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장] 건곤일척 1
[제59장] 건곤일척
방일화.
그녀는 금의노인이 다가오자 다시 한번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혈도가 찍혀 조금도 방어할 수 없는 상황.
죽는 것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금의노인이 옷을 벗기려 한다는 것이 공포감을 불러왔다.
‘차라리······.’
방일화가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고 자진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 치욕을 당할 수는 없어.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 전에 내가······.’
방일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아직 시도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금의노인이 음탕한 눈빛을 발했다.
“후후후! 가까이서 보니 대단한 미색이구나. 좋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퇫!”
방일화가 대답 대신 침을 뱉었다.
“이 계집이!”
철썩.
금의노인이 방일화의 뺨을 후려쳤다.
“으윽!”
방일화의 입가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감히 나 금의존자(金衣尊者)에게 침을 뱉다니!”
금의노인, 금의존자가 분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천축무맹의 백대존자(百大尊者) 중 한 명이었다.
현 천축무맹주 우주존자 역시 백대존자 출신으로, 백대존자의 위상은 천축무맹 내에서 절대적이었다.
“으으······ 네놈이 악독하기로 소문난 그 금의존자였구나.”
방일화가 금의존자를 노려봤다.
그도 그를 것이 금의존자는 장사성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의 손에 죽은 정파 무림인만 수천 명이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워낙 무공이 강해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후후후! 이제 알았느냐? 일단 네년의 옷부터 벗겨주마.”
금의존자가 방일화의 옷을 벗기려 했다.
방일화는 수치감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금의존자의 손길이 느껴지자 곧바로 혀를 깨물려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금의노인의 손길이 사라졌다.
대신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방일화가 급히 눈을 떠보니 금의존자가 머리에 구멍이 뚫린 채 즉사해 있었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한쪽 구석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만의 특기이기도 했다.
“아! 사부님!”
“일화야.”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본 얼굴을 보여주었다.
바로 백자안이었다.
“정말 사부님이셨군요.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방일화가 눈물을 흘렸다.
백자안이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다친 데는 없느냐?”
“네. 사부님.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알게 되셨나요?”
“네가 회주로 있는 복장사회 은신처로 찾아갔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다행히 그곳에서 너의 흔적을 발견하고 이렇게 급히 쫓아온 것이다.”
“추적해온 놈은 저자만이 아니에요.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해요.”
“걱정하지 마라. 이곳으로 오면서 놈들을 모두 제거했다. 늦었지만 복장사회 무사들의 복수를 한 셈이지.”
“설마 일만 명에 달하는 놈들을 모두 제거하신 건가요?”
“그렇다. 그러니 일단 안심해라. 장사성에 있는 천축무맹 무사들이 모두 몇 명 정도냐?”
“삼만 명 정도 된다고 들었어요. 사부님 말씀대로 일만 명이 제거되었다면, 이제 이만 명 정도 남았군요. 한데 정말 일만 명을 모두 죽이신 건가요?”
“그렇다. 복장사회 무사들의 시신을 보고 나 역시 매우 분노했었지. 하지만 이제 차분히 앞으로의 상황을 의논할 때인 것 같구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내게 알려다오.”
“네. 사부님 역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씀해주셔야 해요. 강호에서는 사부님께서 황궁마신과 동귀어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너도 그렇게 알고 있었느냐?”
“아니에요. 저는 사부님께서 돌아오실 거로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 때문에 사부님의 진정한 신분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지요.”
“잘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병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니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네 말대로 결국 놈들이 이곳을 찾아낼 것 같구나.”
“네.”
* * *
“그러니까 그 창궁서생이란 분이 사부님께 우리 복장사회를 소개해주고 그냥 떠났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 우리는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침이 되어서 하는 말이 술김에 함께 가자고 했다더구나. 내가 혼자라도 가겠다고 하자, 이곳 장사성에 있는 정보상인 한 명의 소재를 알려주었지. 나는 그 사람을 만나 복장사회의 은신처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지. 그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구나.”
백자안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복장사회 무사 천여 명이 몰살당한 게 아직도 안타까운 것 같았다.
“너무 자책 마세요. 사부님 잘못이 아니에요. 잘못이 있다면 모두 회주인 제게 있지요.”
방일화가 눈물을 글썽였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일화야. 모두 지나간 일이다. 나 역시 삼의맹과 영웅맹 무사들이 대패를 당한 이후 자책이 심했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부터가 아니겠느냐? 그보다 일 년 전 장사성 함락 때의 일을 좀 더 이야기해 보아라. 절대황녀와 황룡선생, 우문호 대협 등을 보지 못했느냐?”
“네. 그때는 저 역시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당시 저는 사부님께 적의 공격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성 밖 장사벌로 갔었지요. 그러지 않고 계속 성안에서 싸웠다면 저 역시 전사했을 거예요. 한데 아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중간지대 망부곡에 있는 석상들이 정말 무림인들이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상당수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하지만 이미 돌로 변했다는 것은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꼭 그렇지는 않다. 겉으로는 죽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귀식대법처럼 숨을 쉬지 않고 둔갑술을 펼친 것과 비슷하지. 다만 자의가 아니라 어떤 특수 대법에 의해 당한 것이기에 그 파훼법을 모르면 영원히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 같은 경우에도 지성자가 되면 회복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다. 천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지.”
