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풍운회 3
구룡객의 승리가 선언되자 군웅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오늘 풍운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무적세가에 반감이 있는 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 들어 부쩍 무적세가를 중심으로 한 정의련 쪽에서 삼혈맹과의 화친 주장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점은 만박서생을 비롯한 중원무맹 지휘부로서도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정의련 이십만 무사를 우군으로 들이지 못하면 전쟁의 승리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 때문일까.
중원무맹 지휘부에서도 제3의 인물이 맹주가 되는 것을 선호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지휘부의 중심세력이라 할 수 있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각각 자파 고수를 대회에 나가게 해 맹주 자리를 노리고 있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적세가주 독고승의 무위를 뛰어넘는 것은 어려운 상황.
은자림 고수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고는 있지만, 그것도 안 된다면 차라리 무적세가주 대신 제3의 인물을 선호하는 상황이었다.
그 제3의 인물 중 가장 거론이 많이 되는 사람은 바로 백자안이었다.
백자안은 중원무맹의 실세라 할 수 있는 만박서생과 단목수련과도 친분이 깊었다. 무엇보다 일반 무림인들의 지지가 대단했다.
그 때문일까.
오늘 풍운대회에서 혹시 백자안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들도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한데 백자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상황은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힘들게 결성된 풍운회마저 무적세가 쪽에 넘어간다면 독고승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었다.
다만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독고승의 입장 표명이었다.
아직 삼혈맹과의 화친 문제에 대해 그가 직접 밝힌 바는 없었다.
그 때문에 중원무맹 지휘부로서도 아직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정의련 해체가 공식적으로 선언되는 내일 결정될 가능성이 컸다.
내일 정의련이 해체되고 그 세력이 모두 중원무맹에 흡수된 후 모레 새 맹주를 뽑게 되는 절차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체 선언 때 어떤 식으로든 독고승의 입장 표명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복잡한 상황을 의식해서일까.
구룡객이 말했다.
“내일 본련의 해체 선언이 있을 것이오. 그때 련주께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말씀이 있을 것이니, 여러분은 너무 과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오.”
“그 말은 무적세가주께서 맹주가 되더라도 삼혈맹와 화친을 맺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오?”
영웅객의 물음이었다.
구룡객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소.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문제는 아마도 련주께서 맹주로 선출된 이후 결정되리라 생각하오.”
“그럼 내일은 입장 유보 선언이 있겠구려.”
“그렇다고 보면 될 것이오. 한마디 더 보탠다면 삼혈맹과의 화친이라 해서 우리가 굴복한다는 뜻이 아니오. 다만 그들에게 어느 정도 세력권을 인정해주고 우리로서는 시간을 벌자는 것이오. 솔직히 우리 전력이 열세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의 전면전은 패망의 지름길이 될 수 있소. 하지만 놈들이 무리한 조건을 걸어온다면 바로 전면전을 벌여 놈들을 쓸어버릴 것이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구룡객의 말에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소문과 달리 무적세가주가 삼혈맹의 음모에 일방적으로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백자장이 안색을 굳혔다.
‘일단 맹주가 되면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겠구나. 맹주가 되면 명을 내릴 수 있고, 그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 내 직감이지만 이미 무적세가주는 중원삼성 쪽과 모종의 합의를 한 것 같다. 하기야 중원삼성 쪽에서 마교나 혈교, 사사천교, 대인자문의 수장들보다 군웅들의 반발이 적은 무적세가주를 내세워 무림을 다스리려는 것이 편하겠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더욱더 상황이 어려워지겠군. 무적세가주가 맹주가 된 후 중원무맹의 이름으로 피의 숙청이 벌어질 수 있을 테니까.’
백자안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구룡객이 풍운회주가 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둥둥둥.
“구룡객에게 도전할 분은 나오십시오.”
영웅객의 말에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위지경덕을 일방적으로 이긴 구룡객이었다.
그를 대적해서 이길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실력도 안 되는 사람이 나선다면 자칫 세 번의 기회 중 하나를 헛되이 날리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백자안이 막 도전자로 나서려 할 때.
한 사람이 먼저 나왔다.
“제왕무관(帝王武館) 관장 제왕검객(帝王劍客)이오. 내가 도전하겠소.”
제왕검객이 나서자 군웅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제왕무관 역시 낙양의 십대무관 중 하나로 소속 관원 수로는 최고였다.
특히 관장 제왕검객은 무공이 뛰어나 그 명성이 자자했다.
사실 무공만 따진다면 그가 회주가 되어야 마땅했다.
다만 그는 백자안의 복귀를 원하고 있어 회주 자리를 위지경덕에게 양보한 바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백자안과 친분이 깊은 위지경덕이 회주가 되어야 나중에 회주 자리 승계가 원활할 것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한데 구룡객이 위지경덕을 이기자, 부득이 그가 나선 것이었다.
구룡객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그 역시 제왕검객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오늘 독고승의 명을 받아 이곳으로 왔을 때 제왕검객과의 대결을 예상하였다.
하지만 회주로 합의 추대된 사람은 의외로 위지경덕이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쉽게 그를 이길 수 있었다.
“구룡객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나 역시 마찬가지요.”
