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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75화 (75/250)
  • [제24장] 해신 4

    “어서 화살을 발사하라!”

    노부야스가 급히 명을 내렸다.

    그대로 두면 배에 불이 붙을 위험이 매우 컸다.

    휙휙휙.

    화살 수백 발이 그대로 백자안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몸에 닿기도 전에 불에 타서 녹아내리고 말았다.

    알고 보니 백자안의 몸에 붙은 불이 보통 불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수 불로 변해있었다.

    “우우우!”

    백자안이 사자후를 다시 터뜨리며 양팔을 휘저었다.

    순간, 수백 장 길이의 불기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화르륵.

    불이 왜구들의 함선에 붙으며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왜구들이 비상용으로 준비한 소방수를 뿌렸다.

    하지만 오히려 불길이 수십 배 이상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장례를 위해 밀집대형으로 모여 있던 이천여 척의 배에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백자안이 신형을 무섭게 회전하며 불기둥을 연신 뿜어냈다.

    “으윽!”

    “크윽!”

    불이 붙은 왜구들이 비명과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

    장례를 위해 포구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섬으로 탈출하기도 어려웠다.

    불타는 배는 점점 늘어갔다.

    불에 탄 배가 이웃 배에 불을 옮기는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대장선까지 화염이 치솟자 노부야스가 분노했다.

    무공이 강한 대주들과 지휘부 고수들 일부가 배를 버리고 포구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포구 역시 불바다인 상태였다.

    그때였다.

    엄청난 폭발 소리와 함께 포구 전체가 날아갔다.

    왜구들이 묻어놓은 화약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 속에 있던 왜구들이 몰살한 것은 물론이었다.

    “피해라!”

    “어서!”

    왜구들이 우왕좌왕하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섬에 들어갈 수도 없고 배에 있을 수도 없어 바다에 뛰어든 것이었다.

    백자안은 미친 듯이 날뛰며 배에 계속 불을 질렀다.

    배가 워낙 많아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지만,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한 시진 가량의 시간이 흘렀을까.

    대부분의 배가 불에 타버리고 왜구들 또한 대다수가 불에 타 전사했을 때.

    북소리와 함께 일단의 함대가 나타났다.

    바로 남해무림연합과 정의련, 그리고 무림맹 함대였다.

    그들은 왜구들의 배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기회로 생각했다.

    “불화살을 날려라!”

    만박서생의 명에 오만 무사들이 일제히 불화살을 날렸다.

    앞뒤로 막힌 왜구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바다에 떠 있던 왜구들 역시 화살을 맞고 죽어 나갔다.

    백자안은 이제 왜구 지휘부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무차별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여전히 불의 갑옷을 입고 있는 그는 그야말로 불의 신이었다.

    단목수련, 백리설아, 악미미, 백소영 등과 함께 지휘선에 타고 있던 만박서생 마저 입을 딱 벌렸다.

    “저 사람이 누구기에?”

    “전설의 화신(火神) 같아요. 아니 바다에서 불을 뿜어내니 진정한 해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우리에게는 정말 다행이에요. 오늘 승리한다면 모두 저분 덕분이에요.”

    단목수련이 손으로 백자안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총책사 노부야스와 흑수대주 두 사람이 백자안의 손에 잡혀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

    “크윽!”

    “으윽!”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구들의 지휘부 고수 천여 명이 백자안의 손에 무참히 도륙되고 있었다.

    만박서생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왜구 지휘부 고수들의 무공 수위를 생각할 때 백자안이 없었다면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왜구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 죽은 것 같았는데 곳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아직 불에 타지 않은 배로 모여 필사적인 항전을 했다.

    그에 따라 남해무림연합과 정의련, 무림맹 무사들의 피해도 점점 커졌다.

    기본 전력에서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백자안과 싸우고 있는 왜구 지휘부 고수들 또한 가장 무공이 강한 자들만이 남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았다.

    사실 이지를 상실한 것 같은 백자안의 공격은 빈틈이 많았다.

    다만 백자안에 대한 공격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불의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박서생이 말했다.

    “아무래도 불의 화신 같은 저자가 이지를 상실한 것 같습니다. 왜구들을 몰살한 후 그 공격 대상이 우리로 바뀌지 않을까 그게 걱정입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옆에 있던 남해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자를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왜구들을 몰살시킨 후 곧바로 철수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동방무맹에서 온 지원 함대는 왜구들의 퇴로를 막고 있습니까?”

    “네. 지금 김지혜 사범이 그쪽으로 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로 할 일이 없을 것 같군요.”

    만박서생이 계속 싸움을 독려했다.

    전투는 다시 접전 상태로 이대로 가면 양패구상할 가능성이 컸다.

    하기야 원래대로라면 왜구들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었다.

    만박서생은 해남도 포구에 진입하기 직전 자신이 어쩌면 유인작전에 걸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문에 더 들어오지 않으려 했는데, 불길을 보고 과감하게 포구로 진입한 것이었다.

    “아! 저기!”

    단목수련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백자안이 얼굴을 감싸 쥐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다 죽어가던 왜구 지휘부 고수들이 되살아났다.

    아직 삼백 명 정도 남은 지휘부 고수들은 여전히 막강 전력이었다.

    그들이 백자안을 내버려 두고 중원 무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전세가 바로 역전될 수 있었다.

