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신선재판 3
“네놈이 지존검이 있는 곳을 안단 말이냐?”
집법반선이 악미미의 목 바로 앞에서 부채를 멈췄다.
“그렇소. 우연히 지존장보도를 입수한 적이 있었소.”
백자안의 말에 취의청 안이 술렁였다.
반선들 대부분이 놀란 표정이었다.
정심회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집법반선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회주님. 이놈의 말에 속으면 안 됩니다. 제 정혼녀를 살리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니오.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소.”
정심회주가 집법반선을 저지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지존장보도는 어디에 있느냐?”
“지존장보도는 내 머릿속에 있소. 원본은 없애버렸소. 다시 그리려면 하루 정도는 필요할 것이오. 악 소저를 살려준다고 약속하면 내일까지 장보도를 그려주겠소.”
“하하하.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것이냐?”
“믿든 말든 자유요. 다만 그곳이 동화산이란 것만 먼저 이야기해주겠소.”
“으음, 동화산이라. 중원에 있는 화산과 관련 있는 곳이냐?”
“그렇소. 매우 흡사한 곳이오. 회주의 지혜라면 장보도를 보고 그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좋다. 그럼 한 가지만 묻겠다. 내가 알기로 지존장보도에 적힌 장소에 한 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그 문양이 무엇인지 말해보아라. 그러면 오늘 밤 네 곁에 정혼녀를 옆에 두게 해주겠다. 직접 눈으로 보게 되면 안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장보도를 보고 진품이라고 확인되면 악미미 저 계집을 풀어줄 것을 약속하마.”
“동심원 문양을 말하는 것이오?”
“하하하. 정말 알고 있구나. 좋다. 네 말대로 하루 말미를 주겠다. 일단 그림을 그려야 하니 오른팔 혈도만 풀어주지.”
정심회주가 지풍을 날려 백자안의 오른팔 혈도를 풀어주었다.
“무심반선이 네게 가한 무심독 역시 하루 정도 퍼지는 것을 막아두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지존장보도를 완성하면 무심독을 완전히 해독해줄 것을 약속하지.”
“고맙소. 다만 한 가지 밝힐 것이 있소. 지존장보도는 진짜이지만 그곳에 지존검이 정말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
“알겠다. 일단 장보도부터 그려라. 진위는 내가 판별할 수 있으니, 모든 것은 그때 결정할 것이다. 한데 이미 네놈이 지존검을 확보한 것이 아니냐?”
“분명히 말했소. 나는 지존장보도만 그려주겠다고.”
“으음, 하기야 지존검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다니겠지. 좋다. 하지만 네놈이 나를 속인 게 있으면 네놈의 껍질을 벗겨서라도 지존검을 찾을 것이다. 오행반선. 저자를 바다에서 건졌을 때 지니고 있던 검이 없었소?”
“천마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천마검도 있었지. 하지만 내가 지금 묻는 것은 지존검이오. 내가 신선경으로 봤을 때 분명 저자가 두 자루 검을 갖고 있었소. 한 자루는 천마검이었고, 나머지 한 자루는 평범한 검 같았소.”
“정확하게 보셨군요. 천마검 외 나머지 검은 그냥 보통 검이었습니다.”
“천마검은 지금 어디에 있소?”
“잘 모르겠습니다. 바다에 빠졌을 때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오행반선이 말을 하며 눈을 빛냈다.
‘천마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봤으니, 지금도 분명 백자안 저놈이 어떤 식으로든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수대법을 이용해 몸속에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다행히 회주도 그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천마검을 확보해야겠다.’
백자안이 말했다.
“무슨 소리요? 천마검은 오행반선 그대가 빼앗아 가지 않았소? 어디에 숨겨둔 것 같은데,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이오?”
“네놈이! 나를 모함하는 것이냐? 분명 네놈이 천마검으로 나를 유인한 후 내 혈도를 찍지 않았느냐?”
오행반선이 펄쩍 뛰었다.
하지만 말을 하고 보니 자신이 조금 전 거짓말을 한 게 탄로 난 것을 알았다.
“오행반선. 조금 전에는 천마검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신선계 안에서 백자안 저자가 천마검을 갖고 있는 것을 보았소?”
