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적 반로환동-153화 (153/250)
  • [제49장] 강시왕 3

    깊은 밤.

    백자안은 지존각 집무실에서 조용히 묵상에 잠겨 있었다.

    그가 거주하고 있는 지존각은 중원무맹주 처소이기도 하지만 삼의맹주 처소이기도 했다.

    중원무맹과 마교, 동방무맹 지휘부 고수들의 합의로 중원무맹 총단을 삼의맹 총단으로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리적으로도 신강과 동방 중간에 있는 이곳 낙양에 삼의맹 총단을 두는 것이 옳았다.

    백자안의 안색은 비교적 무거워 보였다.

    대인자문 강시들을 제거하고 사흘이 지나 오늘 낮에는 작전 회의까지 열었다.

    그 결과 정심회 반선들과의 전면전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지시했지만, 마음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었다.

    ‘허허반선 등 정심회 반선들이 그대로 돌아간 것도 조금 이상하긴 하다. 천상여의주 또한 천계 법보였단 말인가. 하지만 당시 백여 명의 반선들이 합공을 가했다면, 나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당시는 급박한 상황이라 미처 몰랐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분명 있었다.

    ‘하기야 가장 이상한 것은 내가 반로환동을 하고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점이지.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안배였다면······.’

    백자안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무저곡에 떨어진 순간부터 이상했지. 나를 무저곡 밑으로 날려준 회오리바람은 대체 어디서 불어온 것일까. 혹시 그 모든 것이 천계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정말로 천족의 후예라면 그 모든 것이 설명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백자안이 천족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천족의 후예라는 말을 여러 번들은 그였다.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추측했지만 역시 한계가 분명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 언젠가 의문이 풀릴 때가 있을 것이다. 아니 굳이 의문을 풀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인간의 삶 자체가 신비인 것을······.’

    백자안은 될 수 있는 한 마음을 넓게 가지려 했다.

    그것은 사심(私心)을 없애는 일이었다.

    무사심(無私心).

    지금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경지 중 하나였다.

    백자안이 몸속에 두었던 천상여의주를 다시 꺼냈다.

    여전히 변색되어 있었다.

    지난 사흘간 그의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한 것도 사실 이 천상여의주 때문이었다.

    이전처럼 의념을 통해 어떤 응답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그 생명을 다한 것 같았다.

    ‘예로부터 구슬이 빛을 잃으면 불길한 징조를 나타낸다고 했던가. 어쩌면 신선계에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겠구나.’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이전처럼 낙담하는 눈빛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그때였다.

    천상여의주에서 금빛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백자안이 매우 기뻐했다.

    마치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듯 기쁨이 매우 컸다.

    그 사이 천상여의주는 이전의 영롱한 빛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때였다.

    다시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천상여의주에 한 사람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천상여의주 자체가 작아 매우 작은 얼굴이었으나, 백자안의 시력으로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백자안이 급히 그 얼굴의 주인을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천음반선이 아닌가.

    “천음반선님!”

    백자안이 소리치자, 천상여의주 안에 비친 천음반선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백 공자의 얼굴이 보이는구려. 내 얼굴도 보이시오?”

    “네. 반선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사흘 전 천상여의주가 한번 빛을 잃은 적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네. 맞습니다. 대인자문 강시들의 수가 너무 많아 천상여의주가 빛을 잃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원래 빛을 회복했습니다.”

    “아마 그럴 것이오. 회복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실례지만 반선님은 지금 무엇을 통해 제 얼굴을 보고 계십니까?”

    “또 하나의 천상여의주요. 원래 천상여의주는 한 쌍이었소. 하나는 우리 은둔회 쪽에서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행방이 묘연했소. 한데 알고 보니 백 공자가 가지고 있었구려. 천상여의주 한 쌍은 서로 영기가 통해 마치 신선경처럼 서로를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징이 있소.”

    “아, 그렇군요. 한데 허허반선 그자가 말하기를 이 천상여의주 또한 천계의 법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소. 상고시대 천계와 마계의 전쟁 당시 신선계가 그 주된 전장이 되었었는데, 그때 많은 법보들이 사라졌소. 천상여의주는 그때 사라졌던 법보 중 하나로, 이제야 한 쌍이 모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오.”

    “그렇군요. 그보다 지금 신선계 상황은 어떠합니까? 은둔회가 정심회 공격을 받았습니까?”

    “그러하오. 은둔회 반선 백여 명이 모두 죽고 나 혼자 살아 있소. 실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천음반선의 말에 백자안이 깜짝 놀랐다.

    은둔회 반선들의 전멸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 은둔회에 가입하지 않은 은둔반선들이 훨씬 많지만,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은둔반선들은 모두 죽은 셈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

    “우리 은둔회 반선들이 마교와 동방무맹 무사들을 소림사로 특수 이동시킨 것이 화근이었소. 원래 우리는 정심회 반선들과 달리 마신들의 도움을 받지 못해 신선계 밖 활동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소. 만년서약 때문인데,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서약의 힘이 조금 무뎌진 느낌도 없지 않아 적극적으로 무림의 일에 개입했던 것이었소. 하지만 그 후유증이 심했고, 그때를 노린 정심회 측의 공격을 받고 말았소. 정심회 반선 일천 명의 합공에 도력이 약해져 있던 우리는 별다른 반항도 못 해보고 전멸을 당했소. 나 혼자 살아남은 것은 바로 내가 보관하고 있던 천상여의주 덕분이었소.”

    “아! 어찌 그런 일이······.”

    백자안이 침통해 했다.

