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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92화 (92/250)
  • [제30장] 사면초가 2

    “영웅무관장 위지경덕입니다. 맹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명객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무명객이 위지경덕과 인사를 나누며 미소를 지었다.

    전날 낙양에 도착한 그는 중원무맹 총단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바로 영웅무관으로 온 것이었다.

    물론 그를 안내한 사람은 김지혜였다.

    그녀로서도 영웅무관에 꼭 들러야 할 처지라 서두를 수 있었다.

    “맹주님께서 이렇게 십만 무사를 이끌고 오셨으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하지만 대인자문 놈들이 맹주님이 안 계신 틈을 타 공격을 가할까 그게 걱정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놈들이 이곳 중원무림부터 공략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 여러 곳에서 간파가 되고 있으니까요. 차라리 동방이 아닌 중원에서 대인자문 놈들을 모조리 소탕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네. 하기야 전쟁이 벌어지면 양민들이 피해가 극심하지요. 하지만 방심은 금물일 겁니다. 놈들의 전술 또한 상황에 맞게 변할 수 있으니까요.”

    “네. 한데 이곳에 무정공자란 분이 사범으로 계셨다 했습니까?”

    “네. 무정 사범을 아십니까?”

    “네. 총순찰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사용하던 집무실을 볼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지혜 네가 직접 보여드리도록 해라.”

    “네. 사숙조님.”

    김지혜가 대답 후 무명객을 데리고 무관 내 한 전각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범들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무정공자의 집무실 또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이에요. 맹주님. 한데 왜 무정 사범에게 관심을 두고 계신가요?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그건 아니오. 다만 이전에 무정공자와 친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소.”

    “혹시 맹주님께서도 무정 사범에게 육합심법을 배우신 건가요?”

    “하하하. 그걸 어떻게 알았소?”

    “제게 육합심법을 물어보실 때 눈치챘어요. 육합심법이라는 심법 이름을 아는 것 자체가 그 심법을 배웠다는 증거일 가능성이 크니까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오. 내 잠시 이곳을 둘러보며 쉬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괜찮겠소?”

    “물론이에요. 그럼 한 시진 후에 다시 오겠어요. 관장님이 음식 대접을 하겠다고 하시니, 점심은 들고 가셔야 할 거예요.”

    “알겠소.”

    “네. 그럼.”

    김지혜가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무명객은 집무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집무실 구조와 가구 등은 자신이 되찾은 기억 속의 것과 똑같았다.

    ‘거의 확실하구나. 이제 남은 것은 무정공자의 얼굴을 보여 마지막 확인을 하는 것이겠군. 하지만 그 전에 좀 더 확실히 내 신분을 알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분명히 무정공자 이전에 진짜 신분이 있다. 그게 누군지 생각이 날 듯하면서도 안 나는구나.’

    무명객이 집무실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수 대법을 떠올렸다.

    바로 회기술(回記術)이란 것으로 기억을 회복하는 비술이었다.

    이는 동방비고 삼층 서고에서 발견한 비술로, 고대 동방의 한 법사가 창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회기술을 터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무형검의 경지에 오른 덕분에 겨우 연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많은 면에서 부족했다.

    그 때문에 바로 회기술을 펼쳐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전에 머물렀던 장소에서 회기술을 펼치는 것이었다.

    분명 자신이 무정공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좀 더 명확한 기억회복이 필요한 그로서는 이곳이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다.

    ‘한번 모험을 걸어보자. 회기술을 펼쳐 실패하면 자칫 그 후유증으로 일부 되찾았던 기억마저 다시 잃어버릴 수 있지만, 이 상태로 대국을 주재할 수 없다.’

    무명객이 결단을 내리고 천천히 회기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김지혜와 약속한 한 시진이 다 되어갈 무렵.

    눈을 감았던 무명객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회기술이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 상태로 계속 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반드시 이 자리에서 나의 진정한 신분을 알아내야 한다.’

    무명객이 강한 의지를 일으켰다.

    동방과 중원 무림 모두 위기에 처한 지금 개인적인 문제부터 처리해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제대로 잡힐 것 같았다.

    회기술이 비록 실패했지만, 자신의 본이름이라도 기억이 나면 모든 게 떠오를 것만 같았다.

    ‘제발 나의 본래 이름이라도 알 수 있었으면······.’

    무명객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목 부분을 매만졌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손목 부분 피부밑에 뭔가 들어 있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그때였다.

    손목 피부 부위에서 금빛이 우러나오며 구슬 하나가 삐져나왔다.

    분명 피부를 뚫고 나왔는데 피는 전혀 나지 않았다.

    무명객이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이게 뭐지?”

    무명객이 구슬을 쥔 순간, 구슬에서 금빛이 흘러나와 그의 온몸을 감쌌다.

    “아!”

    무명객이 탄성과 함께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무수히 많은 정보가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 내용은 그가 간절하게 얻기를 바랐던 자신의 과거 기억들이었다.

    “아, 내가 백자안이었군. 이제 모든 것이 기억난다. 해남도 전투에서 바다에 빠진 후 기억을 잃었다가 김 소저에게 구출된 것이었구나.”

