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동방무맹 1
[제25장] 동방무맹
석 달 후. 동방성.
동방무맹 총단 취의청에는 지금 삼백 명가량의 지휘부 고수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인자문의 침공에 대한 대책 수립에 관한 것이었다.
대인자문주가 선전포고를 한 것은 사흘 전.
항복하지 않으면 동방무림 전체를 몰살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동방무맹주 백의무제(白衣武帝)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침내 놈들이 발톱을 드러냈소. 대인자문 정예무사 이십만이 출정 준비를 모두 끝냈다고 하오. 놈들의 하수인 격인 해신방이 전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도발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놈들이 우리 동방무맹의 분열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이미 전쟁보다 놈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동방무맹 총군사 풍류도인(風流道人)의 말이었다.
“우리 지휘부를 모두 교체하고 중원 무림을 공략하는 데 힘을 합치자는 것이 놈들의 요구가 아니오? 놈들의 속셈이 빤한데,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자들이 있단 말이오?”
“네. 맹주님. 어차피 전면전을 벌이면 우리가 역부족이기 때문에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일부일 따름입니다. 대다수는 필사항전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영웅대회 때 더욱더 그 의지를 드러낼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중원무맹의 지원입니다.”
풍류도인이 안색을 굳혔다.
“지원 요청에 대한 대답이 왔소?”
“아직은 아닙니다. 다만 석 달 전 제가 직접 함대를 끌고 해남도에 갔을 때 중원무맹 총군사 만박서생을 만나 의사를 타진해봤습니다.”
“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결론적으로 삼천 명 이상의 지원은 어렵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곳까지 오는데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니, 너무 큰 기대는 접어야 할 듯합니다.”
“삼천이라······ 생각보다 너무 적구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내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오?”
“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특별사신이 다시 갔으니 좀 더 많은 병력을 보내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 봤자 일만을 넘겠소? 대인자문 놈들의 병력은 자그마치 이십 만이오. 게다가 놈들의 무공은 해남도에서 몰살당한 해신방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소. 특히 우려되는 것은 대인자문의 원로고수들이 대거 이번 출정에 참여할 예정이라는 점이오. 모두 합해 십만 정도인 우리 무사들이 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소. 아, 미안하오. 맹주인 내가 자신감을 보여야 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중원무맹의 지원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소식에 의하면 한 달 전 사사천교와 혈교가 다시 발호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마교 내부에서도 변란이 일어나 불패마왕과 성녀가 숙청되었다고 하더군요.”
“마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이오? 불패마왕이라면 중원제일고수가 아니오?”
“맞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교주 자리를 부교주에게 빼앗겼다고 합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부교주가 외부세력의 지원을 얻어 권력을 탈취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새 집권세력이 혈교와 사사천교와 마찬가지로 중원무맹을 노리고 있다고 하니, 어찌 우리에게 지원할 여력이 있겠습니까?”
“그 정도 상황이라면 삼천 무사를 보내는 것도 어려울 수 있겠구려. 이럴 때 해신방 놈들 절반 이상을 혼자서 죽인 불의 사나이가 우릴 도와준다면 좋으련만······.”
“화신 말입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싸움 중에 주화입마되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지요. 비록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죽은 게 확실합니다.”
“들리는 소식이 모두 암울한 것밖에 없구려. 이제 믿을 것은 영웅대회뿐인가?”
“네. 난세는 영웅을 만들어내는 법. 사흘 후 열릴 영웅대회에 분명 우리 동방무맹을 구원할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할 겁니다. 지금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 계룡산 등 천하 각지의 명산에서 은둔하고 있던 고수들이 속속 이곳 동방성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영웅대회 우승자에게 지휘보검을 내려 그에게 다가올 전쟁을 맡긴다면 분명 승산이 있을 겁니다.”
“어찌 지휘보검뿐이겠소. 우리 동방무림을 지킬 수만 있다면 맹주 자리도 내놓을 생각이오. 어차피 나는 이미 늙어 전쟁의 신이라는 대인자문주를 대적하기 힘드오. 영웅대회 우승자에게 맹주 자리를 넘기는 것을 미리 발표하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 더욱더 고수들이 오지 않겠소?”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맹주님의 무공이 동방제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분명 대인자문주를 죽일 수 있으실 겁니다. 다만 패기 있는 젊은 영웅이 나타나 선두에 서면 더욱더 좋겠지요. 대인자문 놈들의 사기가 높은 것도 대인자문주의 아들이 선봉대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니까요.”
“알겠소. 맹주 지위 양도 문제는 일단 보류하도록 합시다. 부산성에 가 있는 부맹주에게서는 아직 아무 소식이 없소?”
“네. 포구에 일만 무사들을 배치해두었으니 놈들이 쉽게 상륙하지는 못할 겁니다.”
“부맹주가 문주로 있는 태극문 무사들이 모두 부산성에 가 있다고 했소?”
“네. 필수 병력만 이곳 동방성에 있는 태극문 총단에 남기고 모두 간 것 같습니다. 대략 오천 명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부맹주의 손녀인 김지혜 소저는 지금 태극문 총단에 있소?”
