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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78화 (78/250)

[제25장] 동방무맹 3

백의각을 나와 총단 내를 산책하던 무명객은 자연스럽게 총단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보수대에 들어갈 때 받은 통행패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녁 식사는 객잔에서 하자. 술도 한잔하면 좋겠군.’

무명객이 품속에 있는 은자를 확인했다.

김지혜가 준 돈이었다.

은자 열 냥이나 되었다. 무명객이 극구 사양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받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받은 돈.

물론 나중에 갚는다는 말을 잊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잘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가 능숙하게 자리를 안내했다.

객잔 한구석에 빈 탁자가 하나 있었다.

영웅대회를 앞두고 모든 객잔이 만석이었다. 다만 잠시 빈자리는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

“소면 하나. 죽엽청 한 병. 그리고 구운 닭 반 마리 주시오.”

“네.”

점소이가 주방에 달려가자, 무명객이 객잔 안을 둘러봤다.

보수대 사람들과 달리 하나같이 병장기를 차고 있었다.

대부분 무림인이었다.

아무래도 영웅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 같았다.

‘하기야 자신이 사는 터전이 짓밟힐 위험에 처했으니 어찌 나서지 않겠는가. 무공이라는 것이 좋군. 이럴 때 자신의 의사를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 있으니까.’

무명객이 눈을 빛냈다.

사실 그 역시 대인자문의 소행을 듣고 분노하는 중이었다.

다만 겉으로 표현을 안 할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처음 자신의 상태를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석 달 만에 깨어났다는 말을 태극선생에게 들었을 때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이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초조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은 장단점이 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던가. 일비일희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대인자문의 침공에 맞서 최선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 후 중원으로 간다. 하지만 과연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

무명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수대에 들어가 진지 보수 작업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호구지책이었다.

태극문 총단에서 나와야 할 상황이었고, 어디 갈 데도 없었다.

그래서 명분을 살려 보수대에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땅을 파고 흙을 나르는 일로 큰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은 확실했다.

‘계기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니 너무 초조해 말자.’

무명객이 엽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얼마 후 음식이 나왔을 때 두 사람이 합석했다.

“실례하겠소.”

“실례하리다.”

무명객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굳이 두 사람과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객잔 안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만 듣고도 현 상황이 잘 파악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합석자 중 한 명이 말했다.

“형씨.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계룡산에서 온 부채도사라고 하오.”

부채도사가 부채를 천천히 부쳤다.

옆에 있던 사내 역시 자신의 별호를 밝혔다.

“한라산에서 온 백록공자(白鹿公子)라고 하오.”

“무명객이오.”

무명객이 자신의 별호를 밝혔다.

이름 대신 쓰고 있는 별호라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하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무명객께서도 이번 영웅대회에 참가하러 온 것이오?”

“이미 총관부 보수대에 들어갔소이다. 영웅대회에 참가할 실력이 없어 막일이라도 해서 도움이 될까 해서요.”

무명객이 사실대로 밝혔다.

부채도사와 백록공자가 살짝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알기에 보수대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하는 일은 총단 하인들과 비슷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하하. 대인자문 놈들을 상대하는데 무공의 고하가 무슨 상관이겠소? 자신의 상황에 맞게 최선의 노력을 하는 그 정신이 중요하지요. 존경하오.”

부채도사가 술을 한잔 따랐다.

무명객이 받아 마셨다.

사실 혼자 있고 싶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을 사귀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두 분은 무공이 고강한 것 같군요. 같은 문파 무사분들이오?”

“하하하. 아니오. 우리는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요. 이번에 격문을 보고 힘을 보태기 위해 함께 온 것이오.”

백록공자의 말이었다.

음성에 내공이 실려 있어 쩌렁쩌렁했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무명객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부채도사나 백록공자의 별호를 듣고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점을 의식했는지 부채도사가 말했다.

“우리는 사실 강호초출이오. 두 사람 모두 최근 사부님들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강호출도를 미루고 있었소.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함께 강호에 나오게 되었지요.”

“그러셨구려.”

“하하하. 사실 다른 빈자리를 놔두고 이 탁자에 온 것은 형장의 기도 때문이었소.”

“기도 말이오?”

“그렇소. 대부분의 고수는 기도만 봐도 대충 무공의 고하를 알 수 있소. 형장에게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소. 혹시 반박귀진의 고수가 아닌가 싶어 합석한 것이오.”

“고수가 아니라 실망을 하셨군요.”

“아니오. 정말 무공을 모르시오?”

“그렇소. 하지만 어쩌면 펼칠 수는 있을 것 같소.”

“하하하. 말씀이 참 재미있구려. 무공을 모르는데 펼칠 수도 있다? 선문답 같소이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실례가 안 되겠소?”

“글쎄요. 아직 연구 중이라······.”

무명객이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불필요한 억측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부채도사는 의외로 흥미가 있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그 역시 무형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돌아가신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소. 무공을 모르는데 무공을 펼치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가르침을 청하라 하셨지요. 부탁을 좀 드리겠소.”

“나 또한 마찬가지요. 혹시 무명객께서 무형검에 대한 연구를 하고 계시는 것이오?”

