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적 반로환동-77화 (77/250)
  • [제25장] 동방무맹 2

    석 달 만에 깨어난 사내와 김지혜의 대화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주로 김지혜가 이야기하고 사내가 들었다.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김지혜는 그에게 중원과 동방 무림의 현 상황에 관해 설명해줬다.

    태극선생이 밑그림을 그려줬다면 그녀는 살을 붙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기억이 살아나지는 않았다.

    사내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김지혜 소저 덕분에 제가 살아난 것 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저에게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어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공자님을 발견했을 것이니까요.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하시니 정말 안타깝네요. 조만간 돌아오시리라 믿지만, 그동안 부를 이름도 없어서 어떻게 해요?”

    “이름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본 이름을 찾을 때까지 무명객(無名客)이라 불러주십시오.”

    “네. 그게 좋겠네요.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무명객님은 중원분일 가능성이 매우 커요. 중원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야겠지요. 해남도 인근 바다에서 저를 발견하셨다니, 그쪽에 가야 제 근원을 찾을 가능성도 커지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를 동방 분들이 구해주셨으니 저 또한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대인자문 무사 이십만이 곧 공격을 가해온다고 했던가요?”

    “네. 무명객님은 외지 분이니 어서 피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전쟁이 벌어지면 성 밖으로 나가는 것도 어려울 거예요. 우리 동방 무림을 돕겠다는 생각은 고맙지만, 지금 막 깨어나신 분이 그럴만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김지혜가 무명객의 몸을 전체적으로 한번 살폈다.

    무기력하다고나 할까.

    어떤 강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몸이 바짝 마르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치 허공과 같이 허허로운 느낌이었다.

    담담해 보이는 그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힘을 말씀하셨습니까?”

    “네. 무명객님은 무려 석 달 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계셨어요. 지금 막 깨어나셨지만 앞으로 몇 달을 요양하셔야 할 거예요. 문제는 우리 태극문 무사들이 대부분 부산성으로 가서 무명객님을 보살필 사람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저와 총관님 역시 조만간 부산성으로 내려갈 계획이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지금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요.”

    “아, 제 말을 오해하셨네요. 이곳을 떠나 달라는 게 아니라 돌봐줄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양해를 부탁드리는 거예요.”

    “아닙니다. 결심이 섰습니다. 동방무맹 총단으로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뭔가 도울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진심이세요?”

    “네. 성에 있는 모든 사람이 힘을 모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력하나마 저 역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혹시 추천장이라도 한 장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움직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힘이라는 것도 실은 없는 것이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김지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태극선생이 급히 전음을 날렸다.

    「아가씨. 후유증으로 정신이 아직 온전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십시오. 그렇게 심한 것 같지는 않으니까.」

    「네.」

    김지혜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로서도 무명객이 동방무맹 총단에 들어가면 나쁠 게 없었다.

    2차로 부산성에 가려면 이곳 태극문 총단을 거의 폐쇄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무명객을 돌봐줄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다.

    무명객이 담담히 말했다.

    “힘이란 바로 기운을 말하지요. 여기서 없다는 것은 실제 기운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정한 형식이 없다는 것이지요.”

    “형식이 없다고요?”

    김지혜가 장단을 맞춰주었다.

    무명객의 얼굴에 생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네. 형식이 없는 것은 다시 얽매임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몸 안의 기운과 몸 밖의 기운을 구별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흐르게 한다면, 대자연의 기운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지요.”

    “물아일체(物我一體)군요. 하지만 그것은 이론상 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그러한 상태는 무공으로 따지면 무형검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게 그렇게 쉽겠어요?”

    김지혜가 이번에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상승 무공으로 가는 깨달음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무명객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김지혜는 미묘한 느낌을 받았으나 대답할 내용이 없어서 그런다고 생각해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이분은 이전에 무학 이론 연구를 했던 분인지도 모르겠구나.’

    “이럴 게 아니라 결심을 하셨다면 바로 무림맹 총단으로 가요. 안 그래도 볼 일이 있었는데, 제가 총관님께 직접 소개해드릴게요. 총단 소속으로 지내면 의식주는 해결될 것이니까 어쩌면 여기보다 나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김 소저에 대한 은혜는 나중에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줄 게 아무것도 없군요.”

    “아니에요. 그 마음이면 충분해요. 어서 가요.”

    “네.”

    * * *

    동방무맹 총관 동방선생(東邦先生)을 소개받은 무명객은 곧바로 총관부에 배치되었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받게 되며 그 외 임금은 따로 없었다.

    동방선생 역시 미리 그 점을 확실히 알려주었다.

    대인자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자금이 막대하게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실 지원자를 받는 데 총관이 직접 면담을 보고 설명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단지 김지혜와의 친분 때문에 직접 무명객을 배치해준 것이었다.

    참고로 김지혜는 이번 면담에서 결국 부산성에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김지혜가 태극문주 태극검선의 급한 연락을 받았다고 속였기 때문이었다.

    부산성 포구에 특수 진법을 펼치기 위해 자신이 필요하다는 김지혜의 말에 동방선생도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물론 중원무맹 고수들이 오면 다시 복귀하겠다는 다짐을 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덕분에 무명객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무명객이 들어간 곳은 총관부 소속 보수대(補修隊)였다.

    보수대는 각종 시설을 보수, 유지하는 임무를 맡은 곳으로, 이번에 대인자문 침공을 대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무명객은 보수대 제 10조 조원으로 편성되었다.

