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평화협정 1
[제48장] 평화협정
절대황녀, 백자안, 황룡선생 이렇게 세 명이 풍운장원 취의청 안으로 들어서자 군웅들이 일제히 예를 표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당금 황제의 금지옥엽.
무공광으로 소문나 있긴 하지만, 무림인들로서는 그녀를 절대 쉽게 볼 수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황제의 노여움을 살 수 있어 멸문지화를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무림의 일에 가담하는 것에는 늘 위험이 따르게 마련.
만약 절대황녀를 제거할 의도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절대 공개적으로 손을 쓰지 않을 것이었다.
암살 후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면 황제 역시 어쩔 수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절대황녀는 지난번 해남도 전투 이후 절반은 무림인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공주님께서 어떻게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성 밖에 황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난 후 풍류도인이 물었다.
절대황녀가 미소를 지었다.
“무림의 평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아 황상께서 근심이 많으세요. 저를 보내 도움을 드리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했어요.”
“이번 일이라 하심은 전 중원무맹주 단목군이 추진하고 있는 평화협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래요. 조정은 이번 일을 무림에만 국한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양민들이 더는 희생당하지 않게 심사숙고하는 자세가 필요한 상황이지요. 그래서 여러분의 생각을 먼저 듣기 위해 이곳으로 온 거예요. 단목군의 말처럼 정심회 반선들과의 평화협상이 정말 가능한 건가요?”
“물론 아닙니다. 공주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렇군요. 역시 이곳 분들은 단목군 그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이는 동방무맹과 마교 두 곳 모두의 공통된 의견인가요?”
절대황녀가 불패마왕을 쳐다봤다.
불패마왕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바로 그렇습니다. 본교와 동방무맹은 이제 늘 의견을 함께하고 있지요. 요컨대 지금 단목군 그자가 벌이고 있는 일은 한마디로 말해 미친 짓입니다. 무림인들을 정심회 반선들에게 팔아넘기려는 것으로, 일신의 영화를 위해 그럴듯한 말로 모든 이들을 속이고 있지요.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신선계에 있는 정심회 반선들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척결해야 할 자들입니다.”
“하지만 정심회 반선들의 무공이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명성이 자자한 백자안 맹주조차 고작 반선 다섯 명과 싸우다가 동귀어진했다고 하니······.”
“맹주님은 반드시 살아계실 거예요.”
대류표국 소국주 백리설아의 말이었다.
“정말인가요?”
“네. 오라버니는 반드시 살아있을 거예요.”
이번에는 백소영의 말이었다.
백리설아와 백소영, 그리고 악미미 세 사람은 취의청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악미미 역시 백자안의 생존 추정에 힘을 보탰다.
“이전에도 몇 번씩이나 맹주님은 생사불명 상태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셨어요. 그분이 돌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막아야 해요. 지금 단목군 그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공주님뿐이에요. 황제 폐하의 명으로 맹주님께서 복귀할 때까지 정심회 반선들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막아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럴 의사가 있기에 이렇게 직접 오신 게 아닌가요?”
“그렇긴 해요. 하지만 관례상 황궁이 무림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다만 정심회 반선들이 거짓 협정을 통해 무림을 장악하고 나아가 양민들까지 해치려 한다면 이는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영웅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그 증거를 찾아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증거만 확실하면 제가 폐하를 설득해 보겠어요.”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군웅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절대황녀가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것은 여기 계신 황룡선생과 상의하시면 될 거예요. 저는 영웅대회 때까지 이곳 풍운장원에 머물면서 백자안 공자를 기다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네. 물론이에요. 오히려 저희가 영광이지요.”
백소영이 미소를 지었다.
백자안의 부모와 백자룡, 그리고 곽휘 네 사람은 지금 안전을 위해 장원 심처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외부적으로 장원을 대표하고 관리하는 일은 백소영이 전담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 혼자는 벅찬 일이라 숙부인 백풍과 백리설아 등이 상주하며 돕고 있었다.
“한데 이분은?”
풍류도인이 황룡선생 옆에 서 있는 백자안을 가리켰다.
아까 소개를 할 때 절대황녀와 황룡선생만 소개하고 백자안에 대한 소개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절대황녀가 미소를 지었다.
