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지존력 3
다시 불거진 합의추대에 대한 논의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 논의의 중심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지휘부 고수들이 있었다.
합의추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맹의 장로원과 원로원 두 곳에 있었다. 그 핵심 세력이 바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였다.
구체적으로 장로원과 원로원 구성원들의 칠할 이상의 찬성이 있으면 합의추대가 가능했다.
그들은 따로 모여 논의를 했으며, 그 결과 찬성과 반대 세력으로 나뉘었다.
찬성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지휘부의 대다수였다.
반대는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선을 중심으로 한 소수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제외한 문파 고수들은 대체로 중립적이었다.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만박서생과 단목수련, 태상장로 천수노인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반대하는 문파는 오직 화산파뿐이었다.
만박서생과 천수노인은 맹 내의 입지에도 불구하고 그 세력이 너무 미약했다.
다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측도 합의추대를 무조건 찬성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소림방장 공무대사(空無大師)가 말했다.
“아미타불. 독고 가주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수락한다면 합의추대를 추진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맹주가 되신 후 차기 맹주 자리는 우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주실 것을 약속해주십시오.”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시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맹주를 뽑긴 뽑을 겁니다. 그 방식은 그때 가서 결정하게 될 겁니다. 아, 그리고 맹주 임기는 십 년입니다. 다시 말해 십년 후에는 맹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수락하지요. 저에게 사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림 평화를 위하는 것이 주목적이니까요.”
독고승이 흔쾌히 수락했다.
맹주 임기가 십 년이고 차기 맹주 지정권이 박탈된 셈이지만 그는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상황이 엉뚱하게 흘러가는구나. 저런 약속은 맹주가 된 후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거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맹주 자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었구나.’
백자안이 내심 한탄했다.
하지만 그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비록 팔인 본선 진출권을 따냈지만, 합의추대를 결정하면 본선 비무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만박서생이 급히 말했다.
“불가한 일입니다. 이미 내일 팔인 본선에 올라갈 사람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들의 반발을 어떻게 할 겁니까?”
“아미타불. 무림대의를 위해 양해해야겠지요. 위기 상황이니 더 이상의 논의는 삼갑시다. 비록 화산파 한 곳이 반대를 하나 원로원과 장로원 구성원의 구할 이상이 찬성을 표시했기에 합의추대를 결정하겠습니다. 공식적인 취임은 내일 영웅대회에서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알고 다들 준비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맹주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독고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짝짝.
박수가 쏟아졌다.
비록 내일 공식적인 취임식이 있어야 정식 맹주가 되지만, 이미 맹주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흥! 이거 제멋대로군. 우리 화산파는 반대요. 차라리 맹주를 뽑는다면 독고 가주보다 다른 분을 추대해야 마땅하오.”
“누구를 추대한다는 말씀이오? 당금 무림에 독고 가주만 한 고수가 있다는 것이오?”
“그렇소. 백자안 공자가 복귀하면 능히 맹주 자리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오.”
“흥! 백자안 그자는 겁이 나서 어디론가 숨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무슨 맹주감이란 말이오?”
공무대사의 말이었다.
보다 못한 백자안이 나섰다.
“우리 풍운회 역시 합의추대를 반대합니다. 아울러 맹주 임기 제한과 차기 맹주 자리를 특정 세력에 미리 준다는 약속 또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풍운검객! 그 무슨 말이오? 합의추대는 맹의 장로원과 원로원의 독자적 권한이오. 그대가 간섭할 일이 아니오. 정 마음에 안 들면 맹을 탈퇴하시오.”
공무대사가 백자안을 노려봤다.
백자안 역시 태연하게 그의 눈빛을 받았다.
공무대사는 소림방장으로 구대문파의 대표라 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십 년 후 독고승이 맹주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가 차기 맹주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좋습니다. 지금 이 시각부터 우리 풍운회는 맹에서 다시 탈퇴하여 독립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리설아와 백소영, 백리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자안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독고승이 껄껄 웃었다.
“풍운회주. 고정하시오. 아무래도 귀하 역시 맹주 자리를 원했던 것 같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상심한 것은 이해가 가오. 하지만 지금은 전 무림이 힘을 합쳐야 할 때요. 풍운회가 전격적으로 맹에 들어온 지 며칠이 되었다고 벌써 탈퇴하려는 것이오? 어떻게 해야 마음을 돌릴 수 있겠소?”
독고승이 미소를 지었다.
이미 맹주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였다.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 여유가 있었다.
그때였다.
김지혜가 일어났다.
“좋은 수가 있어요. 내일 대회 때 독고 가주께서 모든 도전자를 대표해 풍운회주의 도전을 받아주세요. 물론 그 전에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다짐을 두 분 모두 해야겠지요. 풍운회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습니다. 내가 만약 지면 풍운회주 자리를 독고 가주께 넘기겠습니다.”
백자안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이제 관심사는 독고승의 수락 여부였다.
그가 비무 방식을 꺼려한 것은 분열을 방지하자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자안과의 대결마저 피하는 것은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는 상황이 되었다.
독고승이 망설이자, 부채도사가 말했다.
