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신선재판 2
악미미.
취의청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예상대로 초췌한 안색이었다.
고문을 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온몸의 혈도가 제압당해있는지 반선 한 명이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 자리는 바로 백자안의 옆자리였다.
당연히 그녀가 백자안을 보게 되었다.
“아! 백 공자.”
악미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악 소저. 몸은 어떻소?”
“어떻게 이곳에? 백 공자도 잡혀 온 것인가요?”
“그렇소. 악 소저가 잡혀 온 것은 모두가 나 때문이오. 명색이 정혼자인데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직 우리 관계가 유효한가요? 백 공자가 직접 정혼을 파기하지 않으셨나요?”
“그것은 오해요. 독심반선이란 자가 내 얼굴로 역용해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오.”
백자안이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해줬다.
그동안 신선대감옥에 갇혀 있어 사정을 모르고 있던 악미미가 다시 한번 놀라워했다.
하지만 사실을 알게 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랬었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백 공자를 원망했어요. 그 때문에 총단을떠나 방황을 했지요. 그러다가 이놈들에게 붙잡혀왔지만······.”
악미미의 안색이 조금 붉어졌다.
사실 그녀가 그동안 비탄에 잠겨있었던 것은 납치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백자안의 일방적 파혼이 그녀에게 매우 큰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특히 파혼에 이어 임요요와의 약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그 충격과 부끄러움은 극에 달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럼 임 소저는?”
“임 소저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소. 내가 다시 복귀한 일은 모든 무림인이 알고 있소.”
“아, 네.”
악미미가 지금 상황도 잊은 듯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암울하군요.”
“걱정하지 마시오. 나를 믿으시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악미미를 보니 그 역시 기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게 말투도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악미미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집법반선이 소리쳤다.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곧 죽을 놈들이 사랑 놀음을 하고 싶은 것이냐?”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이제 악 소저가 왔으니 나머지 질문을 하시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악미미가 옆에 온 이후 그는 책임감을 더욱 느끼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말의 자신감도 없지는 않았다.
아직도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였다.
“회주님께서 직접 질문하시지요.”
집법반선의 말에 정심회주가 입을 열었다.
“백자안 그대에게 묻겠소. 그대는 천족의 후예요?”
“천족? 이전에도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금시초문이오. 전혀 아는 바가 없소. 천족이 무엇인지도 모르오.”
“으음, 하기야 모를 수도 있겠지.”
정심회주가 안색을 굳혔다.
백자안의 처리가 고민되는 것 같았다.
집법반선이 말했다.
“회주님. 이자가 천족의 후예라는 것은 낭설에 불과합니다. 아마도 신선천잠사를 스스로 풀었다는 데서 그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우리 반선들이 아닌 일반 무림인이라도 기연을 만나게 되면 무공이 급상승할 수가 있는 법이지요.”
“으음, 백의반선 그대의 의견은 어떠하오? 사실 그대가 가장 저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오지 않았소?”
“회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제 대답은 아직 정확하게 모른다는 겁니다. 백자안 이자는 사실 매우 기이합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온 것처럼 몸 상태가 신비합니다. 이러한 체질은 실제 천족과 유사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확인은 지금 시점에서 불가능합니다. 저는 다만 그를 최종 대리자로 생각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기도 했고 압박도 가했습니다.”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소. 지금 직접 보니 저자의 신체가 매우 특수하다는 것을 알겠소. 하지만 이미 우리 반선 중 한 명을 죽였소. 본회 율법에 의해 단죄하지 않을 수 없소. 집법반선. 반선을 살해한 죄에 대한 처벌은 무엇이오?”
“소멸입니다. 소멸은 부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으로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지요. 저는 저자를 소멸형으로 다스려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무림의 대리 통치 계획은? 다른 적임자가 있소?”
