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영웅맹 2
악양성이 백만 황군에 의해 점령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영웅대회를 하루 앞두고 우려한 일이 현실로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승상이 직접 온 게 확실합니까?”
백자안의 물음에 담대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성이 함락되기 직전 보내온 전서구에 따르면 소문대로 승상이 직접 출정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또 뭔가요?”
황룡선생과 함께 옆에 있던 절대황녀의 물음이었다.
“악양성이 무너지자 호남성의 다른 성들도 속속 투항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하루도 되지 않아 우리 장사성을 제외한 모든 성이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겁니다.”
“아!”
“으음······.”
탄식이 쏟아졌다.
악양성 한 곳만 내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성도인 이곳 장사성을 제외한 호남성의 모든 성이 투항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하기야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성주들이 재빨리 항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절대황녀가 체념한 듯 말했다.
황룡선생이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한 각지 성주들이 곧바로 배신하다니······ 우리가 악양성 방어를 포기하고 쉽게 놈들에게 내준 것이 패착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호남성 각지 성주들이 투항 의사를 밝혔다고 해도 아직 황군이 도착하지는 않았을 테니, 지금이라도 놈들을 공격하면 다시 우리 편으로 돌아설 수 있을 거예요.”
절대황녀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듯 불씨를 살렸다.
백자안은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성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절대황녀가 백자안을 쳐다봤다.
그녀를 비롯해 황룡선생, 담대선생 세 사람 모두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마지막 기대를 거는 모습이었다.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호남성 각 성의 기회주의적 반응은 어느 정도 예견된 바 있었습니다. 다만 실제 공격을 받기도 전에 투항 의사를 밝힌 것은 의외이긴 합니다. 우리가 호남성 내의 다른 성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장사성에 삼십만 병력이 있으니, 한 번 정도는 제대로 된 싸움을 벌여볼 수 있을 거예요.”
“공주님 말씀대로입니다. 게다가 어제 영웅맹 지휘부와 약조한 대로 황군이 이곳 장사성에 먼저 도착해 공격을 가해오면 지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악양성에서 이곳 장사성은 하루 이틀 걸리는 거리로 내일 영웅대회 때까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대회에 참석해 무림인들과 대책을 강구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 성주의 생각은 내일 대회 때까지 지켜보자는 건가요?”
“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이지만 황군 역시 서장무맹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대회전에는 섣불리 공격을 가해오지 않을 겁니다. 두 세력의 배후 모두 황궁마신이 있어서 이미 서로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고 있을 터. 현 상황에서 어느 곳이든 먼저 공격을 가해오면 그곳 역시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볼 것이기에, 아마도 대회가 끝난 후 합공을 가해올 가능성이 클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먼저 장사성을 점령해 자신들의 위세를 만천하에 떨치려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일 때.
무사 한 명이 취의청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오셨던 영웅맹 고수분들이 다시 오셨습니다.”
“어서 모시고 오시오.”
* * *
죽림거사, 천룡자, 광무대제 세 사람이 취의청에 모습을 드러내자, 어제와 같은 의례적인 인사는 생략한 채 곧바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악양성이 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죽림거사가 굳은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무거운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으로 와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미리 지원을 해주실 생각인가요? 하기야 서장무맹 놈들이 주둔해 있는 천자산보다 악양이 이곳 장사성과 가까운 거리이지요.”
절대황녀가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비록 호남성의 다른 성들까지 속속 투항하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영웅맹과 힘을 합쳐 반격을 가하면 악양을 수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다름 아니라 정식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죽림거사의 말에 절대황녀, 황룡선생, 담대선생, 백자안 네 사람 모두 놀랐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황룡선생이 언성을 높였다.
죽림거사가 얼굴을 붉혔다.
“오늘 새벽 황군 측에서 특사가 왔었습니다. 무림과 관부의 불간섭 원칙을 서로 지키자는 제의를 하더군요. 논의 결과 아직 귀측과 정식 동맹을 체결하기 전이라 지원 약속을 철회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미 수락 의사를 승상 쪽에 보냈다는 겁니까?”
“네. 특사가 돌아갔으니 우리 의사를 전달했을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무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영웅맹의 전력으로는 서장무맹 한 곳을 상대하기에도 벅찬 실정이라······.”
“불간섭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황군이 먼저 장사성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했군요.”
백자안의 말에 죽림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황군이 가져온 함선을 타면 반나절도 안 되어 이곳 장사성에 당도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아! 뱃길이라면 반나절 안에 당도할 수 있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무림십대고수인 여러분의 명성에 맞지 않게 이렇게 신의가 없다니 정말 실망이에요.”
절대황녀가 담담히 말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무림인사들에 의해 냉대를 받은 적이 있던 그녀였다.
