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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171화 (171/250)

[제55장] 만상문 3

깊은 밤.

절대황녀 등을 만나고 객방을 배정받은 백자안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옆방에는 방일화가 묵고 있었다.

방 두 개를 배정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자안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향후 대책 때문이었다.

일단 영웅대회 개최 소식을 듣고 서둘러 오긴 했으나, 뚜렷한 대책은 없었다.

‘난감하구나. 지금 내 몸 상태로 무림과 황궁 어느 한쪽도 쉽게 수습한다는 보장이 없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것이 성한 상태에서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 많았다.

서장무맹 무사만 해도 그동안 서장에서 다시 후발 병력이 당도해 백만을 훌쩍 넘고 있었다.

황궁 역시 백만이 넘었다.

모두 이백만이었다.

하지만 백자안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마신들이었다.

‘어쩌면 이번 싸움에 반야마신 역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천축무맹주 역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사들을 이끌고 남하할 수 있지 않을까.’

백자안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그의 예상대로 서장무맹 무사들까지 가세한다면 적의 병력은 무려 삼백만이었다.

게다가 백자안이 상대해야 할 마신의 수도 두 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새 황제가 된 승상이란 자의 무공 역시 무시 못 할 수준이라 들었다. 어쩌면 서장무맹주나 천축무맹주보다 더 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부좌를 한 백자안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조금씩 스며드는 불안감을 다스리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하지만 선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생각을 하지 않았던 또 다른 불안요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신선계에 있는 정심회 반선들과 백대마신이었다.

‘천음반선님이 계획대로 천마신을 소멸시켰을까. 아니다. 반야마신과 황궁마신이 건재한 것으로 봐서 아직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만간 신선계 문이 다시 열릴 때 천마신을 비롯한 백대마신이 무림에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만여 명의 정심회 반선들 역시 마신들의 앞잡이가 되어 무림을 제멋대로 주무르려 할 것이다.’

마신들과 정심회 반선들을 생각하자, 백자안의 마음은 더욱더 초조해졌다.

은둔회 반선들 소식을 전혀 모르는 지금 그에게는 조력자가 거의 없었다.

사실 현재 제자로 거둔 방일화뿐이라 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영웅대회 때까지 내 무공을 반드시 높여놓아야 한다. 단순히 내상을 회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최후의 순간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무공이라는 것이 마음먹는다고 바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두를수록 퇴보하는 게 무형검의 경지가 아니던가.

‘내 기억 속에는 아직 완전히 연마하지 않은 무공이 무수히 많다. 하지만 마신들과 반선들을 혼자서 상대하려면 획기적인 무공이 필요하다. 깊은 깨달음이 내재한 절대무공. 그런 것이 있다면 좋으련만······ 무공이 없다면 바로 진정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법문이라도 없을까.’

백자안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지름길은 없다. 조급한 마음에 내가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없는 길을 요행으로 찾으려 하다니. 차라리 없음을 받아들이고 백지상태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가만 백지라면······.’

백자안이 뭔가가 떠오른 듯 몸속에 있던 비급 한 권을 꺼냈다.

바로 무자천서였다.

제목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 지금까지 거의 보지 않던 것이었다.

하지만 문득 생각이 떠올라 다시 한번 확인해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특이점은 없었다.

‘하기야 무자천서에 기대를 거는 것 또한 욕심이겠지. 하지만 분명 아무 의미 없는 비급은 아닐 것이다. 잠도 안 오는데 이 무자전서를 연구해봐야겠다.’

백자안이 무자천서를 한 장 한 장 펼쳐서 다시 한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비급의 겉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나마 겉면에는 ‘무자천서’라는 제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자가 없는 하늘의 책이라. 글자가 없다는 것은 바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불립문자란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언어나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백자안은 비급 내용을 살펴보는 것을 그만두고 이 불립문자에 대해 묵상을 하기 시작했다.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 비급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천서, 즉 하늘의 책이라는 것 역시 대자연의 힘을 뜻할 터.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믿으면 대자연지도(大自然之道)를 이룰 수 있다는 암시가 아닐까. 대자연이라······.’