구룡객이 검을 다시 들었다.
제왕검객 역시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자, 제왕검객이 신형을 솟구친 후 곧바로 구룡객을 향해 날아갔다.
휙휙휙.
그의 신형이 빠르게 회전하며 파공성이 났다.
검을 앞으로 여전히 계속 내밀고 있었기에 구룡객으로서는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누군가 소리쳤다.
“회전검법(回轉劍法)!”
그랬다.
제왕검객이 처음부터 자신의 최고 절기를 펼친 것이었다.
이 회전검법은 다른 검법과 달리 본신 내공과 검법을 일체화시키는 특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검기나 검강을 날려도 자신의 내공을 전부 사용하는 것은 드물다.
하지만 회전검법은 검과 몸을 하나로 묶어 그 힘을 극대화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단점은 연속해서 여러 번 사용하기 힘들다는 것인데, 제왕검객은 구룡객만 이기면 나머지 시합은 다른 무공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흥!”
구룡객이 코웃음을 치며 왼손을 들어 장풍을 날렸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제왕검객의 신형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때였다.
구룡객이 검을 비수처럼 그대로 던져버렸다.
스팟.
“으윽!”
검이 옆구리를 스치며 제왕검객이 신음을 냈다.
구룡객이 신형을 솟구쳐 오른 주먹으로 제왕검객의 턱을 가격한 것은 그 직후였다.
제왕검객이 신음과 함께 비무대 밑으로 떨어졌다.
검을 회수한 구룡객은 어느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태연히 서 있었다.
“구룡객의 승리요!”
영웅객이 굳은 얼굴로 다시 구룡객의 승리를 선언했다.
함성은 터져 나오지 않았지만 놀라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제왕검객의 명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접전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구룡객의 압승이었다.
“이제 두 명 남았습니다. 도전하실 분은 나오십시오.”
영웅객의 말에 군웅들이 술렁였다.
위지경덕과 제왕검객이 패한 마당에 누가 다시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하지만 북소리가 열 번 울릴 때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구룡객이 회주가 되는 것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백자안이 이번에야말로 나서려는 때.
또다시 한 사람이 먼저 나왔다.
한데 그는 바로 대륙표국주 백리관이 아닌가.
평소 그 무공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였다.
하지만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다들 알고 있었다.
백리관이야 말로 숨은 고수라는 것을.
백리설아 역시 흥분한 표정이었다.
항상 홀로 수련을 하며 자신의 무공 수위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부친이었다.
이제야 그 실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이 들자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백리관 본인은 어딘지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나선 것은 풍운회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나서지 않아 구룡객이 회주로 확정되는 것보다 자신이라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호오! 백리 국주께서도 무공을 연마하셨구려. 하기야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는 소문은 얼핏 들은 바 있었소.”
구룡객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앞선 대결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인가.
처음의 조심스러운 표정과 달리 거리낌 없어 보였다.
하기야 그에게도 야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번에 중원무맹의 부맹주가 되는 것이었다.
풍운회를 장악하게 되면 그 공을 인정받아 독고승에게 부맹주 자리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호위무사로 살 수는 없다. 궁극적인 목표는 무림맹주이지만 이번에는 부맹주로 만족할 것이다.’
구룡객이 득의한 표정을 지었다.
백리관이 담담히 말했다.
“시작합시다.”
“그럽시다.”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시작된 대결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장력으로 겨뤘는데, 백리관이 한걸음 뒤로 더 밀리며 비무대 밑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다만 그 무공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구룡객이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물론이었다.
자칫 방심했으면 자신이 패할 수도 있었다.
패배한 백리관으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였다.
실전 경험 부족이 가장 컸다.
패하더라도 족히 수백 합을 겨룰 수 있었지만, 너무 긴장했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백리설아가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나는 괜찮다. 기혈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다. 그나저나 저자를 누가 막을지 걱정이구나.”
백리관이 안색을 굳혔다.
그러는 사이 북소리는 울리고 있었다.
둥둥둥.
열 번 울릴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정말로 확정이었다.
보다 못한 곽휘가 나서려는 순간.
한 사람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한데 그는 바로 백자안이 아닌가.
이번에도 다른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둘러 올라온 것이었다.
하지만 군웅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도 그럴 것이 풍운검객으로 역용한 그를 아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귀하는?”
영웅객의 물음에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풍운검객이라 합니다.”
별호가 밝혀지자 군웅들의 반응은 더욱더 싸늘해졌다.
역시 예상대로 무명소졸이었다.
이제는 다들 낙담하는 분위기였다.
군웅들이 보기에 백자안은 실력도 없는 자가 이름이라도 알리려고 섣불리 나선 것에 불과했다.
낙담은 곧 거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소중한 마지막 기회를 이렇게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함도 컸다.
곧바로 백자안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대부분 포기하고 내려가라는 내용이었다.
심지어는 거친 욕설을 하는 자도 있었다.
백자안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한번 폈다.
순간, 구름 같은 기세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조금이라도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정말로 끌려 내려갈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가까이 있던 영웅객이 그 기세를 느끼고 얼른 말했다.
“규정에 따라 도전자로 나서신 분이니 다들 조용히 하십시오. 바로 대결을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