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사면초가 3
풍운장원에서 하룻밤을 보낸 백자안은 가족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아직 자신이 백자안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하지만 이런 휴식도 이제 마지막이었다.
낙양성 밖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오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타개책이 필요한 때였다.
백자안은 당분간 가족 특히 부모님과 백자룡을 보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여유 아닌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중원무맹 측에서도 백자안에게 충분한 휴식을 권했다.
그들이 동방무맹 무사들에게 바라는 것은 이미 말했지만 총단 방어였다.
동방무사 십만이 주둔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효과가 기대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무림인들의 사기 진작이 예상되었다.
최근 모든 무림인들로 하여금 총단에 모이도록 총소집령을 내린 바 있었다.
기한은 한 달 이내였다.
그 소집령에 따라 수많은 무림인이 낙양 쪽으로 오고 있었다.
개별적으로 적들과 싸우기에는 너무 벅차고 피해가 막심했다.
최후의 반전을 노리기 위해 중원무맹 전체가 한데 모이는 데 대부분 동감했다.
이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최소한의 방어 병력을 본산에 남기고 서둘러 낙양 쪽으로 오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삼혈맹의 태도였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무림인들을 죽이고 있었으나, 낙양 쪽으로 도주하는 사람들을 구태여 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 무림인들을 낙양 쪽으로 모는 것 같았다.
중원무맹 지휘부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호지세였다.
양측의 전략이 각기 달랐다. 저마다 복안이 있을 것이었다.
물론 몰리는 것은 중원무맹 측이었다.
전력 면에서 단순 비교해도 세 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마교 한 곳만 대적해도 벅찬 상황. 마교와 맞먹는 세력으로 평가받는 사사천교와 혈교까지 가세해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게다가 최근에는 대인자문 무사들까지 대거 중원에 나타나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대인자문으로 인해 남해무림연합 무사들의 발목이 잡혔고 그것은 큰 타격이었다.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바로 정의련의 중립 선언이었다.
원래 중립을 표방하던 곳이라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지만, 혈교까지 가세한 삼혈맹의 발호를 그냥 두고 보고 있는 것에 많은 사람이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방무맹의 지원은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하지만 동방 무림의 상황 역시 가변적으로 어찌 될지 몰랐다.
언제든 철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중원무맹 지휘부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무명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 푹 쉬다가 갑니다.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무명객이 김지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청과 유씨부인 등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 유씨부인의 아쉬움은 더했다.
아들의 소식을 가져온 손님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아들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좀 더 지내셔도 되는데······.”
유씨부인의 말에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다들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적들이 천하 무림을 휩쓸고 있고, 곧 이곳 낙양 역시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쪼록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백자안이 인사한 후 김지혜과 함께 풍운장원을 떠났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물론 중원무맹 총단이었다.
여독도 풀렸고 마음의 준비까지 한 백자안이 본격적으로 이번 전쟁에 개입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것일까.
총단 대문 앞에 도착한 무명객과 김지혜는 무사들이 긴급히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총단 내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김지혜의 물음에 대문을 지키던 순찰당 무사가 급히 말했다.
“간밤에 맹주님께서 피습을 당하셨습니다.”
“아! 어찌 그런 일이······.”
“그게 정말인가요?”
백자안과 김지혜가 깜짝 놀랐다.
“네. 안 그래도 총군사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동방무맹주님이 오시면 급히 지존각으로 모시라고. 어서 절 따라오십시오.”
“맹주님의 상태는 어떤가요?”
“위독하십니다. 어서.”
“아!”
백자안과 김지혜가 급히 지존각으로 향했다.
* * *
백자안과 김지혜가 도착했을 때는 단목군이 이미 숨진 후였다.
단목수련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실신했다. 만박서생 등 지휘부 고수들 역시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백자안의 물음에 만박서생이 말했다.
“맹주님께서 간밤에 괴한들의 침입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있었습니다. 중원삼성이란 말을 마지막으로 하셨지요. 아무래도 삼혈맹과 대인자문의 배후라는 그놈들의 짓인 것 같습니다. 놈들이 불시에 맹주님을 찾았고 놈들의 제의를 거부하자 시해를 한 것이지요.”
만박서생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중원무맹주 단목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혼란을 부채질할 것이 확실했다.
백자안은 한쪽에 실신해 있는 단목수련에게 내공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 장내는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시신 수습과 함께 빈소가 차려진 것이었다.
단목수련 역시 깨어나 눈물과 함께 부친의 시신을 지켰다.
곳곳에서 통곡하는 사람이 있었다.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도 많았다.
백자안 역시 중원삼성이란 자들에 대해 다시금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전에 천마동에서 귀면탈 소녀에게 들은 바 있었다.
‘하기야 천하제일인으로 평가받던 불패마왕 역시 중원삼성이란 자들에게 붙잡혔다고 했었지. 그것만 보더라도 그 무공이 엄청날 것은 분명하다. 아마 최소한 무형검의 경지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단목수련과 만박서생 등 중원무맹 지휘부에 위로를 전하고 총단 내 거처로 돌아왔다.
그와 김지혜 두 사람이 묵고 있는 별채의 이름은 안심각(安心閣)이었다.