눈을 감고 있는 백자안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무수한 가능성이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이 달랐다.

정말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 뭔가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뭔가 좋은 예감을 느끼며 현재에 좀 더 집중했다.

마음의 눈으로 봤을 때 멀리서 빛무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좀 더 다가오면 그 실체를 알 수 있으리라.

그 실체는 바로 백자안이 찾고자 하던 진리(眞理)였다.

‘진리는 곧 참나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면 생사에 초연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백자안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질 바로 그때였다.

성주가 자고 있는 전각 쪽에서 다급한 소리가 났다.

“자객이다!”

“성주님이 암살당하셨다! 놈을 잡아라!”

백자안이 방문을 열고 객당 밖으로 나간 것은 그 직후였다.

휙휙.

백자안이 경공을 펼쳐 성주 처소 쪽으로 날아갔다.

얼마 후 도착한 성주 처소 주위는 그야말로 시산혈해였다.

백여 명의 관군들이 자객 한 사람에 의해 난도질을 당해 있었다.

성주 처소를 호위하던 관군들을 모조리 죽인 자객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이미 장사성주 유관성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 그는 그대로 도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좀 더 경고를 보내기 위해 일부러 잠시 머문 후 몰려드는 관군들을 모조리 죽인 것이었다.

백여 명의 관군들을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은 실로 찰나였다.

성주 처소에서 제법 떨어진 객당에 있던 백자안 역시 최대한 일찍 도착했으나 그사이에 학살을 마친 것이었다.

스스슷.

백자안이 말없이 복면자객 앞을 막았다.

막 경공을 펼쳐 달아나려던 자객이었다.

더 지체하면 관아에 주둔하고 있는 관군들이 모두 모여들 수 있었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죽는다.”

자객이 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원래는 곧바로 백자안의 목을 쳐야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세에 눌린 탓에 그러지 못했다.

“성주님을 죽였소?”

“하하하. 그렇다. 역적 놈 하나 죽인 게 뭐 대수라고.”

“귀하의 신분을 밝히시오. 나는 만상문주 만상서생이라 하오.”

“네놈이 알 것 없다. 단지 나는 역모에 가담한 장사성주를 죽여 다른 성의 성주들에게 본보기로 삼게 하려고 온 것이다.”

“승상이 보냈소?”

“황상 폐하를 말하는 것이냐? 아직도 폐하를 승상이라 부르는 놈이 있다니.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역시 승상이 보냈군.”

“이놈! 봐주려고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군.”

자객이 검을 곧바로 찔러 들어왔다.

슈우욱!

지독한 쾌검이었다.

백자안이 우수를 들어 일장을 날렸다.

꽈아앙.

폭음과 함께 자객이 들고 있던 검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백자안이 자객의 맥문을 잡은 것은 그 직후였다.

“으윽!”

“어서 말해라! 누가 보냈느냐?”

“으으······ 황상께서······ 으윽!”

자객이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져 즉사했다.

그의 칠공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무서운 대법이군. 적에게 정보를 누설하면 자동으로 고독이 발동되어 즉사하게 되어있었다. 무공으로 보면 전문살수 같은데······.”

백자안이 중얼거리는 순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관군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관군 중에는 급히 달려온 절대황녀와 황룡선생도 있었다.

백자안으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들은 그들은 곧바로 성주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백자안 역시 따라갔다. 자객의 말대로 장사성주 유관성은 목이 없는 시체로 변해있었다.

“아!”

“성주님!”

관아 지휘부 인물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놀라움과 탄식이 쏟아졌다.

자객이 백자안에 의해 죽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경계망이 뚫린 후 성주가 죽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자객의 의해서.

게다가 백여 명의 호위관군들 역시 떼죽음을 당했다.

다들 불안감이 높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관아 밖 순찰을 하러 갔다가 뒤늦게 온 장사성 총관 담대선생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성주님! 흑흑!”

“성주님!”

관군들 역시 성주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찌! 이런 일이······.”

절대황녀가 황망해했다.