정심회주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죄송합니다. 회주님.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행반선이 안색을 굳히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정심회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었군. 오행반선. 이제라도 솔직히 말했으니 이번 한 번은 용서하겠소. 사실 천마검은 내게 별 소용이 없소. 하지만 마계의 마신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어쩌면 천마검으로 마신들의 수장인 천마신(天魔神)을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마신들은 지존검으로 봉인을 풀 수 있지만, 천마신만은 지존검과 천마검 두 개가 모두 있어야 봉인이 해제될 것이오. 그런 의미에서 천마검 역시 매우 중요하오. 오행반선. 아직도 천마검에 미련이 있소?”
“아닙니다. 천마검에 그런 효력이 있는지는 지금 알았습니다. 개인적인 미련은 완전히 버리겠습니다.”
“좋소. 하지만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지존검이 훨씬 더 중요하오. 우리의 목표인 우화등선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오.”
“회주님. 백의반선입니다. 천마검이 천마신의 봉인을 푸는 데도 도움이 된다면 꼭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존검을 우리가 확보하면 천계에서 회수하려 할 겁니다. 그때 천마신의 도움을 받으려면 천마검 역시 필요합니다.”
“일리가 있구려. 역시 백의반선이오. 모두 들으시오. 조금 전 이야기했듯이 우화등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끝이 없을 것이오. 지존검과 천마검의 확보 역시 우리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필요하기에 반드시 확보할 것이오. 따라서 개인적인 욕심은 가지지 말기를 바라오. 특히 조금 전 오행반선처럼 개인적인 탐욕으로 내게 거짓말을 하는 자가 나오면 앞으로는 절대 용서치 않겠소. 알겠소?”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반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정심회주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백자안에게 물었다.
“천마검은 어디에 있나? 특수 보관 대법을 알고 있는 것이냐?”
“그렇소. 천마검은 따로 보관하고 있소. 내일 지존장보도를 줄 때 같이 주겠소.”
“좋다. 일단 믿어보지. 어차피 하루 동안 도망치지는 못할 테니까. 집법반선. 어서 저 두 사람을 신선대감옥에 가두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신선대감옥.
정심봉 지하에 있는 이곳 감옥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백자안이 처음 갇혔던 신선감옥 지부와 외관상 큰 다름이 없었다.
다만 문이 쇠창살이 아니라 철문으로 이루어져 감옥 바깥을 볼 수 없었다.
깊은 밤.
감방 안에 있는 사람은 백자안과 악미미였다.
악미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백자안은 양피지 하나를 앞에 두고 붓을 들고 있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지존장보도를 그려야 악미미를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백자안은 신선대감옥을 탈출하는 방법을 궁리 중이었다.
다만 의심을 피하고자 지존장보도를 조금씩 그리고는 있었다.
하기야 지존장보도를 정심회 측에 넘겨도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존검은 백자안이 이미 갖고 있었다. 지존검이 있었던 동굴 역시 무너져 그 안에 있던 무형법문 또한 사라진 상태였다.
‘내일 지존장보도를 그자들에게 준다고 해도 악 소저를 순순히 풀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날이 밝기 전까지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필수다.’
백자안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악미미가 물었다.
“백 공자. 무슨 생각을 하세요? 정말 지존장보도를 알고 있었나요?”
“그렇소. 하지만 이미 지존장보도는 쓸모가 없어졌소. 그려줘도 상관이 없소. 하지만 여러 사정상 아무래도 장보도를 그리지 않는 게 좋겠소.”
백자안이 양피지를 삼매진화로 태워버렸다.
“아, 백 공자. 무공을 회복하신 건가요?”
악미미가 놀라워했다.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처음부터 연기를 한 것이오. 악 소저를 구출하러 이곳까지 오는 게 어려울 것 같아 일부러 잡혀 왔소이다.”
백자안이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악미미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몸속에 보관하고 있던 옥비녀를 꺼내 주었다.
“아! 이것은?”
악미미가 기뻐하며 옥비녀를 다시 머리에 꽂았다.
사실 옥비녀를 죽은 독심반선에게 빼앗겨 그 손해가 무척 컸었다.