백자안과 김지혜는 안심각 응접실에 앉아 대책을 숙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은 부채도사와 백록공자도 당도해 긴급회의가 열렸다.
“중원무맹주가 이렇게 급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부채도사의 물음이었다.
백자안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알기 힘드네. 총순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제 생각으로는 장례를 마친 후 새 맹주 선출 문제가 떠오를 것 같아요. 이는 우리 동방무맹이 겪었던 과정과 비슷하지요. 위기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줄 맹주를 어서 빨리 선출하지 못하면 더 큰 혼란이 생길 테니까요.”
“일리가 있소. 그럼 누가 중원무맹의 새 맹주가 되겠소? 긴급한 상황임을 고려해 합의추대가 유력한 것 같은데······.”
“합의추대보다는 역시 비무를 통해 맹주를 선출할 가능성이 클 거예요. 지금 전 무림인들이 냑앙으로 모이고 있는 데다가, 중원무맹주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 더 많은 무림인이 모여들 거예요. 돌아가신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뜻을 품고 있던 고수들에게는 이번이 맹주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까요. 그리고 이전에 우리 동방무맹에서도 확인되었듯이 맹주를 뽑는 영웅대회를 여는 것이 불만도 제일 적고 힘의 결집을 위해 효과적일 거예요. 다만 과연 누가 맹주가 될 것인가 하는 게 문제예요. 아무나 맹주가 되어서는 절대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없을 거예요.”
“으음, 보통 일이 아니구려. 일단 우리로서는 상황을 관망하는 게 필요할 듯하오. 물론 중원무맹에 대한 지원 의사를 다시금 확인해주어 그들로 하여금 안심케 하는 게 필요할 것이오.”
“맹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 * *
중원무맹 총군사 만박서생이 백자안이 머무르고 있는 안심각에 찾아온 것은 사흘 후였다.
그동안 단목군의 장례는 성대히 치러졌다.
백자안 역시 빈소에 가서 조문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신분상 외지인이라 할 수 있었기에 새 맹주 선출과 관련한 긴급회의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단 사흘 만에 낙양에 무림인들이 대거 모여든 것은 사실이었다.
소식을 들은 무림인들이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서둘러 온 것이었다.
그중에는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선과 그녀의 딸 악미미도 있었다.
그동안 화산파는 삼혈맹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어 문하 제자 절반이 사망한 상태였다.
더는 본산을 지킬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매화검선은 이번에 아예 모든 화산파 무사들을 이끌고 총단으로 왔다.
다른 주요 문파 역시 대동소이했다.
조만간 새 맹주 선출 대회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서둘러 낙양으로 왔거나 오고 있었다.
특히 이번에도 삼혈맹은 낙양으로 향하는 무림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꺼림칙했지만 이미 대세를 삼혈맹에게 빼앗긴 무림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충격적인 소식도 있었다.
대인자문주가 직접 무사들을 이끌고 남해검파를 공격한 사실이었다.
이 공격으로 남해무림연합은 무너지고, 사망자가 수만에 달한다고 전해졌다.
그 결과 남해기인 등 남해무림연합의 일부 고수들이 남은 무사들을 이끌고 사천쪽으로 돌아서 낙양으로 오고 있다고 전해졌다.
백자안을 놀라게 한 것은 대인자문 무사들의 병력이었다.
놀랍게도 그 수가 무려 삼십 만이라 전해졌다.
왜국 본토에 있던 대인자문 무사들을 총동원하여 중원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기세가 오른 그들은 낙양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이대로 가면 낙양의 사방이 적에게 포위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만박서생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단목군이 사망한 이후로 중원무맹의 모든 일은 그가 처리하고 있었다.
강행군이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먼저 우리 중원무맹을 위해 계속 이곳에 병력을 주둔시켜 주시는 점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른 게 아니라 들으셨겠지만 지금 우리 중원무맹의 맹주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새 맹주님을 뽑아야겠지요.”
“네. 어젯밤 긴급회의를 통해 결정했습니다. 한 달 후 영웅대회를 열어 새 맹주를 뽑기로. 제가 드리는 부탁은 맹주님께서 그 대회의 공증인이 되어달라는 겁니다.”
“수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탁드릴 게 더 있긴 하지만 염치가 없어서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혹시 우리 동방무맹 총단에 남아 있는 무사들까지 모두 파견해달라는 부탁입니까?”
“네. 가능하겠습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인자문 놈들이 전 병력을 이곳 중원에 파견한 것이 확인된 이상 우리 역시 전력을 동원할 생각이니까요. 이미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빠르면 영웅대회에 맞춰 추가로 이십만 무사들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중원 무림인 모두가 맹주님을 비롯해 동방무맹 무사들께 감사할 겁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대인자문 놈들과는 전면전이 불가피했습니다. 아마도 놈들은 중원무맹 총공격에 가담 후 삼혈맹의 도움을 받아 우리 동방무맹을 공격하려 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역부족이 되겠지요. 따라서 오히려 이곳에서 싸우는 것이 우리 동방의 양민들 피해를 줄일 수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더욱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작전 회의에 참석해주십시오. 한배에 탄 셈이니 다들 맹주님의 의견을 경청할 겁니다.”
“그렇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