죽은 유관성은 비록 무공은 약하나 천하 각지 성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러한 그가 자객에게 암살당함으로써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제 승상에게 감히 대항할 성주들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성주님의 복수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대선생이 정식으로 백자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제가 늦게 와서 성주님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보낸 자객이었을까요?”

절대황녀의 물음에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승상이 직접 보낸 자객 같았습니다.”

자객이 죽기 전 한 말을 백자안이 사람들에게 해주었다.

황룡선생이 말했다.

“공주님.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즉시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무슨 대책을 말인가요?”

“곧바로 새 성주를 임명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관군들의 동요가 심할 겁니다. 이장락 대장군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대장군은 관군들을 이끌고 정탐을 나갔습니다. 놈들의 선발대가 은밀히 우리 장사성 인근까지 왔다는 첩보가 있어서······.”

담대선생의 말에 황룡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즉시 사람을 보내 대장군을 불러들이십시오.”

“네.”

담대선생이 무사를 시켜 이장락에게 전서구를 보낼 것을 지시했다.

절대황녀가 말했다.

“이 대장군을 신임 성주로 임명할 것을 제게 추천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제가 추천하는 사람은 바로 만상서생입니다.”

황룡선생이 백자안을 가리켰다.

백자안 옆에는 조금 전 도착한 방일화가 함께 있었다.

“저 말입니까?”

백자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갑자기 자신보고 성주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결정 권한을 가진 절대황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뭔가요? 관군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라면 저 역시 새 성주를 곧바로 임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분 만상서생은 서로 안 지 얼마 되지도 않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공이 강합니다. 성주를 살해한 자객은 무공이 매우 높은 자였습니다. 그런 그를 만상서생이 제거했습니다. 앞으로 놈들이 계속 자객을 보내 신임 성주를 죽이려 할 텐데, 그때마다 새로 성주를 임명하실 겁니까? 두 번째는 이번에 자객을 제거함으로써 만상서생의 신원이 확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간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지금 만상서생보다 더 적합한 성주감은 없습니다.”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요. 만상서생께 물어보겠어요. 성주 자리를 맡아주시겠어요?”

“외람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사정상 장사성에만 지낼 수 없어서······.”

“그럼 황군들이 물러날 때만이라도 임시로 맡아주세요. 이렇게 제가 부탁드리겠어요.”

절대황녀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첫 대면에서 그녀가 백자안을 조금 경계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신원이 확실해져 같은 편이라는 것이 증명되자, 신임하는 마음이 커진 것이었다.

백자안이 황급히 반례한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계획은 이번 영웅대회 때 무림과 장사성에 있는 관군들을 합쳐 단일세력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성주가 되면 승상에 저항하는 세력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웅대회 때 새롭게 결성될 맹의 맹주 자리를 맡는 데는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백자안이 고민하자, 황룡선생이 말했다.

“만상서생! 고민이 된다면 이렇게 하시오. 언제든 성주 자리에서 자유롭게 물러날 수 있도록 공주님이 미리 허락하시면 되지 않겠소?”

“좋은 생각이에요. 성주 자리를 맡게 된 후 언제든 그만둘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그래도 안 되겠어요?”

“아닙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좋아요. 지금부터 만상서생 그대를 장사성주로 임명하겠어요.”

“성주님을 뵙습니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담대선생을 비롯한 관아 주요 인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졸지에 성주가 된 백자안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능력이지만 성주로서 성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울러 공주님을 보필해 황위를 찬탈한 역적의 무리 또한 반드시 제거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절대황녀가 미소를 지은 후 황룡선생에게 일러 보검 한 자루를 가져오게 했다.

금빛이 찬란한 그 보검은 상황보검(上皇寶劍)이었다.

“이 상황보검을 성주에게 하사하니 역적들을 모조리 토벌해주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백자안이 무릎을 꿇은 후 상황보검을 받았다.

안 그래도 보검이 필요했던 그였다.

황룡선생이 말했다.

“그 상황보검은 보검 중의 보검으로 그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면 능히 산을 가른다고 전해집니다. 아무쪼록 천하 창생을 위해서 큰 공을 세워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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