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분노 3
다시 돌아온 중원무맹 총단은 활기에 차 있었다.
수많은 무림인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군웅들이 모인 곳은 대연무장.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얼마 후 이번 승리의 주역인 백자안이 나와 군웅들에게 인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물론 진짜 백자안은 지금 군웅들 속에서 앉아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이곳으로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소림사 전투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소림사는 천하 각지에서 모여든 삼의맹 무사들의 최후 거점이었다.
마교에서 새로 온 십만 무사와 동방무맹에서 추가로 파견해준 이십만 무사가 모두 소림사에 모였다.
게다가 총단 점령 소식을 듣고 천하각지에 있던 무림맹 지부 무사와 각 문파 무사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삼혈맹은 이번에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소림사에 모두 모이도록 길을 터주기까지 했다.
이는 삼의맹 무사들을 한꺼번에 토벌하기 위한 계략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소림사 집결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삼혈맹 측에서도 난감한 문제는 있었다.
바로 소림삼신승이 펼쳐둔 달마수호진법 때문이었다.
소림사 외곽에 펼쳐진 이 진법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외부인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반면 천하각지에서 모여든 원군은 모두 무사히 소림사 경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소림사에 모인 무림인의 수는 칠십만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삼혈맹 역시 막대한 무사들을 보유했다.
기존의 혈교 이십만과 사사천교 이십만, 그리고 대인자문 삼십만 총 칠십만에 이어 동방에 주둔해 있던 대인자문 무사 이십만이 도착한 것이었다.
그 외 흑도를 비롯해 사마의 많은 무리가 대거 삼혈맹에 투신해 그 수는 삼의맹을 압도했다.
대략 백 사십만 정도로 삼의맹의 두 배 정도 수준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흘 전 두 맹의 전면전이 발생했다.
소림사를 방어하던 달마수호진법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거에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삼혈맹 무사들은 물밀 듯이 소림사 내부로 진입했다. 삼의맹 무사들은 동귀어진의 심정으로 이에 대항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소림사 내부에서 부족한 식량으로 버티던 삼의맹 무사들이 처음부터 밀린 것이었다.
반면 삼혈맹 무사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무엇보다 삼만에 가까운 사사천교의 특수 강시들이 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삼의맹 무사들은 아예 상대가 되지 못했다.
승기를 잡은 삼혈맹 무사들은 마치 독 안에 든 쥐를 쫓듯이 삼의맹 무사들을 몰살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바로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백자안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놀라운 무공으로 삼혈맹의 수장들, 즉 혈교주와 사사천교주, 대인자문주 세 명을 제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천혈곡에서 사라져 신선계로 끌려갔던 삼십만 무사들을 데리고 왔다.
중원무맹과 마교, 그리고 동방무맹 소속인 그들의 무공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아져 있었다.
그 결과 삼혈맹 무사들은 일방적으로 밀렸고, 급기야 삼혈맹 수장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미 백자안에 의해 혈도가 찍혔던 삼혈맹 수장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투항을 한 것이었다.
백자안은 그들 세 명에게 금제를 가한 뒤 다시는 무림을 노리지 말 것을 명했다.
삼혈맹 수장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삼의맹의 대승으로 끝난 것이었다.
이후에 알려진 이야기로는 혈교와 사사천교는 해체를 선언하고 그 수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또한 대인자문 역시 왜국으로 돌아갔으며, 동방 침공의 야욕 또한 거두었다고 했다.
물론 완전한 박멸을 바랐던 군웅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조치이긴 했다. 하지만 놈들의 싹을 완전히 없애려면 삼의맹의 희생 또한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기대했던 평화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무엇보다 절대 무공을 지닌 백자안의 복귀로 모두가 든든하게 생각했다.
삼혈맹이 다시 야욕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금제에 걸린 수장들이 지휘권을 계속 가지는 한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백자안이 금제를 이용해 삼혈맹 수장들을 죽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상이 백자안이 들은 이야기였다.
물론 대활약을 한 백자안은 자신이 아니었기에 가짜가 분명했다.
하지만 듣고 보니 어떤 빈틈도 없지 않은가.
특히 자신의 다른 신분인 무정공자, 풍운검객, 무명객 등이 세상에 밝혀진 점도 소름이 끼쳤다.
물론 그 사실은 백소영과 임요요가 밝혔을 수도 있겠지만, 대한들의 이야기로는 가짜 백자안이 직접 그 사실을 밝혔다고 했다.
백자안으로서는 자신의 다른 신분이 밝혀진 것에 대해 유감은 없었다.
어차피 사실대로 밝힐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백소영과 임요요에게 밝혔던 것이었다.
그보다 그가 진심으로 놀라고 있는 것은 가짜가 자신의 행세를 너무 능숙하게 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그자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지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실로 믿기 어렵구나. 그자가 신선계에 끌려갔던 삼십만 무사들을 데리고 온 것으로 봐서 중원삼성과 관련이 있는 사람 같은데, 혹시 신선계 반선 중 한 명인가. 나중에 보면 알게 되겠지. 지금은 내가 섣불리 나설 때가 아니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어찌 되었던 삼혈맹이 와해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얼마 후 음식과 술이 나오자, 백자안은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 궁금했던 내용을 하나하나 물어봤다.