“현재 혈교주와 사사천교주 두 명 정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충성심이 적어 금제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배신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때문에 얼마 전 백자안 저자에게 죽은 신임 대인자문주처럼 괴수들을 개조해 간접 통치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괴수 대리자는 한계가 있소. 창의력이 부족해 우리가 원하는 이상 정치를 할 수 없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화등선의 혜택을 우리 모두 받기 힘들어질 것이오.”
정심회주가 고개를 저었다.
백자안이 물었다.
“한 가지만 묻겠소. 도대체 대리통치가 우화등선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오? 해괴한 이론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이오?”
“너는 모른다. 반선이 아니니까. 우리 반선들은 만년서약 때문에 원칙적으로 무림에 전면으로 나설 수 없다. 최근 몇몇 반선들이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 역시 매우 특수한 경우였지. 절대 지속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화등선은 우리 반선들의 목표다. 무림인들을 우리의 이상에 따라 개조하고 통치함으로써 호생지덕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이 호생지덕은 우화등선의 좋은 발판이 된다.”
“그 무슨 미친 소리요? 이미 많은 무림인이 그대들의 욕심 때문에 목숨을 잃었소. 그대들이 삼혈맹을 뒤에서 지원한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오.”
“대의멸친이라 했다. 큰일에는 불가피하게 큰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지. 그리고 죽음이 뭐 별것인가? 이미 대인자문 무사 백만 명을 오행반선을 비롯해 여러 반선이 죽여 활강시로 만들었다. 여차하면 그들을 이용해 무림을 초토화할 수 있지.”
“무림을 말살시킬 것이오?”
“하하하. 그렇다. 아직은 아니지만 모든 시도가 무산되면 차라리 무림인들을 모두 없앨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우리가 섣부른 유혹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겠다. 너의 죄를 사면해주면 최종대리자가 되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 그 길만이 네 정혼녀를 살리고 무림의 멸망을 막는 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해라. 나는 혹시라도 네가 천족의 후예일 것 같아 기회를 주는 것이다.”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소. 이미 자신의 논리에 매몰되어 이성을 잃은 것 같소. 내 비록 수도자는 아니나 우화등선을 하고자 한다면 어떤 생명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오. 물론 불의를 보고 가만있어서는 안 될 것이나, 그대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무림인들을 개돼지보다 못하게 보고 있소. 따라서 나는 판단하오. 정심회 반선들 모두가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아마도 그대들 자신은 모르겠지만 다들 주화입마와 비슷한 심리 상태에 달한 것 같소. 하지만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더는 무림인을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나 역시 책임을 묻지 않겠소. 이쯤에서 그만하고 나와 악 소저를 무림으로 돌려보내 주시오. 혈교와 사사천교 세력은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까.”
백자안의 말에 반선들이 웅성거렸다.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에 다들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심각히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자안이 내심 탄식했다.
‘집단 광기에 빠진 자들이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세뇌 아닌 세뇌를 당했기 때문에 절대 말로써 설득당할 자들이 아니다.’
정심회주가 다소 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야말로 미친 것이로구나. 내 특별히 너를 불쌍하게 여겨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거늘. 할 수 없군. 백의반선. 백자안 저자를 소멸시켜도 괜찮겠소?”
“회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사실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리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만약 저자가 천족의 후예라면 자칫 천계 천신들의 분노를 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안 그래도 우리 정심회 반선들이 우화등선을 빨리 달성하기 위해 마계 마신들의 도움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빌미를 준다면 문제가 커질 겁니다.”
“으음, 하기야 천계 입장에서는 우리를 역천의 무리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소. 천계나 마계 둘 다 우리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니까.”
“천족의 후예 문제에 대해서는 예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일단 천족의 후예 여부가 판가름 날 때까지 신선대감옥에 가둬두십시오. 천계제일보검인 지존검을 찾게 되면 천족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지존검이라. 지존검이 무림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장소는 아무도 모르고 있소. 하지만 천계의 보복 또한 두려운 일이니 그렇게 합시다. 아직 마계의 지지를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으니까 조심해야지.”
“현명하십니다. 그럼 무림 세력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어떤 상태요?”