“풍파객이라는 분이세요. 최근 저를 도와주고 계시지요.”
“아! 네.”
풍류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자안 역시 정중하게 포권하며 예를 표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절대황녀의 호법으로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 전체 상황을 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임요요가 말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에요. 하루라도 빨리 단목군을 찾아가 우리 입장을 밝혀야 해요. 마침 공주님께서도 우리를 지지해주시기로 했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중원무맹 총단으로 모두 가는 게 어떨까요? 아, 물론 공주님 말씀처럼 확실한 증거도 계속 찾아야겠지만, 압박은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으음, 좋은 생각입니다. 사실 황제 폐하의 명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 속도를 내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아까 의논한 대로 삼의맹 탈퇴로 압박을 가하는 게 가장 좋겠군요.”
풍류도인의 말에 군웅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황녀의 가세로 힘을 얻은 표정들이었다.
그때였다.
무사 한 명이 급히 취의청 안으로 들어왔다.
“중원무맹 전대 맹주 단목군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뭣이라고?”
풍류도인을 비롯한 취의청에 있던 군웅들이 매우 놀랐다.
논란의 대상인 단목군이 직접 올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잘되었다. 길게 끌 필요 없이 이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어쩌면 내 신분을 밝혀야 할지도 모르겠군. 다만 내상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반색했던 백자안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무림의 일이란 것이 결국 대부분 무공 실력으로 판가름 난다는 것을.
‘어떻게든 되겠지. 회피해서는 안 된다.’
백자안이 긴장하며 기다릴 때.
취의청 안으로 백여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단목군을 비롯하여 중원무맹 지휘부 고수들이었다.
총군사 만박서생과 태상장로 천수노인, 단목수련, 영호광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한편 그들 외에도 무적세가 대공자 독고준의 모습도 보였다. 최근 그가 단목군의 휘하에 들었다는 소문이 맞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풍류도인이 다소 퉁명하게 물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단목군 등 중원무맹 고수들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단목군이 껄껄 웃었다.
“허허허. 여러분이 오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해명하기 위해 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해가 깊어질 것이니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게 무림 전체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흥! 그런 사람이 본인의 독대 제의를 거절했소?”
불패마왕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 단목군은 위군자로 보이는 것 같았다.
“허허허. 불패마왕 귀하께 정식으로 사과하겠소. 아직 우리 입장이 정리되지 못해 부득이 만나지 못했소. 그 대신 이렇게 직접 왔으니 지금이라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시다.”
“무슨 문제를 해결한다는 겁니까? 먼저 말씀해보시지요.”
풍류도인의 말에 단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험험. 하긴 그렇군요. 사실 여러분의 걱정은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다들 제가 정심회 반선들과 협상을 벌이는 것에 대해 우려를 품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요. 우리 동방무맹과 마교는 절대 정심회 반선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계속 단목 대협께서 고집을 부리면 우리 모두 삼의맹에서 탈퇴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풍류도인의 물음에 불패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본교의 뜻도 다르지 않소. 게다가 이는 폐하의 뜻이기도 하오. 제 말이 맞지요? 공주님.”
절대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클 것 같네요.”
“아!”
단목군 등 중원무맹 지휘부 고수들이 그제야 절대황녀의 존재를 깨닫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예는 거두도록 하세요. 저 역시 절반은 무림인이라 할 수 있으니, 일단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요. 다만 저의 입장은 일단 동방무맹과 마교 두 곳과 같은 게 사실이에요. 설사 정심회 반선들과의 평화협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백 맹주가 돌아올 때까지는 모든 절차를 유보했으면 좋겠군요.”
“황공하지만 이 일은 무림의 일입니다.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공주님의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흥! 폐하께서 직접 명을 내리셔야 들을 것이란 말씀인가요?”
“무림과 관부는 상호 불간섭이 오랜 전통입니다. 폐하께서도 무리하게 그런 명을 내리시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러지 않고 부당한 명을 내리시면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생길까 그게 걱정입니다. 이점 숙고해주십시오.”
단목군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의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돌려서 말을 하긴 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황제까지도 변을 당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황룡선생이 언성을 높였다.
