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분노 1
[제37장] 분노
풍운장원.
백자안과 백소영의 집이기도 한 이곳은 지금 허허벌판과도 같이 황량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이 된 것이었다.
백자안과 백소영, 임요요 세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원 안에 아무도 없었다.
일행은 이웃 사람들로부터 그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삼혈맹이 중원무맹 총단을 점령하자마자 무사들이 들이닥쳐 백자안의 부모와 백자룡을 잡아갔다고 했다.
그들 세 사람을 지키려 했던 곽휘 역시 중상을 입고 끌려갔다고 했다.
백자안이 분노한 것은 물론이었다.
백소영 역시 당장에라도 가족을 구출하려 총단에 갈 기세였다.
하지만 그녀의 무공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맹주님. 제발 부탁드려요. 제 부모님과 동생을 구출해주세요.”
백소영이 눈물을 흘렸다.
백자안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소영아.”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백소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백자안이 본 얼굴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오라버니!”
“그래. 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내 정체를 밝혀야겠구나.”
백자안이 간단히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자신이 바로 무정공자이며 풍운검객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동방무맹주라는 사실까지 밝혔는데, 이는 임요요조차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분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이는 임 소저도 마찬가지요.”
“알았어.”
“알겠어요.”
백소영과 임요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소녀는 모두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백소영은 백자안을 만나 부모님과 동생을 구출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생각에, 임요요는 백자안이 자신을 믿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백소영이 급히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룡이와 곽 선생님을 어떻게 구할 생각이야?”
“지금 바로 총단에 들어갈 볼 생각이다. 놈들이 나를 견제하기 위해 인질로 잡아간 것이니 당장 목숨의 위험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 가둬놓았는지 바로 알아내기 힘들지 않겠어?”
“그건 걱정하지 마라. 이런 상황을 대비해 부모님과 자룡이, 그리고 곽 선생님 몸에 추적향을 묻혀 놓았으니까.”
“아!”
백소영이 기뻐했다.
임요요가 물었다.
“총단에는 혼자 들어가실 건가요?”
“그렇소. 임 소저와 소영이는 역용을 한 후 마차를 준비해두시오.”
“만날 장소는 어디로 정할까요?”
“서문 근처 백룡객잔이 좋겠소. 그곳에서 기다리면 최대한 빨리 구출을 해서 가겠소.”
“알겠어요. 바쁜 대로 인피면구를 쓰고 있을게요.”
임요요가 품속에서 인피면구 두 장을 꺼냈다.
그중 한 장은 자신이 쓰고 하나는 백소영이 쓰게 했다.
백자안은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추적향까지 뿌려놓았다.
이 추적향은 무형공력으로 만든 것으로 거리가 너무 멀지만 않으면 빠른 추적이 가능했다.
“그럼, 먼저 가겠소. 나중에 봅시다.”
“네.”
“오라버니. 조심해.”
* * *
스스슷.
땅거미가 조금씩 지기 시작할 무렵.
삼혈맹이 장악한 중원무맹 총단에 한 사람이 조용히 잠입했다.
총단 곳곳에는 횃불이 밝혀져 있어 숨을 곳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백자안은 뛰어난 은잠술로 인해 삼혈맹 무사들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었다.
백자안이 파악한 삼혈맹 무사들의 수는 칠십만 정도.
기감에 의해 파악한 숫자였다.
혈교 이십만, 사사천교 이십만, 대인자문 삼십만.
애초 파악한 숫자에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이는 최소한 십만 이상이 전사한 중원무맹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보다 질서정연하구나. 총단을 점령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장악하다니.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애초 총단을 비우는 게 아니었다.’
총단 내부의 한 전각 지붕 위에 있던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천혈곡에서 사라진 삼십만 무사와 합치면 벌써 타격을 입은 무사만 사십만이었다.
그중 십만은 전사했고, 나머지 삼십만은 신선계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신선계로 끌려간 사람 중에는 영웅무관주 위지경덕, 철혈객 등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도 상당했다.
물론 그 외 마교 무사들과 동방무맹 무사들의 구출도 시급했다.
특히 동방무맹 무사 십만은 맹주인 자신이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구나. 신선계 반선들의 도력이 무서울 정도다. 중원삼성 또한 그들 중 한 명으로 그 능력이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나의 능력으로는 중원삼성 중 한 명도 제대로 상대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그나저나 추적향이 끊겨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백자안이 난감해했다.
백청과 유씨부인, 백자룡, 곽휘 네 사람의 몸에 묻혀 놓았던 추적향이 총단에 들어오면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누군가 혹시 몰라 소독을 한 것인가. 의술이나 독술에 정통한 자가 있다면 추적향을 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추적향을 차단할 수 있는 공간에 가둬두었든지······.’
백자안이 전각 아래 삼혈맹 무사 천여 명 정도가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곳은 지하감옥이었다.
무림에서는 금마옥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철저히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을 보니 그사이에 많은 사람을 가둬놓은 것으로 보였다.
뇌옥에 갇힌 사람들은 보나 마나 새벽에 있었던 전투 중 붙잡힌 포로들일 가능성이 컸다.
삼혈맹 입장에서도 무조건 죽이는 것보다 투항을 받아 수하로 삼는 것이 유용한 수단이었다.