“네. 석 달 전 김 소저가 저에게 만박서생을 소개해주었지요. 사실 김 소저 역시 부산성으로 내려가려는 것을 제가 만류했습니다. 조만간 중원무맹에서 지원 무사들이 올 가능성이 큰데, 아무래도 그들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요.”
“잘했소. 그럼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하고 다들 영웅대회 준비에 매진해 주시오. 대회가 끝난 후 본격적인 전투태세를 갖추고 놈들과 전면전을 벌일 것이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태극문 총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 태극문은 동방성 제일 문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대부분의 무사가 부산성으로 출정을 떠나고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벌써 석 달이 흘렀구나.’
한 소녀.
문주 집무실에 앉아 있는 그녀는 하염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서쪽 하늘이었다.
‘해남도 전투가 끝나고 너무 급작스레 돌아왔다. 하기야 영웅무관으로 돌아가 봐야 무정 사범님도 안 계시니······.’
소녀, 즉 김지혜의 눈빛이 어느새 촉촉해졌다.
할아버지인 태극문주의 명으로 태극문 총단에 복귀한 그녀는 가끔 이렇게 감상적으로 되곤 했다.
그 중심에는 항상 한 사람이 있었다.
‘무정 사범님. 정말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셨을까. 삼만 부녀자를 구하고 산화하셨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는다.’
짧은 중원 무림 생활이었지만 무정공자는 잊을 수 없는 사내였다.
처음 중원에 갔을 때는 사실 백자안이란 사내에 대한 호기심이 무척 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가슴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무정공자였다.
물론 그녀는 아직 무정공자가 백자안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나 역시 태극문 제자로서 부산성에 가서 힘을 보태야 한다. 대인자문 놈들이 대거 쳐들어오면 할아버지를 비롯해 본문 무사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지혜의 안색이 굳어졌다.
중원무림과 동방무림의 가교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지난 석 달간 딱히 한 일은 없었다.
물론 조만간 중원에서 지원 병력이 오면 그들을 안내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전에 전쟁이 벌어질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일단 부산성에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러 사정이 겹쳐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휴우!”
김지혜가 한숨을 내쉰 순간.
집무실 문이 열리며 어린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냐?”
“그분이 깨어났습니다.”
“아! 그게 정말이냐?”
김지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깨어났다는 사람은 바로 신원불명의 한 사내였다.
그러니까 석 달 전 해남도 전투가 끝나고 동방무맹 함대를 따라 동방성으로 복귀할 때였다.
김지혜는 갑작스레 복귀하게 되어 배 위에서 중원 쪽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그런 어느 순간, 한 사내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랐지만, 그녀가 경공을 펼쳐 구하고 보니 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의식불명 상태였다.
이미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라 되돌려 보낼 수도 없었다. 그럴만한 몸 상태도 아니었다.
태극문주 태극검선(太極劍仙)이 진맥을 해봤으나 딱히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맥이 안정적이라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사내는 동방성까지 함께 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태극문의 객방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방성의 명의들을 불러 치료받게 하였으나, 하나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병명도 모르고 그저 의식이 없을 뿐이었다.
기이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몸 상태는 계속 처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지혜는 따로 할 일도 없고 해서 매일 그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한데 석 달 만에 마침내 깨어난 것이었다.
“총관님께서 그간의 사정을 그분께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그래, 뭐 하는 분이라고 하더냐? 중원 분이 맞더냐?”
“그게······ 아직······.”
“아직 무엇이냐?”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저도 옆에서 계속 지켜봤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아마 후유증인 것 같아요.”
“안 되겠다. 내가 가봐야겠다. 어서 가자.”
“네.”
* * *
“그렇게 되었군요.”
사내가 담담히 말했다.
모든 기억을 잃어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사내답지 않게 너무나 침착했다.
중원 해남도 전투부터 시작해 현 동방무맹의 상황까지.
한 시진 이상을 장황하게 설명해준 태극문 총관 태극선생(太極先生)이 눈을 빛냈다.
‘기이한 사내군. 보통 사람이라면 기억상실을 깨닫고 괴로워해야 마땅하거늘. 이 자는 처음 잠시를 제외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죄송하지만 동경이 있습니까? 제 얼굴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사내의 요청에 태극선생이 동경을 가져왔다.
동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사내가 눈을 빛냈다.
‘이 얼굴은 나의 진짜 얼굴이 아니다. 무의식 속에서 얼굴이 따가워 아무 얼굴이나 역용한 것 같았는데, 바로 이 얼굴이구나.’
사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용술을 펼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용술이란 것을 알지도 못했다.
몸속의 기운이란 것도 평범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그의 맥을 짚어봤지만, 내공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체가 더 오리무중이었다.
처음에는 해남도 전투 중 바다에 떨어진 무사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공이 전혀 감지되지 않아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기억까지 상실했으니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차차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물론입니다. 절망은 없으니까요. 설사 이 상태가 영구히 지속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기회가 온다면 옛 기억을 되찾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긴 하오만······.”
태극선생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독특한 사람이군.’
“곧 아가씨께서 오실 것이오. 아가씨께서 그대를 구했으니 나중에 보면 감사의 인사나 하시오.”
“네.”
사내가 대답한 그때.
방문이 열리며 김지혜가 들어왔다.
“아! 정말 깨어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