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장] 구중천심공 2
다시 석 달이 걸려 망부봉으로 돌아온 백자안은 조용히 초가를 둘러봤다.
중간지대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만 반년이 걸렸다.
이제 중간지대에 들어온 지도 일 년째.
물론 지난 석 달간 망부봉으로 돌아오면서도 천서 수련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구중천심공 경지를 2단계로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지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구중천심공을 마지막 9단계, 즉 구층까지 연마해야 했다.
백자안이 봉우리 위에서 끝없이 펼쳐진 중간지대를 보며 안색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것이 구중천심공 수련은 3단계부터 더욱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삼층부터 실전무공이 가능해지기 때문으로 이층에서 삼층으로 올라가기가 절대 쉽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삼층까지 구중천심공을 올리는 데만 적어도 삼 년이 걸릴 것 같다. 이후 사층부터는 수련 기간이 직전 단계의 두 배가 걸릴 것 같으니, 육 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작 사층에 도달하는 데만 지금부터 구년이란 세월이 걸린다는 말이 아닌가. 애초에 구중천심공 대성에 십년 정도 잡았던 것이 너무도 터무니없는 생각이었구나.’
백자안이 한숨을 쉬었다.
이전에 무저곡에서 오랜 기간 수련을 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 정도 세월을 두려워할 그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의 상황이 너무 급했다.
그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일 년 정도였다. 한데 이미 일 년이 지난 상황이 아닌가.
‘더 늦어지면 놈들의 지배가 공고화되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백자안이 그 자리에서 가부좌하고 앉아 궁리에 들어갔다.
아무리 신체가 늙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초조한 마음마저 달랠 수는 없었다.
‘모험이 필요하다. 무명폭잠공을 다시 한번 펼쳐 단숨에 구중천심공을 삼층까지 올린다. 이후 특수 이동대법을 펼쳐 이곳을 나간다. 무리수가 따르고 어쩌면 무공을 잃을 수도 있겠으나, 구중천심공 삼층에 도달한 상태라면 기적적으로 무림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단을 내렸기 때문일까.
그의 전신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일어났다.
하기야 지난 일 년 동안 그의 무공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기존에 습득했던 무공들을 거의 모두 완벽하게 연마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한 번도 실전에 사용하지 않은 무공이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무공을 알고 있는 그였다.
물론 그가 익힌 것은 무공만이 아니었다.
각종 비술도 수없이 많았다. 최근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동대법과 관련한 것이었다.
특히 천음반선에게서 받은 신선비급에는 그런 이동과 관련한 비술이 많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선계와 무림 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특수 이동대법이지만, 백자안은 그 이전의 기초적인 이동비술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조금 전 그가 구중천심공 삼단계에 이르렀을 때 중간지대에서도 특수 이동대법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바로 그 이론 때문이었다.
‘각종 이동대법의 최종 목표는 바로 우화등선이다. 우화등선 자체가 바로 신선이 되어 보다 자유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특수 이동대법은 그러한 연구의 과정에서 창안된 비술로, 그 과정에 이르는 길은 반드시 한 가지만은 아니다. 내게는 무명폭잠공이 있으므로 특수 이동대법을 폭발적으로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백자안이 잠시 고민한 후 곧바로 무명폭잠공을 펼칠 준비를 했다.
어차피 초가 안에는 가지고 갈 물건도 없었다.
‘모험을 해야만 비약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다. 무조건 무림으로 돌아가야 한다.’
백자안이 내공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순간, 망부곡에 있는 석상들이 생각났다.
지난 석 달간 여러 번 다시 생각해본 결과.
그 석상 중에 그의 가족을 비롯하여 악미미, 단목수련, 백리설아 등 많은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지성자가 되어야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향후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집착을 버리자. 모든 것을 마무리한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망부석들을 모두 사람으로 되살려낼 것이다. 그때까지만 참자.’
백자안이 입술을 한번 깨문 후 전격적으로 무명폭잠공을 일으켰다.
동시에 구중천심공을 일으켜 무명폭잠공과 연동이 되게 했다.
특수 이동대법까지 연동시킨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이동할 장소는 바로 무림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그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장사성이었다.
장사성으로 돌아가 과연 그에 의해 소멸한 황궁마신의 말대로 함락이 되었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전신에서 금빛 기운이 장엄하게 일어났다.
땅바닥에서부터 일어난 그 기운은 백자안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순간 이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특수 이동대법이었다.
‘무명폭잠공으로 인해 구중천심공이 삼층까지 올라갔다. 곧바로 특수 이동대법을 가동하는 것 역시 성공해 몸이 이동하고 있다.’
백자안이 매우 기뻐했다.
원래 중간지대 안에서는 특수 이동대법이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모험과 변형을 가하니 가능해진 것이었다.
얼마 후 마지막으로 백자안의 얼굴만 남았을 때.
몸뚱이는 벌써 이동이 끝났고 머리만 이동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적잖은 후유증이 올 것 같았지만 모험이 성공했다고 기뻐할 때 갑자기 예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휘우웅.
백자안이 정신을 잃은 것은 그 직후였다.
‘아아, 어떻게 되려고······ 으윽.’
* * *
백자안이 다시 깨어난 곳은 한 동굴 안이었다.
“으으······.”
백자안이 머리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백자안이 급히 동굴 안을 살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중간지대 망부봉에 있던 그가 아니었던가.
회오리바람 때문에 정신을 잃었지만, 계획대로 무림에 돌아왔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성공 여부를 알 수 없었다.
중간지대 안에도 이런 동굴은 무수히 많았다.
