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중간지대 2
“거절하겠소.”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황궁마신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너의 계획이 모두 무너졌는데도 승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다시 말하지만 장사성에 있던 영웅맹 무사들과 관군들은 전멸을 당했다. 물론 극히 소수가 살아남아 중간지대로 빨려 들어갔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그들 또한 죽은 것과 같다. 당금 천하에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네가 순순히 나를 따라가 천마신님의 봉인을 완전히 해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혹시 피를 모두 빼내면 죽을 것 같아 걱정하는 것이냐?”
“실력이 있는 자는 말이 없는 법이오. 그대는 여전히 본인을 두려워하고 있소. 실력이 있다면 그냥 강제로 데려가면 그뿐이 아니오?”
백자안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평온해졌다.
“네가 내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구나. 장사성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소. 귀하의 말대로 함락이 되었을 수도 있소. 아니면 처음부터 나를 속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귀하가 과연 나를 강제로 신선계로 데려갈 수 있느냐가 핵심이오. 만약 본인을 쉽게 데려갈 수 있다면 귀하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이오. 그 정도로 강자라면 구태여 거짓말을 해서 본인의 심기를 흔들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서불마신을 소멸시켰다고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느냐?”
황궁마신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당장에라도 공격을 퍼부을 기세였다.
백자안 역시 상황보검에 내공을 집중시켰다.
“어리석은 놈! 네놈이 진짜 천족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신선한 피가 필요해 최대한 다치게 하지 않고 데려가려 했더니, 기고만장하구나. 네놈에게 소멸된 서불마신의 무공은 우리 백대마신 중 가장 약했다. 고작 마신 한 명을 소멸시켰다고 이렇게 겁도 없이 배짱을 부리다니 어이가 없구나. 할 수 없이 죽여서라도 너를 데려가겠다.”
쏴아아.
황궁마신이 일장을 날렸다.
백자안이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혼동의 상황이었다.
정확한 상황도 모르고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꽈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진 전체가 요동을 쳤다.
이후 드러난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기세등등하던 황궁마신이 가루로 변해 소멸되어 있었다.
백자안 역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직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황궁마신을 일장에 소멸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불마신에 이어 황궁마신까지······ 혹시 내가 마신들의 천적인가.”
백자안이 숨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비록 황궁마신을 일장에 죽였지만, 그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내공이 삼할 정도는 남아 있다. 지금 상태에서 반야마신을 만나면 큰일이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절반 이상 회복했던 공력이 다시 삼할로 줄어들었다.
물론 영구히 소멸한 것이라 아니라 신간이 걸리겠지만 회복 가능성은 있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다. 근처에 놈들의 진영이 있을 것 같은데, 장사성 상황도 확인해야 하니 곧바로 성안으로 복귀하는 것도 생각해봐야겠다.’
백자안이 사방에 깔린 안개를 살폈다.
‘신선안개진이라 했던가.’
붉은 안개는 더욱더 짙어져 있었다.
안개에서 빠져나와야 진 밖으로 나가게 되는지, 내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상치 않다. 도무지 출구를 찾을 수 없구나.’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경공을 펼쳤다.
휙휙.
최대한 속도를 내어 진에서 빠져나가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치 몸 주위에 안개가 붙어 있는 듯 주위 모습은 그대로였다.
자욱한 붉은 안개.
백자안이 뱡향을 바꿔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휴우!”
백자안이 숨을 고르며 바닥에 앉았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안개 속에서 내공을 사용하면서 그 피로도가 매우 심했다.
아무래도 안개가 내공을 흩어버리게 하는 산공독 성질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더는 무리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빠져나가려 할수록 더욱 벗어나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백자안이 마음을 차분히 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자신이 진 안으로 들어와 황궁마신과 싸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최소한 반야마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듯했다.
‘차라리 일부러 잡혀가 천마신 그자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마신들의 원영이 연동이 되어 있어 그 숙주 격인 천마신만 제거하면 의외로 단번에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텐데······.’
백자안이 약간의 후회를 했다.
사실 장사성 상황에 대한 확인이 급하지 않았다면 순간적이지만 그런 계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으윽!”
마음이 조금 불안해지자 통증이 밀려왔다.
황궁마신에 당한 충격파가 뒤늦게 전해진 것이었다.
사실 정상대로라면 그 역시 황궁마신처럼 온몸이 가루로 변했어야 했다.
황궁마신과 그의 무공은 실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몸속에 완전히 용해되었다고 할 수 있는 천상여의주의 힘 때문이었을까. 내 몸이 버틴 것은 기쁜 일이지만 내상이 정말 가볍지 않구나. 삼할 정도 남았던 공력도 점점 흩어지고 있다’
백자안이 조식을 통해 흩어진 공력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신선안개진 때문에 그조차 힘들었다.