    가장 강력한 우군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상황은 아니었다.

    “혹시 다른 은둔반선들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노력하고 있소. 정심회 쪽에서 먼저 우리를 건드렸기 때문에 중립을 취하던 반선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사실 정심회 반선들을 제외하고 다른 반선들은 모두 은둔반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잘 모이지 않을 뿐이지 그 잠재력은 무한하다고도 할 수 있소.”

    “네. 하지만 세력을 키우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요.”

    “그렇소. 은둔반선 백여 명을 모으는 데만 아마도 십 년은 걸릴 것이오.”

    “아! 그 정도입니까?”

    백자안이 탄식했다.

    “그렇소. 하지만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방법이 없는 게 아니오. 백 공자가 지존검으로 서약의 돌을 내리쳐 검의 각성을 이룬다면 은둔반선들이 빠르게 모일 것이오. 그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일만 명으로 추산되는 정심회 반선들과 자웅을 겨뤄볼 수 있을 것이오.”

    “서약의 돌이 서약봉이란 곳에 있다고 하셨지요? 정심회 측에서 관리하고 있고 진법과 기관 때문에 접근이 어렵다고 했던가요?”

    “그렇소. 잘 기억하고 있구려.”

    “네. 반선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지금 상황에서는 제가 다시 신선계로 들어가 서약의 돌이 있는 곳에 가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은둔반선들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해 저 혼자의 힘으로는 정심회 반선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한데 정심회 측은 어쩐지 저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뭔가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제 생각이 틀린 겁니까?”

    “잘 보셨소. 사실 백 공자가 가지고 있던 천상여의주가 일시 빛을 발해 마신들의 봉인이 조금 풀리고 말았소. 봉인이 풀린 마신들 일부는 이미 본신지력을 회복했다고 하니, 큰일이 아닐 수 없소. 지금까지는 기본적인 봉인이 이루어지고 있어 그 기운만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소. 하지만 이제는 일부이긴 하나 본신지력으로 실체를 형성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가공할 일이 아니겠소?”

    “아! 어찌 그런 일이. 제가 천상여의주를 잘 보관하지 못했기 때문이군요.”

    “꼭 그렇지는 않소. 어차피 어떤 봉인도 세월이 흐르게 되면 풀어지게 마련이오. 특히 마계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암흑마기(暗黑魔氣)는 마신들의 봉인이 점차 풀리는 주된 원인이기도 하오. 물론 천상여의주 또한 마신들이 봉인될 때 그 힘을 보태긴 했으나, 그 일부일 뿐이오. 천상여의주가 잠시 빛이 바래 마신 일부가 봉인을 풀었으나, 어차피 곧 실현될 일이었소. 그러하니 자책은 마시오. 그래도 천상여의주의 힘으로 대인자문 강시 백만 구를 영원히 제거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조금 전 제가 말씀드린 대로 서약봉으로 가서 지존검의 각성을 이루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은데······.”

    “서약봉 주위에는 이제 마신들 일부까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백 공자 혼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오. 서두르지 말고 좋은 방도가 생길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면서 힘을 기르는 것이 좋을 듯하오. 몸 상태는 어떻소?”

    “내상이 아직 덜 회복된 것은 사실입니다.”

    “좋소. 그럼 일단 내상 회복에 전념하면서 무림을 다스리고 있으시오. 마신들 일부가 봉인을 푼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심회 쪽에서 마신들과의 관계 재정립에 신경을 쓰느라 당분간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오. 무엇보다 마신들 일부가 봉인 해제되면서 일시 신선계 전체 진법 체계가 변화되어 반선들 역시 신선계 외부로 나갈 수 없는 상태요. 물론 그 반대로 외부인 역시 신선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상태라오.”

    “특수 이동대법을 펼쳐도 말입니까?”

    “그렇소. 이동대법은 물론이고 신선계에 드나들 수 있는 통로 역시 폐쇄된 상태요.”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혹시 그것 역시 천계의 안배입니까?”

    “그렇소. 마신들의 봉인이 풀리면 이들을 막기 위해 신선계 전체 진법에도 변화가 생기도록 천신들이 안배해둔 결과요. 하지만 일시적이라 언제까지 지속할지는 아무도 모르오. 하루가 될지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오. 다만 최대 일 년은 넘지 않으리라는 것이 반선들의 다수 견해라 할 수 있소. 백 공자는 그동안 무림을 다스리면서 힘을 기르도록 하시오. 요컨대 지금은 적절한 시기도 아니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다만 무림인들의 무력은 한계가 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백 공자의 무공 수준이오. 천족의 후예인 백 공자만이 마신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오. 다른 일들은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아무래도 백 공자와 달리 나는 천족이 아니라서 천상여의주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든 것 같소. 그럼 무운을 빌겠소.”

    “네. 그럼 다음에 연락은 어떻게 합니까? 제가 먼저 연락을 취해도 됩니까? 된다면 그 방법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아쉽게도 천상여의주를 이용한 대화는 신선계 내부에서 먼저 요청해야 하오. 게다가 신선계 진법 전체가 지금 요동을 치고 있어 다음에도 연결이 될지는 불확실하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니 마음을 편히 하시오. 그럼.”

    천음반선이 말을 마치자, 그의 얼굴이 점차 사라졌다.

    천상여의주의 빛은 그대로 영롱했다.

    “휴우! 첩첩산중이구나. 천음반선님 말씀대로 내 무공을 높이는 게 가장 중요할 듯하다. 서장무맹의 침공만 없다면 조용히 수련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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