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4장] 해신 2 >
해남도 포구.
왜구들의 선박 천여 척이 정박해 있는 이곳은 지금 긴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승리를 자신하며 여유가 있었던 최근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그것은 어젯밤 전해진 한 소식 때문이었다.
왜국 본토로 압송된 것으로 알았던 부녀자 삼만 명이 실은 남해검파 총단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다시 말해 탈출했다는 말이었다.
그 바람에 왜구 함대가 모여 있는 이곳은 벌집을 쑤셔댄 듯 술렁이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해신 미야모토가 불같이 화를 낸 것은 물론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그 많은 대인자문 고수와 해신사자들이 고작 한 놈에게 당해 죽었단 말이냐?”
대장선 지휘실 태사의에 앉은 미야모토의 말에 삼백여 왜구 지휘부 고수들이 안색을 굳혔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무조건 할복해야 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왜구 총책사 노부야스가 말했다.
“해신님께 아룁니다. 간자들의 보고 등 여러 첩보에 의할 때 무정 사범이란 놈에게 당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다만 놈 역시 동귀어진하여 시체조차 못 찾았다고 하니,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아닙니다.”
“총책사.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놈에게 당한 병력이 무려 천 사백이오. 한 놈에게 그렇게 많은 병력이 당한다는 것이 말이 되오? 게다가 그들 중 대다수는 대인자문 총단 무사들이오. 대인자문주가 보고를 받게 되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가뜩이나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데, 이 일을 기화로 우리 해신방(海神幇)을 해체하려 하지 않겠소?”
미야모토가 안색을 굳혔다.
그랬다.
지금 그의 걱정은 죽은 무사들이 아니라 바로 대인자문주의 반응이었다.
그가 말한 해신방은 왜구들이 스스로 부르는 조직명이었다.
방주를 해신이라 부르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장차 중원 무림을 석권하기 위해 조직을 체계화한 셈이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본토와 이곳은 거리가 매우 멉니다. 무엇보다 대인자문주는 지금 동방 무림 장악에 몰두해 있습니다. 곧 이십만 무사를 직접 이끌고 동방 무림을 정복하기 위해 출정할 예정이지요.”
“하지만 계집 삼만의 음기를 보충하고 난 후 출정하려는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았소? 예정대로 정벌에 나설 수 있겠소?”
“큰 지장은 없을 겁니다. 계집들을 본토에서 조달해도 되니까요. 이미 그 정도 수의 계집을 확보해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기야 본토 양민 중에 반반한 계집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들이긴 했지. 대인자문주는 성미가 급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비축한 계집들을 이용할 것이오.”
“잘 보셨습니다. 음기 흡수는 정벌 중에도 가능하기 때문에, 동방 계집들의 음기 또한 지속해서 흡수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날이 갈수록 무사들의 무공이 강해지게 되지요.”
“그 기세를 몰아 결국 이곳 중원 무림까지 정복하려는 계획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방과 달리 이곳 중원은 땅이 수십 배 더 넓기 때문에 반드시 교두보가 필요하지요. 대인자문주가 우리 해신방을 지원해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대인자문주가 동방 무림을 정복하기 전에 우리 해신방이 기반을 확실히 다져야 하오. 이미 대인자문 출신 방도들은 모두 내편으로 돌려놨지만, 문제는 무공이오. 대인자문주의 무공은 솔직히 나보다 한 수 위요.”
미야모토가 의외로 자신의 열세를 인정했다.
그것도 지휘부 고수들이 보는 자리에서.
하기야 사기 진작 면에서 자신이 더 무공이 높다고 알려질 필요가 있는 것은 하급 방도들 사이에서였다. 반면 정보가 빠른 지휘부 고수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미야모토가 대인자문주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최근 신공을 완성해 대인자문주보다 무공이 더 높아졌소. 따라서 그 문제 또한 과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그와의 재대결은 훗날의 일이니 아직 변수가 많을 것이오.”
미야모토가 미소를 지었다.
대인자문주 역시 신공수련을 하고 있으나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최근 완성한 상태였다.
자신의 우세를 점치는 이유였다.
“한데 스미치카 그놈이 아직 살아있다고 했던가?”
“네. 운송대주가 용케 살아남았습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는데,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습니다.”
“어떻게 발견했다고 하오?”
“해신사자들이 해신대 지휘선을 해남도로 돌려보낼 때 은밀히 따라오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신대 무사들이 복주 쪽으로 뒤따라갔지요. 거리를 두는 바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림맹 놈들이 계집들을 남해검파로 옮긴 이후였군. 그럼 그곳에서 스미치카를 발견한 것인가?”
“네. 죽은 고래 한 마리가 현장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입에 놈이 물려있었다고 합니다. 기이한 일이지요.”
“으음, 쓸모없는 놈들. 스미치카 그놈은 나를 반역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냥 내버려 둬 죽게 하지 왜 데리고 왔단 말인가. 내가 놈을 아예 만나주지도 않은 것을 알고도 그런 것인가.”
“해신대 대원들이 뭘 알겠습니까? 운송대주이자 유일한 생존자이니 일단 데려왔겠지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놈이 깨어나 나중에 대인자문주에게 헛소리를 할까 그게 걱정이긴 합니다.”
노부야스의 물음에 미야모토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병문안을 한번 가보겠소. 맥을 한번 짚어 보면 모든 게 마무리될 것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미야모토가 지휘부 고수들을 쳐다봤다.
