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적 반로환동-162화 (162/250)
  • [제52장] 천축무맹 3

    “으음······.”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수색대주의 말대로 자신의 가족이 화를 당했다면 그야말로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색대주 역시 단지 추측으로 하는 말이라 크게 동요되지는 않았다.

    백자안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수색대주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왜 네놈 질문에 꼬박꼬박 답해주고 있는 것이지? 뭣들 하느냐? 저놈을 죽여라.”

    “존명!”

    지시를 받은 서장무맹 무사들이 포위망을 좁혔다.

    하지만 백자안의 기도에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바로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용기를 낸 서장무맹 무사 한 명이 검을 휘둘러 백자안의 목을 베어갔다.

    슈우욱.

    단순해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매우 빠르고 간결했다.

    개개인의 무공이 중원 무림인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

    스스슷.

    백자안이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 검을 피했다.

    동시에 지풍을 날려 공격을 가한 무사의 이마를 꿰뚫었다.

    “크윽!”

    서장무맹 무사가 비명과 함께 쓰러져 즉사했다.

    백자안이 허공섭물로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웠다.

    순간, 동료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서장무맹 무사들이 오히려 전체적으로 달려들었다.

    합공을 가해야만 백자안을 죽일 수 있다는 데 공감을 한 것이었다.

    백자안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미 적들을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동안 수없이 많은 양민이 그들의 손에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달간 정신을 잃고 있었던 터라 혹여 아직 무공을 펼침에 무리가 없는지 조금 걱정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고수가 없는 서장무맹 무사들이었다.

    백자안이 몇 번 검을 휘둘러 대여섯 명의 목을 벤 후 지존금광을 발출했다.

    번쩍.

    금광이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나가며 서장무맹 무사들의 몸이 터져나갔다.

    “크윽!”

    “으윽!”

    비명들이 잇달아 터져 나오며 한편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제 백여 명의 서장무맹 무사 중 살아남은 사람은 수색대주 한 명뿐이었다.

    “네······ 네놈은 누구냐?”

    수색대주가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백자안이 뿜어낸 무형지기에 의해 도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 말이오? 내 이름은 백자안이오.”

    “헉!”

    수색대주가 매우 놀라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다. 네놈들 손에 죽어간 양민들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발 목숨만······.”

    수색대주가 머리를 땅바닥에 찧으며 다시금 애걸했다.

    백자안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순간, 수색대주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대로 축 늘어졌다.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독단을 깨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았다.

    백자안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좀 더 다가갔다.

    그때였다.

    죽은 줄 알았던 수색대주가 입을 벌렸다.

    순간, 입속에 감춰두었던 암기 하나가 빠르게 백자안의 목으로 날아왔다.

    그야말로 예기치 않았던 공격이었다.

    애초 수색대주에게는 이런 식으로 구명절초를 날리는 특기가 있었다.

    상대가 백자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지막 희망으로 속임수를 사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자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들고 있던 검으로 암기를 쳐냈다. 암기가 다시 돌아가 수색대주의 목에 박혔다.

    “크윽!”

    수색대주가 비명과 함께 이번에는 진짜 피를 토하며 그대로 즉사했다.

    얼굴 전체가 시퍼렇게 변한 것이 아무래도 극독에 당한 것 같았다.

    백자안은 시체들을 한번 쳐다본 후 삼매진화를 일으켜 모두 태워버렸다.

    혹시 나중에라도 서장무맹 쪽의 지원 병력이 이곳으로 올 것을 대비해 아예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었다.

    그다음 백자안이 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이주한 장소로 가면서 그들의 행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새 터전 주위에 보호진을 쳐둔다면 마음 놓고 내가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부득이 하루 이틀 정도는 더 그들과 함께 있어야겠군.’

    * * *

    백자안이 산 아래로 내려온 것은 사흘 후였다.

    청성촌 양민들의 새 터전에 도착한 그는 계획대로 주위에 보호진을 쳐둔 후 그 활용법을 가르쳐주었다.

    비교적 난해한 진법이라 습득에 어려움이 조금 있긴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머리가 총명한 방일화가 사흘 만에 진법을 완전히 습득하자, 백자안은 마음을 놓고 산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한 것은 물론이었다.

    특히 그가 혼자서 백여 명의 서장무맹 무사들을 해치웠다는 소식에 어떻게든 잡아두려 했다.

    하지만 백자안으로서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몸 상태가 절반 이상 회복된 것을 확인한 그는 마을 사람들과 작별했다.

    다만 방일화에게 진법 외에도 몇 가지 무공을 함께 가르쳐 후일을 대비했다.

    방일화는 기뻐하며 열심히 배웠다.

    단 사흘이지만 그녀의 습득 속도는 매우 빨랐다.

    백자안 역시 매우 놀라며 비급을 만들어 그녀 혼자서 깨우칠 수 있도록 했다.

    백자안이 전수한 무공은 대부분 여인만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그밖에 백자안은 자신의 내공 일부를 그녀에게 넣어줘 고수가 될 수 있는 기반까지 만들어주었다.

    수수한 겉모습과 달리 평소 무공에 관심이 많았던 방일화는 열심히 연마할 것을 다짐했다.

    백자안이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마을 사람들을 지키라는 뜻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자안은 훗날 무림에 평화가 찾아오면 꼭 한번 들르겠다는 약속을 하며 떠났다.

    “으음, 다시 이곳으로 왔군.”

    백자안이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서장무맹 무사들과 싸웠던 청성벌이었다.

