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장] 강시왕 2
허허반선의 마지막 경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긴장감을 자아냈다.
백자안이 끝내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면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변수는 역시 대인자문 강시 백만이었다.
정심회 반선 백여 명 정도면 수적으로 우세한 삼의맹 무사들이 심적으로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반선들의 무공을 직접 견식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아직 그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시들은 달랐다.
분명 머리가 터져 죽었던 강시들이 다시 멀쩡하게 돌아온 그 사실 자체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우리 쪽에도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반선 백여 명과 강시 백만 명을 함께 대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계속해서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막상 전면전이 임박하자 삼의맹 무사들의 목숨이 걱정되었다.
이를 노린 것일까.
허허반선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백자안. 고집을 그만 부리고 우리 제의를 받아들여라. 그러지 않으면 네놈들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네놈의 결단에 수많은 목숨이 달렸다는 것을 알아야지. 고작 보검 두 자루 때문에 네놈만 바라보는 무사들을 희생시킬 생각이냐?”
“으음······.”
백자안이 침음과 함께 만박서생을 쳐다봤다.
그에게 의견을 구하려는 것 같았다.
만박서생이 말했다.
“맹주님께서 결단을 내리면 우리는 따를 겁니다. 하명해주십시오.”
“교주의 뜻에 따르겠네.”
“맹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불패마왕, 태극검선 등 마교와 동방무맹 고수들 역시 충성을 맹세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용기의 발로였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잠시 약한 마음을 가졌으나 어차피 정면 돌파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잠깐의 회피는 결국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거절하겠소. 협정체결은 물론이고 보검 역시 줄 수 없소. 더 이상의 대답은 없을 것이오.”
백자안의 말에 허허반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놈이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사실 네놈을 죽인 후 지존검과 천마검을 회수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 보검의 주인이 죽게 되면 귀속력 또한 사라지기 마련이지. 다만 네놈이 스스로 우리에게 보검을 건넸다면 더욱더 좋을 것 같아 끝까지 협정체결을 권유한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더는 미련을 갖지 않겠다.”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소.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오?”
“우리가 노리는 것은 네놈의 목숨이니, 용기가 있다면 혼자서 백만 강시를 상대해라. 만약 네놈이 승리하면 일단 우리 역시 신선계로 돌아가겠다.”
“좋은 제의요. 수락하겠소.”
백자안이 지존검과 천마검을 고쳐잡았다.
두 검 모두 수평으로 내밀었다. 검강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물론 허허반선의 말을 모두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강시들을 상대한 후 반선들이 기습을 노릴 가능성이 크겠군. 하지만 삼의맹 무사들의 안전을 일단 확보할 수 있으니, 오히려 내가 바라는 바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우려한 것은 전면전 발발 때문에 삼의맹 무사들을 모두 보호하기 힘들 거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허허반선이 끝까지 지존검과 천마검 확보에 집착하는 바람에 그 문제가 일단 해소된 셈이었다.
“후후후! 네놈이 신이 아닌 이상 백만 강시 모두를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
허허반선이 우수를 들었다.
순간, 대인자문 강시들이 일제히 경력을 발출했다.
한데 그 방식이 괴이했다.
백자안을 향해 발출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의 한 점을 향했다.
한 점에 모인 경력들은 거대한 공 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거대한 기 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백자안을 덮쳤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설마 했지만, 강시들이 합공을 가한 것이었다.
당연히 그 힘은 미증유의 것이었다.
하지만 백자안 역시 피할 방도는 없었다.
지존검과 천마검을 통해 강기를 발출해 이를 막았다.
두 강기는 서로 모여 방패 모양을 이루었다.
강시들의 합공으로 만들어진 기 덩어리의 위력이 너무나 고강해 일단 방어에 치중한 셈이었다.
강기방패.
당연히 검기방패보다 강한 보호막이었다.
꽈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백자안이 뒤로 물러났다.
놀랍게도 강기방패가 그대로 찢어지고 말았다.
강시들이 날란 기 덩어리는 보호막을 찢고 그대로 백자안의 가슴을 강타하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애초 강시들의 합공을 예상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삼의맹 무사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최악의 대결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 강시들이 합공을 가할 여유를 주지 않고 각개 격파를 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삼의맹 무사들의 희생은 컸겠지만, 최후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만 강시의 힘이 집중된 공격을 받게 되자 모든 것이 수포가 될 상황이었다.
‘내가 너무 자만한 것인가.’
백자안이 침통한 표정으로 마지막 반전을 노렸다.
그것은 바로 천상여의주였다.
천상여의주의 힘은 백자안에게도 아직 미지의 것이었다.
강시들의 날린 기 덩어리가 공 모양임을 보고 순간적으로 천상여의주를 떠올린 것이었다.
의념을 일으키자 천상여의주 역시 반응을 해왔다.
몸속에 있던 천상여의주가 외부로 나오며 강시들이 날린 기 덩어리와 부딪혔다.
그 크기는 물론 천상여의주가 비교할 수 없이 작았으나, 순간적으로 천상여의주에서 금빛이 뿜어져 나와 부피가 비슷해졌다.
꽈아앙.
다시 한번 폭음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은 이전과 달랐다.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던 기 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백자안은 기세를 모아 의념을 일으켰다. 허공에 떠 있던 천상여의주가 강시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 지점은 강시들이 힘을 집중시켰던 곳이었다.
