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양신 3
“어떻게 이런 일이······.”
독심반선이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
쨍그랑.
간신히 들고 있던 지존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백자안이 천천히 지존검을 잡았다.
“혈도를 찍힌 것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었지. 독심술이 특기라는 자가 그것도 간파하지 못했나?”
“으으······ 이전보다 무공이 더욱더 높아졌구나.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떻게 내 혈도를 찍은 것이냐?”
독심반선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독심술을 통해 백자안이 일부러 혈도를 찍혀 진실을 알아내려 한다는 것을 간파한 그였다.
그래서 그것을 역이용하여 절대 풀 수 없는 점혈법을 펼쳤다. 한데 오히려 자신이 당한 것이었다.
“중원삼성 그자들로부터 점혈을 당했을 때 점혈의 이론을 새롭게 깨우칠 수 있었지. 점혈이 곧 해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조금 전처럼 해혈이 곧 점혈이 되기도 하지.”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독심반선은 이제 주저앉아 있었다.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백자안이 지존검으로 내리쳐 목을 베면 되는 상황이었다.
“정심회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라. 정심회 소속이 아닌 반선들의 입장은 무엇이냐?”
“사실대로 말하면 나를 살려줄 것이냐?”
“너를 살려줘서 후환을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중원삼성 그자들이 내게 접근을 해올 테니까.”
백자안이 지존검을 높이 들었다.
혈도를 제압했지만 무형검의 고수는 기본적으로 해혈이 가능했다.
다시 말해 점혈의 효력이 영원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일 거라면 최대한 빨리 죽여야 했다.
게다가 내색은 하고 있지 않지만 조금 전 무리하게 무명점혈을 펼치느라 내상이 심한 상태였다.
자칫하면 그 역시 쓰러져 혼절할 수도 있었다.
“잘 가라.”
백자안이 지존검을 내리치려 했다.
원래 혈도를 제압당한 상대를 이런 식으로 죽이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기로 무림의 운명이 좌우되는 중차대한 상황이었다.
실기할 수는 없었다.
“잠깐!”
독심반선이 급히 소리쳤다.
아혈을 제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소리는 제법 컸다.
“무슨 일이냐? 죽기 전에 남길 말이라도 있느냐?”
“후후후!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내가 죽게 되면 자연적으로 네놈의 부모도 죽게 될 것이다. 특수대법을 펼쳐 내 목숨과 연동이 되게 만들어두었지. 그 특수대법을 해제하지 않는 이상 나를 죽이면 바로 네놈 부모를 죽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뭣이라고?”
백자안이 깜짝 놀라며 지존검을 내렸다.
“후후후! 놀랄 것 없다. 그래도 내 말을 믿는 것을 보니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구나. 또 한 가지 네 부모는 지금 지존각에 없다.”
“어디 계시느냐?”
“신선계.”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 믿기 어려우면 지금 수색을 해보아라. 나는 네놈이 찾아올 것을 예상하였다. 그래서 한 시진 전에 신선계에 있던 반선들의 도움을 받아 네 부모를 신선계로 보냈지. 너도 알겠지만, 신선계로 보내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특수 이동대법을 펼치면 순식간이지. 그러니 어서 내 혈도를 풀어라. 일각 이내에 풀지 않으면 네 부모를 죽이겠다.”
“원격으로 두 분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다. 어차피 네놈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먼저 네 부모를 죽여 그 시체를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느냐? 시체는 더욱더 쉽게 특수 이동을 할 수 있지. 이상이다. 선택은 네놈이 해라.”
독심반선이 득의한 표정을 지었다.
백자안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독심반선의 말을 믿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상대는 독심술의 달인이었다.
어느새 또 다른 심리전이 벌어진 것이다.
백자안이 마음을 편히 다스렸다.
그러자 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섭혼술이 있었지. 한번 시험해볼 만하다.’
백자안이 우수를 뻗어 독심반선의 정수리를 짚었다.
그리고 바로 섭혼술을 펼쳤다.
“으으······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독심반선이 기겁을 했다.
하지만 이미 섭혼술이 펼쳐진 후였다.
독심반선의 눈이 흐리멍덩해졌다.
섭혼술이 성공한 것을 안 백자안이 급히 물었다.
“내 부모님과 관련해 조금 전 한 네 말이 사실이냐?”
“으으······ 두 사람이 신선계로 끌려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데려간 사람은······ 우웩!”
독심반선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백자안이 당황했으나 이내 독심반선의 숨이 끊어진 후였다.
게다가 어떻게 된 것인지 시체 역시 빠르게 한 줌의 고름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마치 화골산에 당한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
백자안이 탄식했다.
그가 펼친 섭혼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상대의 무공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백자안이 아쉬워한 것은 독심반선의 주요 기억을 얻지 못한 것이었다.
신선계 내부의 사정을 알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독심반선 그자가 어쩌면 정심회 반선 중 가장 무공이 약한 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부모님을 신선계로 납치해간 자가 누구란 말인가. 혹시 중원삼성 그자들인가.’
백자안이 비탄에 잠겼다.
가족의 안위는 그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가치였다.