“그렇군요. 저는 사부님께서 하루빨리 지성자가 되어 이 모든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성자만 되면 그 어떤 적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잖아요?”
“당연하다. 지성자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반선들이나 마신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제가 뭘 아나요? 전 사부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제 복장사회도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걸릴 것도 없어요.”
“으음, 그래도 네가 나보다 무림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의견을 말해보아라. 당금 천하에 복장사회 말고도 놈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이 있긴 하겠지?”
“네. 물론이에요. 하지만 다른 성의 상황은 여기보다 더 좋지 못하다고 들었어요. 정파 무림이 멸망한 이후 많은 무사가 은거에 들어갔다고 해요. 구심점이 없는 한 그들을 모으기 힘들 거예요. 다만 한 달 뒤 낙양에서 열리는 영웅대회 때는 최소한 한 곳 이상의 저항세력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요. 이번 일이 없었다면 제가 이끌었던 복장사회 역시 낙양으로 가서 기회를 엿볼 계획이었으니까요. 다른 곳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으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 역시 낙양으로 가봐야 할 것 같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제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이곳 장사성을 탈환한 후 북상하는 것을 처음에 생각했지만, 이제는 병력이 없으니 곧바로 낙양으로 가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사부님의 능력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늘 실패를 했던 사람이다.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단다.”
“아니에요. 당금 강호에 사부님 같은 절대강자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 증거가 바로 짧은 시간 안에 천축무맹 무사 일만 명을 제거하신 일이에요. 생각 같아서는 기세를 몰아 장사성을 탈환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놈들의 지휘부에서 경계할 거예요. 그러니 꾹 참고 낙양 영웅대회 때 사부님께서 놈들을 모조리 제거해주셨으면 해요.”
방일화가 눈을 빛냈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백자안의 무공은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아져 있었다.
백자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들으니 서장무맹과 천축무맹 무사들이 모두 합쳐 삼백만 명이나 된다던데, 어찌 나 혼자서 놈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겠느냐? 다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 일단 이곳 장사성 탈환은 뒤로 미루고 낙양으로 가도록 하자.”
“네. 사실 어차피 장사성에 있는 천축무맹 무사들도 대거 영웅대회에 참석할 거예요. 서장무맹과 세 대결을 벌여야 하니 전원이 참석할 가능성도 배제 못 해요.”
“다른 성도 마찬가지 상황이냐?”
“네.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이 이번에 확실히 주도권 싸움을 할 모양인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이놈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면 좋을 텐데······.”
방일화가 아쉬워했다.
복장사회주로 있을 때 줄곧 생각하던 전략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종 대리권자 자리를 두고 양 맹의 맹주가 싸운다고 했었지? 황궁은 어느 쪽이냐?”
“황궁마신이 사부님께 소멸한 후 황궁은 중립을 취했어요. 한데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황제가 직접 황군을 이끌고 와서 이번 대결의 증인이 되어 준다고도 해요. 물론 그들 모두의 배후에는 반야마신이 있겠지요.”
“황군들이 온다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지. 이번 기회에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펼쳐 모든 적을 일망타진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바로 낙양으로 떠나도록 하자. 그러려면 미리 역용을 해두어야겠지.”
백자안이 능숙하게 다시 역용을 했다.
처음 보는 젊은이 모습이었다.
방일화 역시 역용을 했는데, 그녀는 남장을 했다.
백자안의 호위로 행세하면서 늘 곁에 있기 위해서였다.
“남장이 잘 어울리는구나. 일화 네가 내 옆에 있어서 든든하다. 낙양으로 가는 도중 틈틈이 무공을 지도해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사부님.”
방일화가 얼굴을 붉혔다.
이곳 동굴로 자리를 옮긴 후 곧바로 백자안으로부터 내공 치료를 받은 덕분인지 안색이 좋았다.
‘사부님과 이렇게 함께 지내게 될 줄이야. 너무 기쁜 일이다.’
방일화가 속으로 매우 기뻐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실 복장사회 무사들이 전멸했기 때문에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일화야. 그만 자자. 내가 입구 근처에 있을 테니 너는 안쪽에서 편히 자도록 해라. 아직 기혈순환이 매끄럽지 못하니 푹 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에요. 제가 경계를 서겠어요.”
“내 말을 듣도록 해라.”
“네. 사부님.”
방일화가 동굴 안쪽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백자안이 찾아낸 이곳 동굴은 이전에 누가 사용하던 곳으로 그 사람 역시 무림인이었던 것 같았다.
백자안은 입구 부근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회복운공에 들어갔다.
사실 그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천축무맹 무사 일만 명을 혼자서 제거하면서 적지 않은 내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극도로 피곤하지는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곳 장사성부터 시작해 놈들을 닥치는 대로 모두 제거하고 싶구나. 하지만 내 힘의 한계를 정확히 모르니 원래 계획대로 낙양에서 일망타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설사 그로 인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마음을 편히 하고 순리에 따르도록 하자. 그것이 나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