백자안이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어쩌면 이곳에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백자안이 그제야 진 안에 황궁마신 혼자만 있던 것을 떠올렸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진이었다면 서장무맹과 황군 역시 고수를 들여보냈을 것이었다.
‘내가 황궁마신마저 소멸시킬 것을 대비해 진을 폐쇄해둔 것인가.’
백자안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이번에는 경공을 펼쳐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안개의 성질을 느껴보려 했다.
그 순간 미세하지만 안개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자안을 중심으로 해서 동심원 모양을 이루어 빠르게 돌고 있는 것이다.
한데 백자안이 움직이면 그 고리 모양의 형태를 유지한 채 그대로 따라왔다.
백자안은 안개의 흐름이 마치 회오리바람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지난날 자신을 무저곡으로 데려다준 그 회오리바람.
백자안은 안개 밖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백자안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황궁마신이 소멸한 그때부터 흐름이 빨라졌다. 설마 지금 나를 신선계로 데려가고 있는 것인가. 황궁마신이 자신이 죽을 때를 대비해 안배해둔 때문인가.’
백자안은 급히 이전에 배웠던 신선비급 상의 여러 내용을 떠올렸다.
곧이어 그중에 지금 상황과 비슷한 비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아까 말한 중간지대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자안의 내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붉은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벗겨지는 것과 같았다.
백자안은 담담히 결과를 기다렸다.
아직 자신의 능력이 현 상황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어느 정도 운이 따른 것도 사실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신들을 함께 만나지 않고 따로 만난 사실이었다.
만약 서불마신과 황궁마신의 합공을 당했더라면 지금처럼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반야마신이라는 그자의 음모일 지도 모른다. 두 마신이 없어지면 무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마신이 바로 자신일 테니까. 나를 이용해 다른 마신들을 제거한 게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자가 아닐 수 없겠구나. 아마도 그 무공 역시 세 마신 중 가장 뛰어날 것이다.’
백자안이 안개가 걷히기 직전까지 했던 생각들이었다.
‘설마······.’
안개가 걷히자마자 백자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담담했던 마음이 조금씩 요동을 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대로 정말 이곳이 중간지대라면 그야말로 꼼짝없이 당하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 음모의 주동자가 누구이건 다시 무림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작은 죽음과도 같았다.
무림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던 신선계와 달리 중간지대는 그야말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곳이고 하지 않던가.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드러난 광경은 놀랍게도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이었다.
장사벌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
예감대로 다른 장소로 강제 이동된 것이었다.
다만 아직 속단할 것은 아니었다.
장사성에서 먼 곳으로 온 것은 맞았지만 중간지대가 아니라 신강이나 다른 외진 곳일 수도 있었다.
‘이곳이 어디지?’
백자안이 상황보검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정확히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신선안개진 내부보다는 나았다.
진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너무 답답했었다.
저벅저벅.
얼마나 걸었을까.
따가운 햇볕에 조금씩 지칠 무렵.
시야에 숲이 하나 보였다.
오아시스였다.
백자안이 경공을 펼쳐 숲으로 갔다.
숲에는 커다란 샘이 있었으며 기이한 나무들이 수북했다.
목이 말랐던 백자안은 목을 축였다.
하지만 숲속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표지판으로 보이는 거대한 비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중간지대>
“아!”
백자안이 탄식했다.
우려대로 중간지대로 들어온 것 같았다.
기이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치 손님을 환대하듯 비석 주위에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백자안의 몸을 감쌌다.
순간 백자안은 이 회오리바람의 촉각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전 그가 마적 떼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 무저곡에 데려다준 그 신비의 바람이었다.
백자안은 저항하지 않고 그 바람에 몸을 맡겼다.
그가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은 그때였다.
얼마 후 다시 깨어난 백자안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거대한 산맥이었다.
숲은 끝이 없었고 곳곳에 솟아있는 봉우리 또한 끝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제2의 신선계다. 이곳에 무림인들이 들어와 있다면 좋으련만······.’
백자안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실종되었던 무림인들이 정말 이곳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백자안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갇혀 있다면 일부러라도 이곳 중간지대로 들어왔어야 했던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이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생사가 걸려 있다는 마음으로 해결하면 길이 생길 것이다.’
깊은 숲속 어느 곳에 떨어진 백자안이 주위를 살피며 심호흡을 했다.
중간지대라는 글자가 적힌 비석을 보지 않았다면 신선계로 다시 들어온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비슷한 환경이었다.
‘신선계와 비슷한 모습이라 그런지 오히려 마음이 편하구나. 하기야 중간지대 역시 신선계 외곽에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일단 조심해야 할 것이 괴수와 요괴일 수도 있겠군.’
백자안이 천천히 숲속을 거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