하지만 이제 옥녀심공을 다시 운공할 수 있었다.
“잠시 그대로 있으시오.”
백자안이 악미미의 등 뒤로 돌아가 명문혈을 통해 내공을 넣어주었다.
악미미는 사양하지 않고 내공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옥녀신공을 운공했다.
이는 일주천을 통해 회복운공을 하려는 의도였다.
한데 백자안으로부터 받은 내공의 효력이 놀라웠다.
예상을 뛰어넘는 힘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악미미가 매우 기뻐하여 그동안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옥녀심공 대성에 도전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자안이 손을 떼자, 악미미의 몸이 바닥에서 한 자 정도 떠올랐다.
그녀의 몸 주위에서는 상서로운 서기가 어렸다.
바로 옥녀심공 최후의 경지였다.
다시 바닥에 내려온 악미미가 백자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백 공자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옥녀심공 대성을 이루었어요.”
“하하하. 십이성 대성을 이룬 것을 축하드리오.”
백자안이 자기일 인양 기뻐했다.
사실 악미미의 대성은 그 역시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내공을 넣어주면서 그녀의 깨달음이 매우 깊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조금 무리하더라도 끝까지 넣어준 것이었다.
악미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옥비녀가 없어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만, 그동안 그녀의 깨달음은 눈부셨다.
특히 절망 속에서 마음을 비우는 방법을 터득한 게 주효했다.
그리고 백자안과 재회한 후 모든 게 오해란 사실을 알고 나자 그녀의 마음은 더욱더 맑아졌다.
거기에다가 자신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더해졌고 예상치 못한 성취를 이룬 것이다.
‘단숨에 무형검 직전까지 도달했구나. 이제 악 장문인도 악 소저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백자안이 생각난 김에 물었다.
“혹시 악 장문인 소식은 들었소?”
“아뇨. 제 아버지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그건 아니오. 다만 악 장문인께서 악 소저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아마 지금쯤은 중원무맹 총단으로 돌아가 계실 것이오.”
“우리도 어서 이곳을 탈출해 중원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게 가능할까요?”
“물론이오. 악 소저의 무공이 훌륭해졌으니 나의 부담도 아주 가벼워졌소.”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장 감방문을 열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이었다.
힘으로 문을 부수고 나가게 되면 경계를 서고 있을 반선들의 제지를 받게 될 터.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반선과 싸움이 벌어지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악미미의 무공이 아무리 높아졌다고 해도 반선 한 명과의 싸움도 여전히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반선 한 명은 최소 무림인 만 명의 무력과 비슷하다. 경거망동하면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최대한 충돌 없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다.’
백자안이 심호흡을 한번 했다.
악미미 역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안색을 굳혔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는 백 공자의 뜻에 따르겠어요. 혹시 미리 생각해둔 탈출 방법이라도 있으신가요?”
“으음, 사실 한 가지 방법을 생각 중이긴 하오. 하지만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어 가능할지 의문이오.”
“그게 뭔가요?”
“특수 이동대법이오.”
“아! 그 방법을 백 공자께서도 알고 계시나요?”
“그저 잠시 영감이 떠올랐을 뿐이오. 이형환위 이론을 토대로 한 것인데, 순간 이동으로 이곳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오. 다만 확실히 정립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게 큰 단점이오.”
“일단 감방 밖으로만 나가면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이곳 정심봉의 영향권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놈들도 쉽게 추적할 수 없을 거예요. 물론 제일 좋은 것은 바로 낙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소. 일단 좀 더 연구해보고 날이 밝기 전에 시도해봅시다.”
“네. 저도 찬성이에요. 백 공자의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반선들의 수가 너무 많아요. 그들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맞는 말씀이오. 특히 정심회주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하오. 싸움이 벌어지면 아마도 그자의 공격을 백 초도 받아내기 힘들 것이오.”
백자안의 말에 악미미가 미소 지었다.
‘백 초나 받아낸다는 것도 대단할 것 같은데, 하기야 백 공자의 무공 역시 추측이 불가하니······.’
백자안이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
“이동대법을 연구할 동안 호법을 서주시오. 발소리가 들리면 기침 소리를 한 번 내면 될 것이오.”
“네. 걱정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