그의 부모가 납치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루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 아직 모른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백자안이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역용을 풀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당분간 현 상황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심회 반선들과의 싸움은 피하지 못할 터. 모든 무림인을 신선계로 데려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나만은 가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다시 혼란이 생길지 모른다. 물론 그 이전에 삼혈맹 무리를 완전히 제거해야겠지만······.’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심반선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고름 덩어리를 삼매진화로 태워 완전히 없애버렸다.
그때였다.
집무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백자안이 음파 차단을 해제한 후 물었다.
“누구십니까?”
“자안아. 우리다.”
“아버지.”
백자안이 깜짝 놀라며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 그의 부모인 백청과 유씨부인이 있지 않은가.
신선계로 끌려갔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 무사하자, 백자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농락당하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어떻게 된 겁니까?”
백자안이 급히 물었다.
백청이 말했다.
“나와 네 어미가 동시에 이상한 꿈을 꾸었단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끌려갔었다. 한참 후에 자안이 너에게 가보라는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지.”
“어머니도 같은 꿈을 꾸신 겁니까?”
“그래. 너무 이상해 이렇게 함께 온 것이란다. 너는 괜찮으냐?”
“네.”
백자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선계에서 누가 도움을 준 것인가. 하기야 반선들 모두가 정심회 반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튼 천만다행이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 일도 없으니 두 분은 이만 돌아가서 주무십시오. 밤이 늦었습니다.”
“그래. 그보다 이왕 온 김에 한 가지만 물어보자.”
유씨부인의 말이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어머니.”
“정말로 임 소저와 혼인을 할 생각이냐? 네가 갑자기 악 소저와의 정혼을 파기하고 임 소저와 약혼을 해서 정말 놀랐다. 우리 의견도 듣지 않고 말이다. 물론 우리는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찬성한다. 하지만 너답지 않은 행동 같아서 말이다.”
“그 부분은······.”
백자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독심반선 그자가 무림일통에 눈이 멀어 진짜 엉뚱한 일을 저질렀구나. 아무래도 날을 잡아 모든 사실을 밝혀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삼혈맹 무리가 반기를 들것이 분명하니······.’
백자안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일단은 지금 상황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복잡한 상황이 있으니 저를 믿고 지켜봐 주십시오.”
“알겠다. 우리는 네가 무사하면 그만이다. 그보다 이제야 내 아들이란 느낌이 드는구나. 사실 우리는 혼사보다도 네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야 내 아들 같구나. 혼사 문제는 너에게 맡기겠다.”
“네. 감사합니다. 언젠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릴 때가 있을 겁니다.”
백자안이 말을 한 바로 그때였다.
집무실 문이 열리며 다시 세 사람이 들어왔다.
한데 그들은 바로 백소영과 백자룡, 곽휘 세 사람이 아닌가.
“오라버니. 우리도 왔어. 두 분이 오라버니 걱정하며 가본다고 하시기에······.”
“하하하. 잘 왔다. 자룡이도 왔고, 곽 선생님도 오셨군요. 잘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릴 게 있었습니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형. 괜찮아? 피곤해 보이는데······.”
백자룡의 물음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무공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아 체구는 또래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괜찮다. 자룡이는 볼 때마다 무공이 늘어나는구나. 그보다 곽 선생님. 지존각 호위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지존수호대 무사 천 명 정도가 밤낮으로 경계를 서고 있지요.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경계를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날이 밝기 전까지 제가 지존각 주위에 특수 방어진법을 펼쳐두겠습니다. 아, 그리고 지존수호대의 대주가 어느 분이지요?”
“종남파 고수분이셨는데 지난번 소림사 전투 때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석이란 말입니까?”
“네.”
“그럼 지금 이 시각부터 곽 선생님께서 대주를 맡아주십시오.”
“제가 말입니까? 아직 무공이 부족해서······.”
“사양하지 마십시오. 지금 보니까 최근 심득을 얻으신 것 같은데, 충분히 자격이 되십니다. 지존수호대원들을 직접 지휘할 수 있어야 보다 효율적으로 호법 임무를 서실 수 있을 겁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곽휘가 기뻐했다.
출세에 그다지 욕심이 없어 보이던 그였다. 그렇다고 자리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향후 낙양에서 무관을 열 계획인 그에게 지존수호대주 경력은 매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얼마 후 집무실 안에서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알고 보니 그동안 독심반선은 업무가 많음을 핑계로 백자안의 가족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것 같았다.
백자안은 눈치채지 않게 적절히 질문을 가해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바로 악미미와의 정혼 파기였다.
백소영이 유독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에둘러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와 악미미 두 사람의 사이는 처음과 달리 최근 매우 좋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혼약 파기가 있고 급히 임요요와 약혼까지 진행이 되자 그녀 역시 놀란 상태였다.
“오라버니. 악 소저의 상심이 매우 커. 대체 왜 그랬던 거야? 아무리 마교 세력을 흡수해야 할 명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게 바로 정략혼인이 아니냐고? 물론 아직 실제 혼인한 것은 아니지만.”
“소영아. 됐다. 그 문제는 네 오라비에게 맡겨라. 아까 들어보니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더구나.”
백청이 말렸지만, 백소영은 막무가내였다.
백자안이 말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바로잡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정도만 알고 있어라. 악 소저는 어디에 있느냐?”
“몰라. 얼마 전부터 소식이 끊겼어. 매화검선께서도 악 소저를 찾으러 가셨다고 하고. 아무튼 오라버니가 책임져.”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