“혈교와 사사천교 세력이 중원무맹 총단을 포위하고 공격 중입니다. 마교 세력은 사사천교 강시들에게 당해 거의 궤멸된 상태라, 중원무맹에서는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동방무맹이 있지 않소?”
“반선들을 보내 이미 동방 전체를 진법으로 봉쇄해두었습니다. 그들은 절대 동방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겁니다.”
“차라리 대인자문처럼 동방무맹 무사들을 모두 죽여 활강시로 만드는 것은 어떻소?”
“시기상조입니다. 중원 무림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어떻게 정리되는지 살펴본 후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으음, 백의반선은 아직 대리 통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구려.”
“네. 대리 통치는 우화등선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적어도 정통 수도 방법을 벗어나 마계의 도움을 받고 있는 우리 정심회 반선들의 경우에는 마지막 수단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설사 회주님의 신공이 완성되어 직접 통치가 가능해지더라도 살아있는 무림인들이 다수 있어야 합니다. 무림 말살은 그러한 시도가 실패했을 때 마지막으로 시험해볼 수 있겠지요.”
“으음, 내 신공이 완성되면 죽은 자들을 강시로 만들어 그들을 다스리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오. 다만 백의반선 말대로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할 것 같소. 아무래도 살아있는 자들을 다스려야 호생지덕이 높아질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동방 무림인들을 일단 살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다만 그들이 중원 무림 일에 절대 개입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쇄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좋소. 그럼 백자안 저자를 감방 안에 가두고, 반선들을 무림으로 보내 지존검을 찾도록 하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악미미 이 계집은 어떻게 할까요?”
“집법반선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정심회주의 명이 떨어지자, 집법반선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회주님의 위임을 받아 이번 재판의 최후 결론을 내린다. 백자안은 신분이 확인될 때까지 신선대감옥에 영구 구금한다. 화산파 악미미는 백자안의 정혼녀로 그를 대신해 사형에 처한다. 백자안이 우리 정심회 반선인 독심반선을 죽인 죄를 대신 묻는 것이다. 죽기 전에 할 말이 있나?”
집법반선이 말을 한 후 부채를 높이 들었다.
부채로 악미미의 목을 내리칠 기세였다.
악미미로서는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남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은 그녀였다.
특히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 이제라도 백자안과 잘 지내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악미미가 안타깝고 놀란 마음에 아무 말도 못 할 때.
백자안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오? 악 소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시오?”
“후후후! 누구든 반선을 살해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니냐? 너는 잘 모르겠지만 지존검을 찾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지존장보도부터 찾아야 하고 말이야. 사실 지존검만 있으면 우리 정심회는 천계의 압박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지. 그렇지 않습니까? 회주님.”
“집법반선의 말씀이 옳소. 지존검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소. 당장 지존검만 있으면 마지막 단계만 남은 내 신공 수련 일정도 앞당길 수 있을 것이오. 게다가 나중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천계의 위협에 대해서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게 되지.”
“지존검이 있으면 마계와 힘을 합쳐 천계를 장악할 수도 있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군요.”
“그렇소. 하지만 지존검 같은 신검은 그 인연자에게만 나타나니, 누구든 지존검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그를 죽인 후 빼앗으면 될 것이오. 천기에 의하면 이미 지존검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니 곧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오. 지존검만 확보하면 이후는 일사천리요. 지존검으로 마신들의 봉인을 풀어주면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어찌 천계 천신들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소? 어서 악미미 저 계집을 죽이시오. 수도자는 색에 초연한 법. 비록 대단한 미인이나 그대로 두면 분명 화근이 될 것이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집법반선이 악미미의 목을 향해 부채를 내리쳤다.
“멈추시오!”
백자안이 급히 소리를 치며 이를 제지했다.
집법반선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신선재판의 결과에 대해서는 번복할 수 있지 않다.”
“악 소저를 살려주면 지존검의 행방을 가르쳐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