물론 그녀 개인에 대한 냉대가 아니라 무림과 관부의 불간섭 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황룡선생이 말했다.
“한 가지만 여쭤봅시다. 황군의 배후에는 황궁마신이 있고, 서불마신의 소멸 후 서장무맹주 역시 황궁마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바 있습니다. 어차피 황군 역시 영웅맹을 공격하는데 가담할 거라는 뜻입니다. 설마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황군의 공격을 받게 되면 영웅대회는 무산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부득이 귀측과의 지원 약속을 파기하는 겁니다. 다만 영웅대회를 통해 맹주가 선출되고 전열이 정비되면 그때는 다시 귀측과 협력하는 방안을 강구하겠습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그래도 너무 실망이에요. 만약에 거꾸로 서장무맹이 먼저 공격을 가해온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약속을 파기한다고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상황이 불리해지면 먼저 약속을 파기하는 그런 소인배 같은 마음이라니 부끄럽지도 않나요?”
절대황녀의 질책에 죽림거사, 천룡자, 광무대제 세 사람 모두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저희 세 사람은 약속 파기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웅대회를 준비해온 백인고수회합에서 결정이 내려진 사안이라······ 계속 변명만 하는 것 같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내일 맹주가 선출되면 그분께서 이제 모든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니, 그분 의사에 따라 여러분과 다시 협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죽림거사를 비롯한 세 명이 인사한 후 관아를 떠났다.
백자안, 절대황녀, 황룡선생, 담대선생 네 사람이 대책 회의를 열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어이가 없군요. 무림인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살피다니, 무림만 지키면 황궁은 어찌 되어도 좋다는 생각 같습니다.”
담대선생이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당장 대책이 시급했다.
영웅맹과의 동맹이 실질적으로 물 건너갔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단독으로 악양에 무사를 보내 놈들과 싸우는 것은 무리일까요?”
절대황녀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황룡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성이 함락되기 이전이라면 적은 병력으로 놈들을 막아낼 수 있지만, 지금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놈들이 남진할 때 함선을 타고 올 것 같은데, 우리에겐 그만한 배도 없는 실정입니다.”
“그럼, 여기서 그냥 기다리자는 건가요?”
“지금으로서는 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영웅맹과의 동맹이 어려워졌지만 대신 놈들의 공격이 하루 정도 늦춰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악양에 있는 승상 세력이 최소한 영웅대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황룡선생의 말에 절대황녀가 안색을 조금 풀었다.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내일 대회 때 동맹 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는 셈이 되지 않을까요?”
절대황녀가 말을 하며 백자안을 쳐다봤다.
백자안은 잠시 뭔가를 생각 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주님. 다만 놈들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놈들의 목적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겠지요. 영웅대회가 열리면 숨어 있던 무림인들이 대거 모일 테니까. 어쩌면 우리는 놈들의 음모에 휘말리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대회에 참가할 수밖에 없을 듯하군요. 만에 하나라도 이번에 선출될 영웅맹주가 우리와 뜻을 같이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영웅맹의 새 맹주가 항복을 선택한다면 그날로 모든 게 끝날 겁니다. 무림세력은 그대로 해체되고 남은 것은 우리인데, 황군이 그때 장사성으로 진격하게 되면 속수무책일 겁니다.”
“그 말씀은 혹시 놈들이 영웅맹주 자리를 노릴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종합해봤을 때 그런 예감이 듭니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든다면 이전에 정심회 반선들이 자주 언급한 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목표인 우화등선에 도움이 되도록 우리 무림인들을 대리 통치하겠다고. 이상향을 건설한다고 표방하지만 사실 그 실체는 아무도 모르지요. 사실 통치를 하기 위해선 무림인들이 필요하긴 합니다. 반대 세력을 무조건 죽여 버린다면 통치대상인 무림인들이 모자라게 되겠지요. 그 때문에 놈들이 보낸 자가 영웅맹주 자리를 차지한다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이전에 몇 번 시도되었던 바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리 통치 주장은 정심회 반선들이 먼저 한 게 아니었던가요? 신선계 문이 닫혀 있는 지금도 유효한 주장인가요?”
“신선계 문이 다시 열렸거나 조만간 열리게 된다면 말이 되지요. 정심회 반선들이 황궁마신이나 반야마신에게 부탁해 자신들 중의 한 명이 영웅맹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수도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상태에서 정심회 반선들까지 무림에 오게 되면 그야말로 모든 게 끝나겠군요. 다만 놈들이 영웅맹주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성주의 예상이긴 하지만, 특별한 대책이 있나요?”
“네. 외람되지만 내일 제가 영웅맹주 자리에 도전해보려 합니다. 놈들의 음모를 와해시키고 무림과 관부가 힘을 합친다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생길 수 있을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일 듯합니다. 공주님.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좋아요. 적극적으로 지원해드리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