백록공자까지 거들자, 무명객 또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부족하지만 내 견해를 말씀드리겠소. 다만 이것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리는 것이니 참고만 하시오.”

“물론이오. 극히 드물지만 무형검 이론만 익힌 분들도 있다고 들었소이다.”

“아, 그렇소? 좋소이다. 말씀드리지요.”

무명객이 한숨을 돌린 후 천천히 다시 말했다.

“무공을 모른다는 것은 진짜 모르는 것이 아니오. 따라서 무공도, 무공이 아닌 것도 아니오. 다만 그 이름이 무공일 뿐이오. 얻을 것도 줄 것도 없으므로 마치 허공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무공과 관련해 어떤 것을 무형검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무공을 펼칠 때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오. 요지는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마음과 싸우지도 말고 머무르지도 말아야 할 것이오. 머무는 바가 없다는 그 말에도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오. 결론적으로 이런 마음으로 무공을 펼치면 무공이라는 마음도 없을 것이오. 이 모든 것을 간단하게 말해 무공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오. 어떻게 보면 무공을 바르게 펼치기 위해서 무공을 몰라야 하는 것이오. 시작도 끝도 없는 대자연의 힘을 생각하면 보다 이해하기 쉬울 것이오. 이상이외다.”

“호오!”

“아!”

부채도사와 백록공자가 약속이나 한 듯이 탄성을 내었다.

그렇다고 무명객의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깨달음은 생각보다 깊은 수준이었기에 무명객의 말을 절대 무시하지 못했다.

“어렵군요. 제가 부족해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계속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무명객께서 직접 무공을 익히는 것이 어렵다면, 지금처럼 이론 무형검이라도 설파해 주십시오. 뜻있는 고수들은 모두 환영할 겁니다. 다시 한번 소중한 견해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음미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무명객님은 저희 두 사람의 스승입니다.”

“과찬이오. 스승이라니 가당치도 않소. 그냥 조금 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큰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대형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건······.”

무명객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부채도사와 백록공자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무명객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이와 관계없이 대형으로 받들겠다는 것이 두 사람의 의지였다.

그렇게 무명객이 대형이 되고, 부채도사가 둘째. 백록공자가 셋째가 되었다.

편하게 지내던 두 사람도 이번 기회에 서열을 정한 셈이었다.

“하하하. 대형.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역시 의형제를 맺은 김에 도원결의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채도사의 말에 무명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의 의견에 따르겠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공을 모르는 내가 대형이 된다는 게 좀 그렇군.”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무공은 저희가 가르쳐드릴 수도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대형으로 모시는 이유는 다른 데 있으니까요.”

부채도사의 말에 백록공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실력을 숨긴 고수였다.

내심 이번 영웅대회 우승을 노릴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홀로 수련을 해 세력이라 할 것은 없었다.

특히 군사라 할 조언자도 없었다. 오늘 드디어 무명객이라는 마음에 드는 현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큰형님. 둘째 형님. 술과 음식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객잔 앞에 복숭아밭이 있는 것을 봤으니 그쪽으로 가시지요.”

“그렇게 하지.”

* * *

무명객, 부채도사, 백록공자 세 사람의 도원결의는 달밤 아래 진행되었다.

차린 것은 간단하지만 그렇다고 그 의지마저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못했으나 한날한시에 함께 죽기를 기원하나이다.”

무명객이 대표로 다시 선언했다.

술을 한 잔씩 돌리자 드디어 도원결의가 끝났다.

“큰 형님.”

“둘째 형님.”

“막내.”

“하하하.”

무명객이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었다.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나 이렇게 의형제를 맺는 것.

그것은 강호가 아니면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동방무림 전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때였다.

세 사람은 도원 앞에 놓인 평상에 앉아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부채도사와 백록공자 두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두 사람 모두 고아 출신으로 사부를 만나 지금까지 무공만 연마했다고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의 사부끼리 친분이 있어 어릴 때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다.

나이는 부채도사가 스물둘.

백록공자가 스물하나.

생각보다 젊은 나이였다.

무명객은 자신의 나이를 몰랐지만, 두 사람보다 한두 살은 더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큰형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나는 사실 과거의 기억이 없네.”

무명객이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부채도사와 백록공자 두 사람이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아, 그럼 태극선자(太極仙者) 김지혜 소저가 큰 형님을 구해줬다는 말입니까?”

“자네들이 김 소저를 아는가?”

“물론이지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태극선자는 동방제일미녀로 유명하지요.”

“으음, 태극선자라······ 별호도 있었군.”

“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 좀 해주십시오. 아니, 벌써 두 분이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게 아닙니까?”

“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그녀에게 짐일 뿐이네. 그 때문에 서둘러 태극문 총단에서 나왔지. 지금은 아마 부산성으로 내려가고 있을 것이네.”

무명객이 김지혜와 관련한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아, 그럼 큰 형님은 중원인일 가능성이 크네요. 저희도 언젠가 중원에 가서 견문을 높이고 싶었는데, 다음에 기억을 찾게 되면 저희도 데려가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하지만 기약은 없을 거야. 그건 그렇고 아우들의 무공이 궁금하군. 나야 이론가일 뿐이니 두 아우가 이번 영웅대회에서 두각을 내길 진심으로 바라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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