“독고 가주께서 풍운회주의 도전을 받아주면 우리 동방무맹 무사 역시 계속 힘을 보탤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방으로 철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독고 가주의 무공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과연 우리가 서로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무공을 지니셨는지 확인이 되어야 서로 신뢰가 있지 않겠습니까? 특히 풍운회주의 무공은 어제 입증이 되었으니 독고 가주께서 승리를 거두신다면 모든 사람이 승복할 겁니다. 그야말로 모든 분란을 잠재울 수 있는 묘수이지요.”
독고승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어차피 합의추대가 되면 관례로 최소 한 분 정도의 도전을 받아야 하니, 풍운검객의 도전을 받아주겠소.”
독고승이 수락한 후 눈을 빛냈다.
‘후후후. 어차피 백자안 그놈만 아니면 된다. 풍운검객 저자가 구룡객을 이겼다고는 하나, 내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다. 내 무공은 이제 구룡객 같은 고수 백 명이 붙어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높아져 있으니까. 저놈을 이긴 후 정식 맹주가 되면, 그때부터는 중원삼성과 약속한 대로 내가 중원 무림을 다스리는 최종 대리자가 될 것이다.’
독고승이 잠시 이전에 만났던 중원삼성을 떠올렸다.
중립을 지키며 무림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그에게 그들은 파격적인 제의를 했다.
그것은 바로 중원무림을 자신들 대신 다스려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황당한 이야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삼혈맹의 배후에 중원삼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던 그였다.
그래서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 결과 중원삼성이 진심으로 대리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 한 명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구체적인 계획 또한 확실했다.
중원무맹주가 되어 삼혈맹과 화친을 한 후 서서히 삼혈맹 수뇌부를 제거해 그 세력마저 흡수하라는 것이었다.
삼혈맹 수뇌부를 제거하는 것은 중원삼성이 맡아서 해준다는 약속까지 해주었다.
독고승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거부하기에 중원삼성의 무공이 너무 높았다.
간단하게 자신의 혈도를 찍어버린 것이다.
무림일통을 하여 그 수장이 되는 것은 사실 독고승의 오랜 꿈이었다.
삼혈맹과 거짓 화친을 맺고 나중에 그들마저 제거하는 것 또한 그의 생각과 일치했다.
물론 그 화친이 일종의 계략이라는 사실을 지금 시점에서 밝히지 못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중원삼성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 일단 그들의 제의를 수락했다.
수락 즉시 중원삼성은 특수 단약으로 독고승의 무공을 극한으로 올려주었다.
다만 한 가지 주의를 시켰다.
중원무맹주가 되기 위해 절대 비무 방식을 택하지 말라는 것.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회유해 합의추대 쪽으로 진행하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백자안 때문이었다.
중원삼성 말로는 자신들의 목표에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이 바로 백자안이었다. 그가 중원무맹주가 되면 상황이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독고승 역시 백자안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아들인 독고준이 백자안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독고 가주께서 대승적인 마음으로 풍운회주의 도전을 받아주셨으니, 내일 대회는 두 분의 대결에서의 승자가 맹주가 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다들 내일 대회에 참석해주시길 바랍니다.”
공무대사의 말에 취의청에 있던 고수들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일방적인 결정에 불만어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백자안에게 기회가 한번 주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 백자안이었다.
“풍운회주.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취의청에서 나가기 전 만박서생이 백자안에게 다가왔다.
“네.”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지요.”
만박서생이 신중한 표정으로 백자안을 안내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군사부였다.
* * *
백자안과 만박서생의 대화는 제법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주로 만박서생이 말하는 것을 백자안이 듣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요지는 내일 대회에서 최선을 다해 백자안이 꼭 맹주가 되라는 것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뜻하지 않게 내일 독고승과 단독 대결을 벌이게 된 그였다.
그로서도 어떻게든 독고승을 이겨 중원무맹주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가까이서 본 독고승은 생각보다 위험해 보였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독고 가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박서생의 물음에 백자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분 역시 어떤 압력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 압력이라면?”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독고 가주가 맹주가 되면 그가 한 약속이 지켜지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으음, 지금으로선 회주께서 그를 꺾고 맹주가 되는 것뿐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임기 제한이라든지 특정 세력에 차기 맹주 자리를 보장한다든지 하는 그런 일이 없어질 겁니다.”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네. 아, 또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만약 맹주가 되시면 마교와는 어떤 관계를 취할 겁니까?”
“동맹을 맺으려 노력할 겁니다. 그렇게 해야 적들과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전례를 생각하면 마교가 제일 못 믿을 집단이지만, 교주인 불패마왕은 아직 실언한 적이 없으니까요.”
만박서생이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백자안과 뜻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의련 무사들이 다시 탈퇴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독고 가주를 이기는 겁니다. 압도적인 승리를 부탁합니다. 구룡객을 쉽게 이기셨으니 가능하리라 봅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만 구룡객과 독고 가주의 무공은 서로 비교하기가 곤란합니다. 제가 보기에 독고 가주의 무공이 최근 급상승한 것 같으니까요. 아마 예측불허의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럼 오늘은 여기서 푹 쉬고 내일 출전 준비를 해주십시오. 아마 총단 내에서 이곳 군사부가 가장 안전할 겁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