노골적으로 백자안을 죽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현명하십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삼백여 지휘부 고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비록 그들 대부분이 대인자문 출신이라고는 하나 이미 모두 미야모토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신방에 투신한 고수들은 대부분 대인자문의 비주류였다.
대인자문 총단에서 차별을 받은 그들은 하나같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대인자문주는 그런 자들을 대거 해신방으로 보낸 것이었다.
이는 어차피 중원으로 가면 독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교두보 마련이 중요해 지원해준 것이었다.
대인자문주로서는 내부의 우환거리를 외부 전쟁터에 보내 자체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장점도 컸다.
물론 그 이면에는 나중에 다시 압도적인 힘으로 그 세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작용했다.
“어서 가보지.”
미야모토가 일어섰다.
공개적으로 백자안을 죽이러 가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말리는 자가 없었다.
미야모토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해신대 지휘선 한 선실 안.
죽은 해신대주의 방이었던 그곳에 한 사람이 침상에 누워있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백자안이었다.
무명폭잠공을 펼친 후 바로 정신을 잃었던 그는 지금 가사 상태였다.
깊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던 그는 고래의 밥이 될 뻔했었다.
하지만 고래 역시 백자안의 몸속에 흐르는 천마진기에 의해 죽고 말았다.
바다 위로 떠 오른 고래 덕분에 백자안은 해신대 무사들에 의해 건져진 셈이었다.
해신대 무사들은 백자안을 데려온 데 대해 총책사 노부야스에게 꾸지람을 듣고 다시 계획을 짜고 있었다.
삼백여 명의 그들은 노부야스가 작전회의 참석을 위해 대장선으로 가자 급히 모였다.
회의의 결론은 단 하나였다.
어서 백자안을 죽이자는 것이었다.
“스미치카 이놈이 깨어나면 큰일이오. 해신님께서 직접 오실지도 모르니 그 전에 어서 죽여야 하오.”
“맞는 말이오. 어서 심맥을 끊어 죽입시다. 그게 가장 표시나지 않을 것이오.”
“내가 하겠소.”
방으로 들어온 해신대 무사 십여 명 중 한 명이 백자안 곁으로 갔다.
백자안으로서는 저승사자가 바로 옆까지 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천마진기의 엄청난 원력 폭발로 충격을 받아 모든 의식이 정지된 상태였다.
사실 이런 상황은 백자안의 실수이기도 했다.
무명폭잠공을 펼치기 전 천마진기를 무명진기와 다시 분리해놓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천마진기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의식을 잃기 직전 백자안은 그 사실을 깨닫고 매우 당황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실신은 단순한 후유증이 아니라 거의 영구적이었다.
오히려 무명폭잠공의 후유증 자체는 매우 적었다.
무명진기의 양이 거의 무한대라 그 내공이 후유증을 최소화해준 탓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연속해서 무명폭잠공을 아무 무리 없이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정도는 내공의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사흘째가 되는 지금 실제 문제가 되는 것은 천마진기뿐이었다.
천마진기의 힘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열 배는 더 강력한 것이었다.
아니 아직 정확히 계산이 안 될 정도로 막대했다.
그만큼 생전 천마의 내공이 강력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자안은 그 내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했을 뿐 그 기운을 제대로 다스리지는 못했다.
무명심법은 포용할 수는 있었으나 천마진기에 특화된 심법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천마진기를 다스릴 수 있는 심법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정신을 잃기 전 백자안 스스로 떠올린 바 있었다.
바로 흡수대법이었다.
흡수대법은 내공심법으로 천마진기를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었다.
백자안은 귀면탈 소녀 덕분에 그 흡수대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번에 정신을 잃기 전에 한 번이라도 흡수대법으로 천마진기를 정리해두었다면 이런 상태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외부 자극이었다.
흡수대법을 자동으로 발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두면 풍선이 터지듯 그의 육신도 터져버릴 것이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일각 정도.
해신대 무사 한 명이 손을 뻗어 백자안의 심맥을 끊으려던 찰나.
선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해신님이시다!”
해신대 무사가 손을 멈췄다.
그를 비롯한 모든 무사가 방을 나갔다.
미야모토를 영접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한 사람이 들어왔다.
한데 그는 바로 미야모토가 아닌가.
그는 방에 들어오기 전 수하들에게 명을 내려 외부인의 출입을 금했다.
명목상은 운송대주의 상태를 살피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죽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해신방의 방주인 그가 직접 온 것은 의외였다.
백자안을 죽이려면 간단히 명만 내리면 되기 때문이었다.
미야모토가 백자안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내가 완성한 신공인 해신흡결(海神吸訣)을 시험해볼 절호의 기회다. 중원 마교의 흡수대법에는 비하지 못하겠지만, 스미치카 이놈이 가진 내공의 절반은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해신흡결.
그것은 그가 대인자문주를 겨냥해 만든 신공이었다.
하지만 흡수대법에 비해 단점이 많았다.
흡수율도 약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한 번에 한사람에게만 펼칠 수 있었다.
내공 대결과 마찬가지로 해신흡결을 펼칠 때 외부의 타격을 받게 되면 주화입마될 위험도 컸다.
사실 이 해신흡결은 마교의 흡수대법을 모방해 만든 것이었다. 원래 창안자는 수백 년 전 흡수대법에 당해 죽을 뻔 했던 대인자문의 고수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다가 그 후손인 미야모토의 손에 부족하나마 완성된 것이었다.
미야마토가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백자안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대고 해신흡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 [제24장] 해신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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