물론 그는 대부분의 날을 망부봉 위 초가에서 지냈다.
동굴에 가끔 들어가 수색을 하곤 했으나, 별 성과는 거두지 못한 기억이 있었다.
‘서둘지 말자.’
백자안이 동굴 밖으로 나가기 전 먼저 몸 상태를 점검했다.
무명폭잠공과 구중천심공, 그리고 특수 이동대법을 모두 무리하게 펼쳤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었다.
구중천심공은 삼층까지 도달해 있었으며, 별다른 후유증 없이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제 내성이 생겨 다시 무명폭잠공으로 구중천심공 경지를 올릴 수는 없게 되었지만, 의외로 아무 후유증도 발생하지 않았구나. 이게 다 그 회오리바람 덕분인가.’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무림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했지만 자신의 몸 상태 역시 매우 중요했다.
그에게는 강력한 적들이 무수히 많으므로 혼자서 그들 모두를 상대하려면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원래 이동대법의 목적지는 장사벌이었지만, 아무 곳이라도 좋으니 무림으로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백자안이 동굴 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입구에 접근하자 강한 햇볕이 느껴졌다.
“아!”
백자안이 탄성을 터뜨렸다.
동굴 밖은 숲속이었다.
하지만 중간지대와는 완전히 다른 평범한 곳이었다.
백자안은 본능적으로 무림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편법이 통하다니 운이 좋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지.’
백자안이 역용술을 펼쳐 또다시 평범한 한 젊은이의 얼굴로 바꿨다.
일단 현 강호의 정세부터 파악해야 했다.
지난 일 년간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황궁마신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없었다.
‘산 밑으로 내려가 보면 알겠지.’
백자안이 천천히 산에서 내려갔다.
* * *
“정파 무림이 멸망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러하오. 일 년 전 장사성에서 영웅맹 무사들이 전멸하면서 정파 무림의 맥은 완전히 끊겼소. 이제 무림은 천축무맹과 서장무맹이 흑도 무림인들을 수하로 거느린 채 양분하여 다스리는 상황이오. 한데 그대는 뉘시기에 무림의 일을 묻는 것이오?”
중년인의 물음에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객잔으로 호남성에 있는 형산 아래 있었다.
다시 말해 백자안이 처음 정신을 차린 곳이 바로 형산이었던 것이다.
형산 아래 있는 비교적 큰 마을인 이곳 정성촌(精誠村)에 백자안이 들어온 것은 해 질 무렵이었다.
백자안은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큰 객잔에 들어갔다.
어차피 하루는 투숙해야 했다. 어서 빨리 무림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백자안은 점소이의 소개로 무림인 한 명과 합석할 수 있었다.
백자안은 자신이 지난 일 년간 산속에서 홀로 폐관수련을 해왔다고 말하며 그간의 무림 동향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중년인은 처음에는 못마땅해했으나 백자안이 술값을 낸다는 말에 매우 기뻐하며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먼저 일 년 전 장사성이 천축무맹에게 함락된 것은 사실이었다.
소수의 무사들이 살아남았다고 알려졌으나, 아직 그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이는 황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려대로 절대황녀와 황룡선생이 이끌던 관군들은 전멸했다고 했다.
물론 그들 중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후 소식이 없어 모두 죽은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백자안이 망부곡에 있는 수백만 개의 석상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전투 후 소식이 끊기면 대부분 전사자로 처리되게 마련이지. 어쩌면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망부곡에 돌로 변해있을 수도 있겠구나. 적을 한꺼번에 중간지대로 보내버리는 비술은 마신들이 창안한 것인가. 전후 상황으로 봐서 천축무맹의 배후자인 반야마신이 벌인 소행일 가능성이 크구나.’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절대황녀와 황룡선생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은 두 사람 역시 망부곡에 있거나 다른 곳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황궁은 어떠합니까? 그곳 역시 마찬가지인가요?”
“물론이오. 절대황녀 세력이 소탕된 이후 새 황제에게 저항하는 사람이 전무한 실정이오. 각 성의 성주들 역시 마찬가지요. 하기야 일 년 전 새롭게 장사성주가 된 만상서생이 황궁마신과 동귀어진한 이후로 영웅의 씨가 말랐으니 어쩌겠소?”
중년인이 안타까워했다.
그는 창궁서생(蒼穹書生)으로 불리는 자로 낭인무사처럼 천하를 떠도는 무림인이었다.
“창궁서생이라고 하셨지요? 혹시 서생께서도 장사성 영웅대회에 참석했었습니까?”
“그러하오. 내 비록 영웅맹에 가입은 하지 않았으나 그들과 뜻을 같이했었소. 하지만 내가 영웅맹에 가입하여 놈들과 싸우려 하기 전에 전투가 끝나버렸소.”
“아! 직접 싸움을 보셨습니까?”
“그렇소. 내 눈으로 직접 보았소. 나는 당시 흑도인으로 변장하고 있었는데, 놈들의 공격에 영웅맹 무사들이 가루가 되어 소멸하는 것을 똑똑히 봤소. 누가 발출했는지 모르나 허공에서 붉은 광채가 한번 번쩍일 때마다 수천수만 명이 사라졌소. 그 모습이 마치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소.”
“아! 그랬군요.”
백자안이 다시 탄성을 터뜨렸다.
‘확실하구나. 영웅맹 무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중간지대로 보내졌다. 그러한 비술은 혹시 마신 중에서도 천마신이 창안한 게 아닐까. 그냥 죽일 수도 있는 것을 굳이 중간지대에 보낸 것 역시 수상하다. 나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망부석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나중에 강시와 비슷한 용도로 써먹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