라고는 하나 그 수가 많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겠구나.’

    * * *

    녹림왕이 된 백자안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피의 숙청이었다.

    일반적으로 한 단체의 수장이 된 후 정적을 없애기 위해 감행하는 것이 숙청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숙청의 목표는 바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찾아내 제거하는 것이었다.

    백자안은 섭혼술을 여러 번 펼쳐 그 대상을 가려냈다.

    이틀 정도 걸렸는데, 그 결과 추려낸 자들이 만 명이 넘었다.

    그들은 양민들을 학살하는 등 그 죄가 하늘에 닿은 자들이었다.

    주동자는 대녹림 총관 청산객, 상록채주 등 지휘부 고수 백여 명으로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자안은 일단 주동자부터 모은 후 모조리 죽였다.

    청산객과 상록채주 등이 죽임을 당하자, 그들을 따르는 세력들이 당황한 것은 물론이었다.

    백자안은 그런 그들을 다시 모아 이번에는 모두 무공폐쇄를 시켰다.

    호생지덕을 발휘해 졸개들의 경우 목숨만은 살려준 것이었다.

    한데 그런 과정이 오히려 백자안의 명성을 높였다.

    만여 명을 단번에 무공폐쇄시키는 능력이 소문을 타고 퍼져나간 것이었다.

    영웅대회를 하루 앞둔 저녁.

    백자안은 집무실에서 방일화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이틀간 숙청 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이제야 서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되었다.

    “사부님. 내일 영웅대회에서 불사대불, 우주존자 그들과 정말 통합맹주 자리를 두고 싸우실 건가요?”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전 사부님을 믿어요. 사부님 뜻대로 하세요. 하지만 반야마신이 마음에 걸려요. 불사대불과 우주존자를 제거한다고 해도 반야마신까지 없애지 못하면 상황이 무척 어려워질 거예요. 병력 면에서도 놈들은 황궁 세력을 제외하고도 삼백만이 넘잖아요? 황제까지 황군을 이끌고 온다고 하니 그것도 부담이 되고요. 그에 비해 우리는 백만 정도밖에 되지 않고, 그것도 개별 무력에 있어 놈들과 비교도 되지 않게 약하고 말이에요. 흑도들이라 언제든 사부님을 배신할 가능성이 매우 큰 것도 부담이에요. 물론 가장 악질들은 이미 숙청을 했으니까 그 정도는 약하겠지만, 상황이 불리한데도 중원 무림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자들은 아니라는 거죠.”

    “나도 알고 있다. 내 비록 녹림왕이자 흑도맹주가 되었지만, 흑도맹 무사들을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는 것 또한 아니다. 일단 세력이 있어야 놈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지. 무엇보다 놈들의 수뇌부를 직접 제거할 기회가 늘어나게 되지.”

    “하기야 놈들 입장에서는 하수인들이 여전히 필요하니까 흑도맹 무사들을 함부로 쳐내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이미 소문이 나서 사부님을 무척 경계할 거예요. 아직 이렇다 할 간섭은 하고 있지는 않지만 벌써 여러 정보가 넘어갔을 거예요.”

    “정확하게 봤다. 아마도 한 번쯤은 회유해본 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거하려 할 것이다. 아마도 그 시기는 내가 기권을 하지 않고 통합맹주 선출시합에 나갔을 때가 될 것이다. 그들로서는 시합 중에 나를 죽이는 것이 명분도 있고 말 잘 듣는 새로운 녹림왕을 세울 수도 있을 테니까.”

    “아! 이미 예상을 하고 계셨군요. 하지만 너무 걱정돼요. 특히 반야마신 그놈이······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 마력이 혼자서 무림을 말살시킬 수 있다고 들었어요.”

    “걱정하지 마라. 지금 내 무공으로 반야마신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나머지 백대마신과 정심회 반선들인데, 그동안 내가 알아보라고 한 것은 조사해봤느냐?”

    “네. 그것뿐만 아니라 사부님 가족들 행방에 대해서도 알아봤어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어요.”

    “으음, 알겠다. 일단 지금처럼 임기응변할 수밖에 없겠구나. 만일 내가 화를 당한다면 너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런 말씀 마세요. 어떤 경우에도 저는 사부님과 생사를 함께 할 거예요.”

    “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치욕을 감수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내 말을 명심하도록 해라.”

    “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