“무례하오! 아무리 전대 무림맹주라고 하나 이런 대역무도한 말을 하다니. 어서 용서를 비시오. 그러지 않으면 중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하하하. 오해하셨군요. 제 말뜻은 그게 아니라 정심회 반선들이 폐하를 노릴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제 말을 찬찬히 들어보면 아실 겁니다.”
단목군의 말에 분노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던 절대황녀와 황룡선생이 침묵을 지켰다.
일단 단목군의 설명을 들어보고자 하는 것 같았다.
백자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단목 대협이 가짜가 아니라면 뭔가 사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좀 더 두고 봐야겠구나. 하기야 만박서생과 단목 소저도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니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군.’
백자안이 호흡을 가다듬고 단목군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역용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특수 역용술이라면 외부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이전에 느꼈던 느낌과 같았다.
‘최소한 육신은 이전과 똑같다. 그렇다면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오면서 생각이 바뀐 것인가.’
백자안이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단목군은 여유 있게 자리에 앉은 후 말을 이어갔다.
“먼저 확실히 말씀드릴 것은 제가 정심회 반선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것은 하나의 계책이라는 겁니다. 제가 바보가 아닌 바에야 어찌 그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겠습니까?”
“아!”
“역시!”
취의청에 모인 군웅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방무맹과 마교 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긴가민가하던 일부 중원무맹 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단목군의 진의를 처음 안 것 같았다.
단목군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정심회 반선들의 무공이 가히 신과 같다는 겁니다. 일례를 들어보면 그들은 대인자문 무사 백만을 단 한 번에 데려가 강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에라도 당장 우리 삼의맹 무사들을 곧바로 몰살시킬 수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사실 이 모든 것이 백 맹주가 중원삼성 등 다섯 반선과 동귀어진한 데서 초래된 겁니다. 백 맹주가 살아있고 그가 반선들을 견제할 수 있다면 제가 절대 협상을 서두르지 않을 겁니다. 정심회 반선들은 지금도 특사를 보내 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제가 최종대리자가 되지 않는다면 무림을 말살시키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제가 명분만 앞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태까지 왜 그런 해명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공공연히 우리 동방무맹과 마교 무사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필요하면 정마대전도 생각 중이라는 말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풍류도인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역시 단목군의 해명에 조금 마음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 점은 모두에게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정심회 반선들에게 의심을 샀을 겁니다.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단목군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만박서생이 말했다.
“전대 맹주님의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솔직히 저와 단목 소저 등 핵심 지휘부 고수들은 처음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무리하게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하셔서 당연히 말렸지요. 하지만 어제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힘을 합해 이 위기를 모면하느냐에 지혜를 모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방도라도 있습니까?”
“네. 여러분과 상의를 해야겠지만 일단은 정심회 반선들의 눈을 속여 시간을 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 그리고 저희 역시 백자안 맹주님의 복귀를 절실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맹주님이 복귀하실 때까지 놈들을 속여 가며 시간을 벌자는 게 저희 계획입니다.”
“으음, 그러니까 맹주님을 기다리자는 데는 뜻을 같이하는군요. 다만 방법이 다르군요. 우리 동방무맹과 마교는 맹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평화협정을 미루자는 것이고, 중원무맹 쪽은 일단 거짓이라도 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군요. 제 말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 무림은 말살될 겁니다. 한데 여러분께서 전대 맹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삼의맹 해체까지 거론하니 이렇게 서둘러 찾아온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절대황녀께서 무림의 일에 개입까지 하시니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흥! 여전히 불간섭 원칙을 세우는 건가요?”
절대황녀가 코웃음을 쳤다.
만박서생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하지만 무림의 일은 무림인들이 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지난번 해남도 전투에서는 왜구 토벌이라는 대의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번에도 황궁의 도움을 받는다면 무림의 독립성은 크게 훼손될 겁니다. 앞으로 황궁의 입김이 무림에 크게 미치는 단초가 될 가능성이 크지요.”
“흥! 그러니까 우리 황궁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 무림인들이 최선을 다해도 상황이 타개되지 않을 때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중립을 지켜주십시오. 사실 지금 성 외곽에 황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반선들에게 알려져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많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일단 중립을 지키도록 하지요. 하지만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면 즉시 개입하도록 하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