아무리 천하 각지에서 무림인들이 모였다고는 하나 그것은 한계가 있는 법.
결국 무림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려면 각 문파의 총단 내지 본산을 점령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문파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수하로 받아 각개격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장들을 자신들 입맛에 맞는 자로 교체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무림 전체에 백도의 뿌리를 뽑는 것으로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 몇 명은 살려둬 전향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구나. 뇌옥에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다.’
백자안이 결단을 내리고 전각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물론 은잠술을 푼 상태였다.
얼굴 역시 역용을 모두 푼 상태로 아까 백소영과 임요요에게 보여준 그대로였다.
그야말로 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소란을 일으키면 이놈들이 부모님과 자룡이를 인질로 삼아 나를 협박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뇌옥으로 바로 들어가서 조사를 한다. 뇌옥은 지하 광장과 연결된 곳이니 여차하면 총군사 말대로 화약을 폭발시킬 수도 있겠군.’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여차하면 화약을 터뜨려 지하 광장으로 유인한 무사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뇌옥에 갇힌 사람들도 몰살당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해야 했다.
뇌옥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출한 후에야 가능한 방법이었다.
“앗! 네놈은?”
“적이다!”
삼혈맹 무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자안이 너무나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백자안은 이번 기회에 전사한 동방무맹 무사 십만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스스로 판단하건대 그의 무력은 지금 중원삼성을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었다.
내공 역시 무한대에 가까워 오래도록 싸워도 지칠 가능성은 적었다.
“네놈은 누구냐?”
삼혈맹 무사 한 명이 소리쳤다.
이미 천여 명의 삼혈맹 무사들이 백자안을 포위한 상태였다.
다만 백자안의 기도가 너무 강해 쉽게 공격해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백자안이다. 내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곽 선생님은 어디에 있느냐?”
“후후후! 그놈들은 모두 죽었다. 곽휘 그놈이 무리해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리 무사들이 한꺼번에 죽여 버렸지. 우리 목적은 어차피 네놈을 유인하는 것이었으니까 아무렴 상관없지.”
경계무사 중 수장으로 보이는 한 흑의노인의 말이었다.
그는 사사천교 장로로 암사객(暗死客)이란 자였다.
“뭣이라고?”
백자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매우 분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럼 추적향이 끊어진 것도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백자안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가족은 그에게 있어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부모님과 동생 자룡이가 죽었다니.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극도의 분노 때문일까.
그의 단전에 있던 천마력이 꿈틀거렸다.
이미 무명심법 덕분에 무명진기로 흡수된 천마력이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독자적으로 꺼내 활용할 수 있었다.
백자안이 자신도 모르게 천마검을 빼 들었다.
천마룡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가 연마한 무공 중 대량살상용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천마룡이었다.
물론 이 천마룡은 무공이라기보다 하나의 환술이었다.
일단 천마룡을 만들면 이 천마룡이 백자안이 뜻을 알고 반독자적으로 싸움을 하게 되어 있었다.
백자안이 천마검을 높이 들었다.
순간 검명과 함께 붉은 기류가 뻗어 나오며 천마룡이 만들어졌다.
놀란 암사객이 급히 명을 내렸다.
“어서 공격하라. 놈은 혼자다. 저 용 역시 허깨비에 불과하다.”
와아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천여 명의 무사들이 물밀 듯이 공격을 가해왔다.
그때였다.
백자룡이 신형을 솟구쳐 천마룡 위에 올라탔다.
환룡에 불과하지만, 실제 용처럼 천마룡이 울부짖었다.
피에 굶주린 울음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화르륵.
천마룡의 입에서 화염이 쏟아지며 사사천교 무사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크윽!”
“으윽!”
화염이 한번 쏟아질 때마다 수십 명이 넘는 무사들이 숯덩이가 되었다.
사사천교 무사들이 일제히 장풍과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천마룡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열기에 막혀 그대로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백자안이 천마룡의 등에 올라타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천마력을 지닌 사람은 천마룡의 화염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에 백자안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어서 지원을 요청하라!”
암사객이 고함을 질렀다.
땡땡땡.
종소리가 총단 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백자안은 따로 장풍을 날려 지하 뇌옥으로 내려가는 철문을 부쉈다.
금마옥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백자안이 천마룡의 등에서 내려 금마옥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천마룡은 독자적으로 계속 화염을 뿜어내며 사사천교 무사들을 불태웠다.
백자안이 금마옥 안으로 들어간 것은 가족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예상과 달리 금마옥 안은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죄수도 없었고 간수도 없었다.
금마옥 입구에 있던 무사들이 오직 백자안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상하군. 애초에 부모님과 자룡이를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던 것 같구나.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인가. 밖에 나가서 아까 그놈을 잡아서 물어봐야겠다.’
백자안이 다시 금마옥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콰쾅 하는 폭음과 함께 금마옥 입구가 무너졌다.
기관이 작동되어 입구가 막힌 것이었다.
동시에 밖에서 들리던 천마룡의 울음도 끊겼다.
백자안의 기운이 연결되지 않아 천마룡 역시 그 모습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내가 함정에 빠졌구나. 하지만 반대쪽에 지하 광장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지. 일단 그쪽으로 놈들을 유인한다.’
백자안이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휙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