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지존검명 2
해 질 무렵 작업이 끝나자, 조원들은 일제히 해산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총단 백의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출발했을 때처럼 따로 인원 파악은 하지 않았다.
곧바로 다른 산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외 볼일을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장 이문수는 내일 아침 백의각 식당에서 다시 모일 것을 지시한 후 그 역시 산 밑으로 내려갔다.
무명객은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결국 혼자 남았다.
원래 계획은 조용한 곳을 찾아 묵상에 잠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명이 들리는 장소를 찾아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왠지 인근 지리가 눈에 익어 검명의 출처를 알게 되면 기억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쪽이다.”
무명객이 용바위 사이에 나 있는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벌레도 많고 길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이 아예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작대기로 수풀을 헤치며 안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동굴은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검명 소리도 나지 않고 있었다.
소리라도 나면 좀 더 세밀하게 듣고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난감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바람을 들었는지 검명 소리가 다시 났다.
“우우웅!”
무명객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다시 갔다.
생각보다 먼 거리였다.
백 장 정도나 들어갔는데도 소리가 계속 났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절벽 하나가 나타났다.
검명 소리는 절벽 전체에서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사방에서 들리는 것처럼 소리가 허공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 점이 방향을 모르게 하는 이유라고 무명객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막대한 내공으로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절벽 어느 부분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절벽에는 동굴로 보이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휴우!”
무명객이 한숨을 돌렸다.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분명 이 근처인데······.”
무명객이 집중했다.
검명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으나 음파가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리보다는 기억에 더 집중했다.
머릿속에 지도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바위 사이 수풀 속에 있는 한 동굴.
가만히 생각해보니 동굴 앞에 동심원 모양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떠올랐다.
동심원이 동굴을 표시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마치 환상과도 같아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동심원이라······.’
무명객이 절벽 면을 세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 후 절벽 면 어느 부분에 희미한 동심원 표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흔적이었다.
무명객이 동심원 정중앙에 손을 대고 힘껏 밀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내공 발현 방법을 몰라 힘으로 민 것이었다. 다시 한번 시도했다.
역시 그대로였다.
무명객이 손을 떼고 동심원 부위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동심원 크기는 사람 한 명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동심원 한쪽 구석에 움푹 들어간 곳이 느껴졌다.
무명객이 손바닥을 대고 그곳을 다시 한번 눌렀다.
그때였다.
구구궁!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지며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바로 동굴이었다.
“아!”
무명객이 기뻐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검명이 동굴 안에서 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명객이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통로가 다시 닫혀버린 것이었다.
쿵.
“아니!”
무명객이 당황했다.
출구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닫혔다는 것은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급히 통로를 다시 열려고 벽을 밀어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구나. 일단 안을 조사해본 후 다시 와서 방도를 구해봐야겠다. 혹시 동굴 안쪽에 출입구를 다시 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무명객이 신형을 돌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갈수록 넓어졌다. 벽면에 야명석이 박혀 있어 어둡지도 않았다.
다행히 암기 공격 같은 기관 장치도 없었다.
동굴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반시진 정도쯤 들어갔을까.
철문 하나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명객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마지막 관문임을 깨달았다.
‘이 철문을 열어야 한다.’
조심스럽게 철문에 손을 대고 밀어보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명 소리는 철문 뒤쪽에서 크게 울리고 있었다.
“우우웅!”
마치 무명객을 부르는 소리 같았다.
‘초조해 말자.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나와 인연이 있는 곳이라면 그 해답 역시 내게 있다. 마음을 편히 하자.’
무명객이 손에 힘을 뺐다.
철문에는 계속 손을 대고 있었다.
몸속 내공이 막대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힘을 쓰지 않았다.
다만 담담하게 마음을 다스릴 뿐이었다.
‘머문 바 없이 힘을 쓴다.’
무명객이 힘을 다시 빼자, 순간 그의 단전에서 한줄기 기운이 솟구쳤다.
바로 내공발현이었다.
그가 단순히 주먹질했을 때는 순전히 힘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은 처음으로 내공심법에 의해 기운을 끌어낸 것이었다.
심법의 이름은 몰랐지만, 무명객은 이전에 자신이 연마한 내공심법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두르지 말자.’
무명객이 일주천을 빠르게 했다.
심법의 운용과 묘리가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무명객이 매우 기뻐하며 한 번 더 복습한 후 내공을 일으켜 철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육중한 철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마치 심법을 알아보고 문을 스스로 열어주는 것 같았다.
이윽고 드러난 곳은 장방형 모양의 석실이었다.
석실 중앙에는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바위 위에는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검명은 그 검에서 나는 소리였다.
무명객이 성큼성큼 걸어가 검을 집었다.
“우우웅!”
검명이 더욱 커졌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무명객이 검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했다.