    왜구 역시 몰살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삼만 정도가 살아있었다.

    충분히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병력이었다.

    특히 최후까지 살아남은 놈들의 무공은 대부분 높은 편이었다.

    만박서생과 남해기인 등이 안색을 굳혔다.

    그때 영호광이 이끄는 일천 지존수호대 무사들이 나섰다.

    그들은 전세를 관망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자 비로소 나선 것이었다.

    “총공격하라!”

    영호광을 필두로 지존수호대 무사들이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목표는 왜구 지휘부 고수들이었다.

    와아아.

    차차차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다른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은 왜구들 역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바로 그때였다.

    쾌속선 두 대가 빠르게 포구로 다가왔다.

    두 배 모두 대형선으로 배마다 수천 명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만박서생은 한눈에 그들이 우군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배에 걸린 깃발을 봤다.

    누런 깃발.

    그곳에 적힌 것은 황(皇)이란 글자였다.

    황제의 군대.

    바로 황군이었다.

    그랬다.

    황궁에서 특별히 정예 고수들을 보낸 것이었다.

    백만 황군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난 고수 사천 명을 선발해 비밀리에 파견한 것이었다. 마침 적절한 시간에 도착했다.

    “황군이다!”

    만박서생이 소리쳤다.

    그 말에 아군들의 사기가 올라갔음은 물론이었다.

    만박서생이 유심하게 본 것은 황군을 통솔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두 배 중 좀 더 큰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이었다. 총지휘자를 증명하는 지휘보검을 들고 있었다.

    만박서생은 그 검이 바로 황궁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황제보검(皇帝寶劍)임을 알았다.

    이 황제보검은 황궁의 지존검이란 별명이 있듯이 황궁제일보검이었다.

    그 위력 또한 대단했다. 검 자체에서 벼락을 발출할 수도 있다고 전해졌다.

    만박서생이 더욱 놀란 것은 황제보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궁장미녀.

    속세에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미모의 황의소녀 한 명이 담담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그 유명한 절대황녀(絶對皇女)? 황제의 금지옥엽으로 황궁무고에 있는 무공을 모두 연마한 무공의 천재라는 그녀가 직접 온 것인가?’

    황의소녀, 즉 절대황녀가 황제보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명을 내린다. 왜구들을 토벌하라!”

    와아아.

    수천 황궁 고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무공은 상상 이상이었다.

    지존수호대 무사들과 합세한 그들은 단숨에 전세를 기울게 했다.

    왜구들의 기가 크게 꺾이며 도주하는 자가 속출했다.

    한편 백자안은 침몰하고 있는 대장선 위에서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전장의 상황은 이미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데 자세히 보니 그의 얼굴에 불이 붙은 것이 아닌가.

    다른 곳은 괜찮은데 역용한 얼굴에 실제 불이 붙어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역용한 얼굴이라 큰 지장은 없지만, 문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우우우!”

    백자안이 다시 사자후를 터뜨렸다.

    무사들의 함성에 묻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제법 컸다.

    절대황녀가 백자안을 보며 눈을 빛낼 바로 그때.

    백자안이 크게 한번 휘청거린 후 바다에 떨어졌다.

    풍덩.

    “아!”

    절대황녀가 탄성을 터뜨렸다.

    탄성은 그녀만 터뜨린 게 아니었다.

    싸움의 와중에 백자안을 주시하던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절대황녀였다.

    스스스.

    물 위를 마치 평지처럼 미끄러져 간 그녀가 백자안이 추락한 곳에 도착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이미 거센 파도에 휩쓸려 간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절대황녀가 한숨을 한번 내쉰 후 전장에 뛰어들었다.

    번쩍. 번쩍.

    황제보검에서 벼락이 뿜어 나오자 왜구 수십 명이 숯덩이가 되었다.

    그야말로 여무신(女武神)이었다.

    그러는 동안 만박서생, 남해기인, 단목수련 등도 일제히 전투에 참여했다.

    왜구들 역시 끝까지 싸웠으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남해 포구 앞바다가 피로 물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만박서생이 승리를 선언했다.

    십만 왜구 중 이제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살당한 것이었다.

    아군 측도 일만 가까운 사상자가 났다. 하지만 그전의 싸움을 생각할 때 대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겼다!”

    “대승이다!”

    와아아아.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불길도 이제 사그라져 있었다.

    소식을 듣고 포구까지 나온 해남도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다.

    압제에서 해방된 그들의 표정엔 감격이 서려 있었다.

    무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남해무림연합 무사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지켰다는 생각에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모두의 가슴 속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불의 갑옷을 입고 왜구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준 사람.

    불벼락을 안겨준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누군지 몰랐다.

    왜구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다른 한 사람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미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혹시나 해서였다.

    “무정 사범님!”

    “무정 사범님!”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타게 백자안을 찾는 그녀들.

    바로 단목수련, 악미미, 백리설아, 백소영 네 명이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는 사람은 바로 백소영이었다.

    만날 집에 돌아가 투덜댔지만, 수업 도중 백자안이 자신을 가장 아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최근에는 특별히 그녀의 자질을 칭찬해준 백자안이 아니었던가.

    “사범님! 살아 계신 거죠? 기다릴게요! 돌아오세요!”

    백소영의 애타는 목소리가 피바다로 변한 해남도 포구에 메아리가 되었다.

    바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제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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