    무명객, 즉 백자안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천상여의주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기억을 모두 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명객으로 활동하면서 지존검도 찾고 동방무맹주까지 된 것이다. 앞으로 동방무맹의 힘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겠구나. 물론 중원뿐만 아니라 동방 무림 역시 내가 돌봐야 한다.’

    백자안이 잠시 숨을 고른 후 피부 속에 숨겨둔 또 하나의 물건, 즉 무자천서를 꺼냈다.

    무자천서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무자천서와 천상여의주를 다시 피부 속에 넣어둔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기억을 완전히 찾은 지금 풍운장원으로 가서 가족을 만나보고 싶었다.

    소식이 끊긴 지 오래라 무척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도 문제였다.

    자신이 무정공자이자 무명객이란 사실을 밝힌다 해도 믿어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으음, 일단은 동방무맹주로서 활동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것 같구나. 내 진짜 신분을 알았으니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일단 백소영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김지혜가 다시 들어왔다.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아, 그렇소? 한데 이곳 영웅무관에 백자안 대협의 여동생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네. 맞아요. 백소영 소저라고. 사실 조금 전에 만나보고 왔어요.”

    “아, 그렇소? 마침 잘되었소. 백 대협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 백 소저 또한 식사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겠소?”

    “네. 물론이에요.”

    * * *

    “백소영이라고 해요.”

    “동방무맹 맹주 무명객이오.”

    백자안이 미소를 지으며 백소영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백소영은 왠지 모르게 수척한 모습이었다.

    “백 소저의 오라버니 되시는 백자안 대협은 아직 소식이 없으시오?”

    “네. 아무 소식도 없어요. 그래서 부모님도 정말 걱정이세요. 연락이 올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 말이지요.”

    백소영이 안색을 굳혔다.

    최근 영웅무관을 비롯해 낙양에 있는 무관 모두 전투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열심히 무공 연마 중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백자안의 소식이 오래도록 없자 초조한 그녀였다.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백자안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무정공자의 사망에 대한 아픔도 있었다.

    “백자안 대협은 분명 조만간 연락을 취해올 것이오. 사실 이건 보안 사항이긴 하나 얼마 전 백자안 대협이 보낸 서신을 받은 적이 있소.”

    “아! 그게 정말인가요?”

    백소영이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위지경덕, 김지혜 등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보안을 위해 아직 총순찰을 비롯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그 내용을 말할 수는 없으나 백 대협은 건재한 게 틀림없소.”

    “아, 백 대협이 건재하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무정공자가 그렇게 유명을 달리한 후 모든 사람이 백 대협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지요.”

    위지경덕의 말이었다.

    김지혜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맹주님.”

    “그렇소. 곧 백 대협이 나타나 이 난국을 타개할 것이오. 그러니 다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오. 그런 뜻에서 내가 직접 풍운장원에 가서 백 대협의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그야 물론이지요. 부모님과 동생도 기뻐할 거예요.”

    백소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백자안이 내친김에 무정공자 역시 살아있다고 말해주려 했으나, 자신이 김지혜에게 한 말도 있고 해서 그 말은 그만두었다.

    “하하하, 그럼 내친김에 조금 있다가 풍운장원에 가보도록 합시다.”

    “네. 제가 안내할게요.”

    * * *

    풍운장원으로 가기 전 백자안은 아무도 모르게 서신 한 통을 썼다.

    바로 백자안 자신의 필체로 쓴 글이었다.

    가족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신공 수련을 위해 폐관 중으로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별다른 내용이 아니었지만, 그 서신의 존재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해 질 무렵 도착한 풍운장원에는 예상대로 백청, 유씨부인, 곽휘, 백자룡 이렇게 네 사람이 있었다.

    넓은 장원이지만 일하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백소영을 따라간 사람은 단 두 사람.

    백자안과 김지혜뿐이었다.

    백소영은 도착하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백자안이 잘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게 정말이냐?”

    백청이 매우 기뻐했다.

    “네. 여기 계신 동방무맹주 무명객님께서 직접 서신을 받으셨대요.”

    백소영이 뒤늦게 백자안과 김지혜를 소개했다.

    백청과 유씨부인, 곽휘, 백자룡 네 사람이 놀라며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동방무맹주 무명객에 대한 소문은 이곳 낙양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무공이 대단하다고 알려져 다들 부러워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명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백 대협이 두 분께 직접 전해달라고 부탁한 서신입니다. 사실 두 통의 서신을 받았었지요.”

    백자안이 조금 전 자신이 쓴 서신을 건네자, 백청과 유씨부인 등 일가족이 급히 그 내용을 봤다.

    “아! 폐관 수련이 길어졌나 보오. 동방무맹주님께 서신을 대신 전해달라고 한 것을 보니, 어쩌면 지금 동방에 있을 수도 있겠구려.”

    백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씨부인 또한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실 말은 안 해서 그랬지 두 사람은 혹시 백자안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겼을까 봐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안 그랬다면 지금과 같이 위험한 때 아무런 소식도 없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오늘 하루 백 대협의 방에서 지낼 수 있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비록 하루지만 성심성의껏 대접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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