천상여의주가 정확히 그 지점에 도달한 순간,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금빛 우박이 떨어져 나와 강시들을 강타했다.
“크윽!”
“켁!”
강시들이 비명과 함께 완전히 녹아내렸다.
이전처럼 환영이 아니라 실제 강시들이 소멸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천상여의주까지 가지고 있었다니. 모두 철수한다.”
허허반선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신선운이 사라졌다.
신선운에 타고 있던 정심회 반선 백여 명이 모두 신선계로 돌아간 것이었다.
와아아아.
삼의맹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맹주님 만세!”
“맹주님 만세!”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무려 강시 백만 구를 혼자서 제거한 백자안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얼마 후 대인자문 강시들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완전히 소멸한 것이었다.
더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었다.
천상여의주를 회수한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금빛을 발하던 천상여의주가 그 힘을 다했는지 빛이 바래져 있었다.
일단 몸속에 다시 넣어둔 그가 군웅들을 향해 말했다.
“강시들이 모두 제거되었으나, 여전히 정심회 반선들은 건재합니다. 반선들의 수는 무려 일만 명이 넘으며, 그 힘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용기 있게 이에 대처해나갈 겁니다. 모두 단합해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삼의맹은 비상 체제로 전환할 것이며, 조만간 있을 정심회와의 최종 결전 준비를 철저히 할 겁니다. 저를 믿고 따라주시겠습니까?”
백자안이 지존검과 천마검을 높이 들었다.
와아아아.
군웅들의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맹주님 만세!”
“맹주님 만세!”
* * *
사흘 후. 중원무맹 취의청.
백자안 주재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사흘 전 영웅대회 때 대인자문 강시들을 모두 제거한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처음으로 열린 회의였다.
“지난 사흘간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백자안이 담담히 물었다.
허허반선 등 정심회 반선 백여 명이 신선계로 돌아간 후 곧바로 총공격이 있을까 싶어 걱정했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천상여의주였다.
빛이 바랜 천상여의주는 아직 그 빛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드시 금빛이 아니더라도 영롱해야 했다. 하지만 마치 시든 꽃처럼 변색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할 자리 역시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금 무림 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다가올 정심회의 재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만박서생이 말했다.
“일단 정심회 쪽의 움직임은 아직 파악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탐무사들이 직접 신선계로 들어갈 수 없어 현 정보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단목 대협의 차도는 어떻습니까?”
“전대 맹주인 단목 대협께서는 정신을 차리셨고, 옛 기억을 모두 되찾으셨습니다. 하지만 강시왕이 되는 과정에서 입은 기본 내상이 낫지 않아 요양을 위해 낙향을 하셨습니다.”
“제가 내린 태상맹주 직함을 받으시던가요?”
“네. 중원무맹의 태상맹주 직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내상 치료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어 실질적으로 무림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더욱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돌아올 단목 소저에게 물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단목 소저가 부친을 모셔간 것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또 다른 일은 없습니까?”
“무적세가 독고준이 중원무맹을 탈퇴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를 따르는 무사들의 수가 매우 적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밖에 무림 전체적으로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꼭 정심회와 관련이 없더라도 말입니다.”
“네. 아직은 조용합니다. 다만 사천성 쪽에 서장 무림인들이 조금 모습을 드러낸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명 수준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서장 무림이라면? 이전부터 호시탐탐 중원무림을 노리고 있던 곳이 아닙니까? 여전히 그곳은 포달랍궁이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습니까?”
“네. 포달랍궁의 힘은 최근 최고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럴 일이 없겠지만 포달랍궁이 서장의 다른 문파들을 이끌고 침공을 가해온다면 또 다른 무림대란이 불가피할 겁니다.”
“놈들의 병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최소 백만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양패구상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자칫 서장 무림과의 전쟁으로 힘이 약화한 시기를 틈타 정심회 반선들이 재차 공격을 가해올 수 있으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서장 쪽을 주시해주십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네. 이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논을 해볼까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부족한 제가 중원무맹과 마교, 그리고 동방무맹 세 곳의 수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곳 낙양에 무사들을 주둔시켜둘 수는 없으므로 마교와 동방무맹 무사들을 각자의 본거지로 보내려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백자안이 말을 하며 불패마왕과 태극검선 등 마교와 동방무맹 고수들을 쳐다봤다.
“하하하. 백 맹주. 나 보고 신강으로 돌아가라는 말인가? 하지만 무사들을 이끌고 가면 정심회 반선들이 공격해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에 대한 대책이 없는 한 당분간은 계속 이곳에 무사들을 주둔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저 역시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대인자문이 실질적으로 궤멸한 이상 현재 동방무림은 평화로운 상황입니다. 굳이 서둘러 병력을 철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하기야 아직 정심회의 뿌리를 뽑지 못했지요. 아무래도 제가 다시 신선계로 돌아가 은둔회 반선들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백자안이 은둔회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해주었다.
다들 은둔회가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는지 집중했다.
특히 마교와 동방무맹 무사들 대부분은 이미 은둔회 반선들의 능력을 직접 목격한 바 있어, 그 신뢰감이 높았다.
백자안이 말했다.
“지금 상황이 계속 유지가 되면 때를 봐서 비밀리에 저 혼자 신선계에 가보려 합니다. 가서 정말 은둔회 반선들이 정심회 쪽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에 부닥쳤는지 알아보고 향후 대책을 수립하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지금처럼 전면전 준비를 해주십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