    조원은 대략 백여 명.

    대부분 자원해서 온 양민들이었다.

    숙소는 총단 내 전각을 사용했다. 한 방에 대략 열 명씩 함께 지내야 했다.

    좁은 방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무공을 몰라 막일이라도 해서 도움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결국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총단에서는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하여 언제든 일을 그만둘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자유 시간을 보장했다.

    제10조 조장 이문수(李文水)가 말했다.

    “우리 십조가 맡은 일은 뒷산 진지 보수입니다. 유사시 병력이 뒷산 동화산으로 철수하게 될 때 사용할 진지를 보수하는 일이지요. 막중한 임무라 할 수 있으니, 모두 저의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아울러 포고령을 보고 지원해주신 여러분의 용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무공을 아시는 분들이 있다면 사대당에서 지원을 받고 있으니 그쪽에 가시면 되겠습니다. 아니면 직접 영웅대회에 참석하셔도 됩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작업은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각자 배정된 방에서 휴식을 취하십시오. 식사는 백의각(白衣閣) 지하에 있는 공동식당에서 하면 되니 참고로 하십시오.”

    “네.”

    백여 명의 조원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다시 백의각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오후라 조금 쉬었다가 저녁 식사를 하면 되었다.

    그래도 내일부터 작업 시작이라 다들 긴장했던 표정이 조금씩 풀려 있었다.

    무명객 역시 그들 속에 끼어 있었다.

    방에 들어온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묵상에 잠겼다.

    저녁 식사까지는 한 시진 정도 남은 상황.

    그때까지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형검에 관한 것이었다.

    김지혜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생각하던 이론이 바로 무형검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생각해보고 싶었는데, 곧바로 동방무맹 총단으로 오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무형검이라 했던가. 사실 몸속에 기운이 전혀 없다기보다 뭔가 허허롭다. 텅 비어서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랄까.’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처음 자신의 얼굴을 봤을 때 분명 역용술을 펼친 것 같다고 느꼈던 그였다.

    역용술을 펼친 게 사실이라면 다른 무공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잘만 하면 무공을 통해서 기억을 찾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나를 살려준 동방무맹 사람들을 위해 적으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다. 김 소저 역시 개인적인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은혜를 갚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내 능력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을까. 크게 갚을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적게 갚을 필요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조용한 곳에서 깊은 묵상이 필요할 듯하구나.’

    무명객이 눈을 뜨고 방안을 살펴봤다.

    일부러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방안은 저잣거리를 방불케 했다.

    첫날이라 시국에 대한 토론이 자연스럽게 벌어진 것이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무명객을 포함해 열 명 정도.

    지금은 대인자문과 화친을 맺자는 자들에 대한 성토가 봇물이 터지듯 하고 있었다.

    “아, 글쎄 죽일 놈들이지. 아무리 우리가 힘이 약해도 왜놈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나. 물론 왜국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인자문 놈들이 자신의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했다고 하더군. 우리가 놈들과 화친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무림이 쑥대밭이 될 걸세. 놈들이 약속을 지킬 리 없을 테니까. 차라리 죽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게 훨씬 낫네.”

    “당연하지. 보수대에 자원해서 들어온 우리끼리는 마음이 통해서 다행이야. 밖에서는 아직도 주전파와 화친파로 나뉘어 대립이 심한 모양이더군.”

    “화친파는 흑도 놈들이 주도하고 있지. 놈들은 독립적으로 싸운다는 핑계 하에 제대로 싸움에 가담하지도 않을 걸세. 무림맹 연합군이 패배하면 대인자문 놈들에게 즉각 투항할 속셈이지.”

    “죽일 놈들! 나는 왜놈들보다 앞잡이 노릇을 하는 그놈들이 더 나쁘다고 생각하네. 외적이 침입하면 힘을 합치는 게 도리가 아닌가? 한데 눈치를 살피며 제 살길만 보전하려 하니, 내가 무공만 익혔어도 그놈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걸세.”

    “무공 좀 못하면 어떤가? 나는 영웅대회에 참가할 생각이네. 무공이야 배우면 되는 것이고 이 일은 대회 전날까지만 할 생각이네.”

    “나도 그럴 생각이네. 지금 와서 진지 보수를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네. 마침 맹주께서 신입 무사들을 위해 동방비고(東邦秘庫)를 대폭 개방한다고 하셨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맞는 말일세. 아까 조장님도 은근히 그쪽으로 추천을 하시더군. 기본 근력이 되는 사람은 기초 훈련만 받아도 전장에 나가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법이지. 나 역시 영웅대회에 참가할 생각이네. 참가자의 실력을 등급별로 나눠 배치해주고 무공을 자유롭게 익히게 해준다고 하니,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지. 특히 전쟁 후를 생각하면 말이야.”

    “자네는 우리가 대인자문 놈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당연하네. 우리 동방무림은 예로부터 위기에 강했네. 나는 은거고수들이 이번에 큰 활약을 하리라 생각하네. 그 때문에 이번 영웅대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네. 나야 입맹하더라도 최하급이겠지만, 신진 영웅이 탄생하면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 아니겠나?”

    “나 역시 기대하고 있네.”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가운데, 무명객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 역시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가 일어난 것은 좀 더 조용한 곳에 가서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동화산에 가면 조용한 동굴 같은 곳을 하나 찾아봐야겠다. 굳이 방에서 잘 필요는 없으니, 그런 곳에서 밤새워 묵상하면 뭔가 얻는 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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