“맹주님의 가족분들에 대한 소식을 아는 분이 있습니까? 한 달 전에 들었을 때는 풍운장원에 있던 분들이 모두 삼혈맹 놈들에게 붙잡혀갔다고 하던데······.”
“하하하. 어디 산속에 있다가 왔소? 맹주님의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시오. 한 달 전 맹주님께서 직접 총단에 들어와 구출했다고 들었소이다. 다만 지금은 풍운장원이 아니라 이곳 총단에 있는 지존각에 가족들이 모두 함께 지낸다고 들었소.”
“아!”
백자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가족들이 모두 무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했다.
백자안이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물었다.
“맹주님께서 마교 교주 자리까지 꿰차게 된 게 사실이오?”
“그렇소. 대승을 거둔 후 마교주 불패마왕이 전격적으로 교주 자리를 제의했다고 하오. 이전에도 한 번 제의를 했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우리 백 맹주님께서 대승적 결단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오. 한데 불패마왕이 그냥 교주 자리를 내주기는 싫었는지, 자신이 태상교주 자리를 맡는다고 했다고 하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신의 딸과 혼인을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하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맹주님께는 정혼녀가 있지 않습니까?”
“맹주님께서는 대의를 위해 결단을 내려 악 소저와의 정혼을 파기하고 임요요 소저와 약혼을 하셨소. 마교를 휘하에 들임으로 무림의 영구적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결단으로 다들 받아들이고 있소.”
“으음······.”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가짜 백자안에 대한 의구심이 깊어졌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군. 일단 그자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다. 그와 중원삼성의 관계 역시 제대로 밝혀야 한다.’
백자안이 마음을 다스렸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기야 이전에는 삼혈맹 전부를 상대해야 했다. 이제는 가짜 백자안 한 명만 상대하면 되었다.
무엇보다 직접 얼굴을 보게 되면 실마리가 풀릴 것도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곧 인사를 하러 나온다고 했으니······.’
백자안이 천천히 음식을 들며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지존각 쪽에서 한 무리가 나타났다.
바로 삼의맹 지휘부였다.
삼혈맹과 달리 삼의맹은 아직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삼의맹주가 중원무맹과 동방무맹, 마교의 수장을 겸하게 되어 단결이 더욱더 공고해지고 있었다.
가짜 백자안, 즉 삼의맹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십만 군웅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
짝짝짝.
백자안이 삼의맹주의 얼굴을 쳐다봤다.
자신의 본얼굴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걸음걸이도 똑같았으며, 기운도 비슷했다.
다만 몸에 지니고 있는 병장기는 따로 없었다.
‘그래도 지존검과 천마검은 가짜를 만들지 못했구나.’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이번에는 삼의맹주와 함께 등장한 삼백여 고수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삼의맹의 지휘부 고수들이었다.
만박서생, 단목수련, 불패마왕, 임요요. 김지혜, 부채도사, 백록공자 등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다만 정혼 파기 때문인지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선과 악미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자안이 누구보다 반가워한 것은 바로 백소영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 부모님과 백자룡, 곽휘 역시 무사함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속단할 수는 없었다.
모든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 삼의맹주였다.
그의 의도가 비록 좋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상황을 볼 때 배후에 중원삼성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아직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분명 중원삼성의 처음 계획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다른 반선을 내세워 내 흉내를 내게 했을 수도 있겠구나. 아니면 삼의맹주 저자가 바로 중원삼성 중 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중원무맹 총관 중원군자가 말했다.
“지금부터 대승 기념 만찬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맹주님의 인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와아아.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절대영웅의 등장에 환호하는 군웅들의 모습에 백자안마저 위축될 정도였다.
‘기분이 이상하군. 분명 내가 진짜 백자안인데 마치 가짜가 된 것 같다. 어쩌면 영원히 저자에게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백자안의 안색이 굳어졌다.
잠깐 삼의맹주를 봤지만, 기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무공 경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설마 나보다 몇 단계나 더 무공이 강하단 말인가. 어쩌면 무형검 중에서도 상급 경지에 오른 천외천 고수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저자가 바로 최종 대리자인가.’
백자안이 위축되는 마음을 다스렸다.
삼의맹주가 단상 앞으로 나왔다.
“영웅 여러분. 백자안입니다. 여러분의 성원으로 마침내 삼혈맹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소림사 대전 후 열흘이 지난 지금 모든 것은 안정이 되었습니다. 삼혈맹은 해체되어 더는 무림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조만간 그들 모두 회개를 시켜 무림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모두 기대해주셔도 좋을 겁니다.”
삼의맹주의 말에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삼혈맹 무리가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진 것은 사실이나, 다시 모여 화근이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 때문에 그 대책이 문제 되고 있었다. 한데 삼의맹주가 그 방법을 말한 것이었다.
‘회개라. 말이 회개이지 삼혈맹 출신 무사들마저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로구나. 의도가 의심스럽구나. 애초에 이게 다 계획된 것이라면, 그야말로 정사마를 아우르는 강호일통을 달성할 수 있겠군.’
백자안이 안색을 더욱더 굳혔다.
‘차라리 지금 내가 나가서 저자의 정체를 밝히는 게 좋지 않을까. 무림을 저자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절대권력을 가진 자가 실은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자라면 그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