    벌판의 모습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주위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길이 나 있었다. 이제 백자안이 그 행보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

    ‘청성산으로 가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놈들부터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성도에 가서 놈들의 지휘부를 제거할 것인가. 몸이 아직 절반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니, 일단 성도로 잠입해 놈들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 좋겠구나. 성도에서 일이 벌어지면 사천성 각지에 있는 놈들의 다른 병력 또한 몰려올 것이다. 일단 서장무맹 놈들부터 완전히 척결한 후 낙양으로 가서 천축무맹 놈들을 처리한다.’

    백자안이 우선순위를 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낙양으로 가서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어차피 특수 이동대법 자체가 어려웠다.

    ‘으음, 따로 다시 역용할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그래도 모르니 노인으로 역용하는 것이 좋겠다.’

    백자안이 검을 몸속에 보관한 후 다시 역용술을 펼쳐 칠십 대 노인으로 모습을 바꿨다.

    서장무맹 치하에 들어간 성도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분명 성도 내에서도 최소한의 저항 세력은 있을 것이다. 그들을 찾아 현 상황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운이 좋으면 그들을 통해 낙양 상황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휙휙.

    백자안이 지존비를 펼쳐 빠르게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물론 성도였다.

    * * *

    백자안이 성도 안으로 들어간 것은 해 질 무렵이었다.

    관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는 것은 이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곳곳에 서장무맹 무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무사들은 관부 소속이었지만, 무림과 관부의 불간섭 원칙 때문인지 서장무맹 무사들의 행동에 제약은 없어 보였다.

    백자안은 관부 무사들을 보며 잠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바로 절대황녀였다.

    자신이 백자안이란 사실을 알고 놀라면서도 매우 기뻐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제의 긴급한 명을 받아 황룡선생과 함께 십만 황군을 이끌고 황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전 대인자문과 달리 아직 황궁에서 서장무맹이나 천축무맹의 침공에 대해 이렇다 할 견제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구나. 하기야 대인자문은 왜구의 배후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어 명분이 있었지. 하지만 현 상황에서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역시 황궁이다. 당시 긴급히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뭐였을까? 황궁에서도 시급한 일이 발생해 이를 처리하기도 벅차다면 무림의 일에 관여하기는 더욱더 어려울 것이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절대황녀의 도움을 생각했었지만 일단 먼저 요청하는 것은 미루기로 했다.

    지난번의 경우를 보더라도 황궁 자체 판단으로 필요하면 개입할 가능성이 컸다.

    사실 백자안 역시 관부와 무림의 불간섭 원칙을 지지하고 있었다.

    ‘무림의 일은 무림인 스스로 해결하는 게 원칙이긴 하지. 많은 문파가 멸문을 당했지만, 여전히 무림의 저력은 막강하다. 중원무맹과 마교, 그리고 동방무맹 이 세 곳의 고수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에 처하면 숨은 영웅이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니,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멀리 보자. 사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도 근원적으로 보면 신선계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백자안이 자책했다.

    신선계에서 천음반선을 만났을 때 뭔가 조처를 해야 했다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관심사는 신선계보다 무림에 있었다.

    물론 무림에 돌아와 삼혈맹을 제거하는 공을 세웠으나, 정심회 반선과 마신 부활을 막지 못해 이 지경이 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를 더욱더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함께 싸울 동료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공식적으로 중원무맹과 마교, 동방무맹 무사들은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소문이 맞는다면 불과 수천 명만 살아남은 상태이고, 이마저 지금쯤 뿔뿔이 흩어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사천성과 하남성을 제외한 다른 성들의 상태다. 중원무맹 무사들이 궤멸상태에 달했다고 해도, 각 성의 토착 무림세력은 있을 터. 지금 그들이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의 침공에 대비해 필사적인 저항을 준비하고 있겠구나.’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객잔 한 곳으로 들어갔다.

    객잔 인근에서 순찰하던 서장무맹 무사 십여 명이 그를 쳐다봤으나 이내 고개를 돌렸다.

    백자안 역시 애써 그들을 무시하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 안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대부분 흑도 무림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혈교와 사사천교를 종주로 삼고 활동하는 자들이었다. 혈교와 사사천교가 패망한 이후 음지로 숨어있던 그들은 다시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서장무맹과 천축무맹 또한 그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벌써 많은 흑도 무림인들이 양 맹의 앞잡이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백자안 역시 그 점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다만 서장무맹과 천축무맹 두 곳 모두 중원무림 침공의 시작에 불과하므로 체계적인 영입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뭘 드릴까요?”

    “소면과 닭 한 마리, 그리고 죽엽청을 가져오게.”

    “네.”

    점소이가 주방으로 달려갔다.

    손님이 많지 않은 지금 한 명 한 명에게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얼마 후 음식과 술이 나오자, 백자안이 은자를 주며 물었다.

    “몇 가지 물어보겠네. 대답해줄 수 있겠나?”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점소이가 은자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속에서 오래도록 있다가 강호에 오랜만에 나왔는데, 세상이 많이 변했군. 그래 지금 성도 무림은 서장무맹이 완전히 장악했나?”

    “네. 어르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성안이 대학살장을 방불케 했지요. 말 그대로 시체가 산을 이루었습죠.”

    점소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혹시 서장무맹 무사가 객잔 안으로 들어올까 봐 겁을 냈다.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해 보게. 그래 성안에 저항하는 무림인이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있기야 있지요. 당문과 아미파, 청성파의 생존자들 중심으로 수백 명 정도 모여 모처에 숨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서장무맹 쪽에서 그들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지요.”

    “으음, 역시 그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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