일반 검과 도무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검을 뽑자,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신이 드러냈다.
한데 검신에 빠르게 글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지존(至尊)>
“아! 설마 이검이 천하제일검 지존검이란 말인가.”
무명객이 놀랐다.
지존검에 대한 내용은 그의 기억 속에도 생생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검.
김지혜로부터 들은 중원 무림 소식에서도 지존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혈교가 화산에서 지존장보도 소문을 퍼뜨려 군웅들을 위기에 몰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지존검이 이곳 동방에 있었다니. 오늘부터 이 검의 주인은 바로 나다.’
무명객이 검에 내공을 실었다.
이미 심법에 대한 기억을 회복해 자유자재로 내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장법까지는 아니라도 장심을 통해 내공을 외부로 보낼 수 있는 상태였다.
내공이 주입된 검이 다시 한번 검명을 터뜨리며 금빛을 냈다.
석실 안이 금빛으로 가득한 그때.
석실 한 벽이 두 쪽으로 나뉘며 새로운 석실 하나가 나타났다.
무명객이 급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석실 안에는 다른 물건은 없었다.
다만 벽면에 글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우화등선 직전에 심득을 남긴다. 무형법문(無形法文)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무공을 창안할 수 있을 것이다. 무운을 비노라.>
석벽 제일 윗부분에 새겨진 글이었다.
“무형법문이라. 혹시 무형검에 관한 것인가.”
무명객이 급히 벽면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은 역시 예상대로 무형검 이론이었다.
무형법문은 무형검에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을 기술한 것이었다. 설명이 자세하여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특히 이 무형법문은 어떤 무공이든 자신의 무형검 경지에 맞게 창안할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실전무공이 급한 무명객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법문대로 하면 기본 무공이 모두 가능해진다. 검법, 도법, 권법, 장법, 지법, 보법, 경공, 역용술, 암기술 등 안 되는 것이 없겠군.’
무명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기본이 되어 있는 그에게는 오히려 매우 쉬운 내용이었다.
마치 길을 모두 외우고 있는 장님에게 눈을 떠주게 했다고나 할까.
무명객은 단숨에 모든 것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전에 내가 무슨 무공을 배웠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철문을 열 때 기억이 떠오른 심법 하나라도 충분하다. 나머지 실전무공들은 하나하나 창안해 나가야겠구나.’
무명객이 내친김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무형법문부터 연마하기 시작했다.
심법을 천천히 운공하며 벽에 새겨진 무형법문을 한 자 한 자 암기하며 그 뜻을 새겼다.
그것은 마치 종이에 먹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고 빨랐다.
‘모든 것은 하나다.’
무명객이 전일을 생각하며 집중했다.
무형법문 연마가 끝나면 곧바로 실전무공들까지 만들 생각이었다.
그것은 마치 진흙을 가지고 어떤 모양이든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형법문만 깨우친다면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무명객이 무아지경에 빠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새벽이 다 되어 갈 무렵.
무명객이 천천히 눈을 떴다.
‘무형법문을 완전히 깨우쳤다.’
무명객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 내가 무형검의 고수가 된 것 같구나. 물론 초보에 불과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
무명객이 무형법문을 다시 한번 암기해본 후 우수를 뻗어 벽에 적혀 있는 글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는 그것이 무형법문을 남긴 분의 뜻이라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전무공의 창안이었다.
한데 무명객은 여유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밤에 무형법문을 연구하면서 뜻밖의 수확을 얻어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무공들에 대한 기억을 상당 부분 회복한 것이었다.
‘팔대무공이란 것을 내가 알고 있었다니, 구태여 따로 실전무공을 창안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구나. 물론 역용술 등 여러 가지 신비한 비술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만 정확한 명칭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쉽군. 왜 모든 무공에 무명이란 이름이 붙어 있을까. 원래 그런 이름이었나.’
무명객이 천천히 팔대무공을 하나하나 연습해보며 새롭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지존검과 관련 있으니 일단 무명심법을 지존심법이라 하자. 팔대무공 역시 지존검법, 지존도법, 지존권, 지존장, 지존지, 지존보, 지존비, 지존금광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군.’
무공 정리를 모두 끝낸 무명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존검을 허리에 찬 그는 다시 출입구 쪽으로 왔다.
출입구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지워버리고 없지만, 무형법문 마지막에 출입구를 열 방법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매우 간단했다.
출입구 옆의 벽에 있는 볼록한 부분을 연속으로 세 번 누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그긍.
출입구가 열리며 무명객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우르르릉, 소리를 내며 동굴 전체가 무너졌다.
무명객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 맞았구나. 한 번의 인연이 예정된 곳이었다. 어서 백의각으로 돌아가자.’
무명객이 신형을 날렸다.
바로 지존비였다.
한줄기 빛살과도 같이 빠른 경공이었다.
휙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