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4장] 해신 1 >
[제24장] 해신
“저기가 복주입니다.”
운송대 부대주 타츠이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지휘선 위에 타고 있던 백자안, 단목수련, 해신수석사자 등이 모두 그쪽을 쳐다봤다.
지휘선 위에는 대인자문 고수 삼백여 명, 해신사자 백여 명 모두 사백여 명이 있었다.
물론 지휘선 뒤에는 백여 척의 운반선이 서서히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복주가 보이는 근해(近海)였다.
“모두 멈춰라.”
백자안이 소리쳤다.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지휘선이 멈췄다.
뒤따라오던 운반선들 역시 멈춘 것은 물론이었다.
근해에서 배를 멈춘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더 접근하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애초에 이쯤에서 마중 나올 백자안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백자안이 지금 배 위에 있는 마당에 마중 나올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백자안이 주위를 둘러봤다.
‘이 정도 거리면 지원 병력을 요청해 배를 뭍에 댈 수 있다. 이미 단목 소저가 비밀리에 총군사께 전서구를 보냈으니, 무림맹 병력이 마중 나올 것이다. 관건은 그 전에 내가 이곳을 정리하는 것이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옆에 있는 단목수련 역시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곳 복주까지 오는 동안 두 사람은 상의에 상의를 거듭했다.
결론은 남해검파에 있는 만박서생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배를 끌고 갈 수 있는 병력을 파견해달라는 것이었다.
다만 많은 인원이 출동하게 되면 운송대 배들이 도주할 우려가 컸다.
설사 도주를 막는다고 해도 전투 중에 부녀자들의 집단 사망 등 불상사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일단 배 한 척을 보내 달라고 했다.
배 위에는 백자안으로 위장한 한 사람이 타고 있게 했다. 그리고 선실 안에는 배를 다룰 줄 아는 백 명의 선원이 숨어 있게 했다.
문제는 현재 운송대 지휘선에 타고 있는 사백여 고수들의 척결이었다.
백자안은 고심 끝에 혼자서 그들을 섬멸하기로 했다.
물론 무림맹 측에서도 백여 척의 선박을 따로 준비해두게 했으나, 그들이 출동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무림맹 측 함선들이 이곳까지 당도하기 전에 모든 싸움이 끝나 있어야 부녀자들의 안전이 담보될 수 있었다.
백자안이 실제 필요로 하는 것은 부녀자들을 태운 운반선들을 몰 선원 백 명 정도였다.
마침 바람이 육지로 불고 있어 돛의 방향만 잘 조절하면 큰 문제가 없었다.
단목수련이 급히 전음을 보냈다.
「무정 사범님. 정말 혼자서 이자들을 모두 처리하실 수 있겠어요? 일단 사범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가능할지 의문이에요.」
「그럼 어쩌겠소? 함대가 다가오면 이자들이 동요할 것이고, 이후 일은 장담하기 어렵소. 내게 생각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오.」
백자안이 전음을 보낸 후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자신감의 표시였다.
그의 내공은 지금 최고 수준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무명폭잠공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물론 후유증을 피할 수 없겠지만 이전처럼 며칠씩 정신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단 이 경우에도 단점은 있었다.
무명폭잠공을 펼친 후 상당 시간 내공을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 기간이 어느 정도나 될지는 지금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아무리 빨라도 하루 이상은 쉬어야 어느 정도 내공 운용이 가능할 것이었다.
어차피 해남도로 돌아가는데 하루 이상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놈들을 제거하고 해남도로 돌아가 미야모토를 제거한다. 회복은 해남도로 돌아갈 때까지 완료한다.’
백자안이 자신의 계획을 되새겼다.
해신수석사자가 말했다.
“정말 여기 있으면 백자안 그놈이 오는 것이오? 오히려 적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함대를 보내지 않겠소?”
“그건 기우요. 보다시피 포구에 정박한 배는 얼마 없소. 전투는 내륙 쪽에서 벌어지고 있어 이곳 복건성 해안가는 비교적 평화롭기 때문이오. 마침 해상에 안개가 끼고 있어 우리가 백여 척의 배를 몰고 여기 있는 것을 포구 쪽에서 정확히 볼 수도 없소. 아마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보일 것이오. 반대로 우리 쪽에서는 포구가 비교적 잘 보이는 편이니, 반대편 쪽에 배를 숨겨두지 않은 이상 적의 대규모 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백자안이 손을 들어 복주 포구 쪽을 가리켰다.
전서구를 통해 만박서생에게 보낸 서신에 함선들을 다른 쪽에 숨겨두라고 했었다.
다행히 포구는 굴곡이 있어 오른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쪽에 정박해 있는 배들은 보이지 않았다.
백자안의 계획대로 사실 지금 그곳에 무림맹 무사들이 타고 있는 전투선 백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들은 출동 신호를 받게 되면 즉시 이쪽으로 나올 예정이었다.
“그래도 백자안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오? 이대로 계속 기다릴 수는 없소이다.”
해신수석사자가 계속 투덜댔다.
운송대 부대주 타츠이 역시 불만 어린 표정이었다.
아니 불만을 넘어 의구심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포구 쪽에서 한 척의 배가 천천히 출발해 백자안 등이 있는 쪽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중형선이었다. 배 위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죽립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 수 없었지만, 정황상 한 사람을 가리켰다.
“백자안이다!”
단목수련이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다들 깜짝 놀라며 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다가오고 있는 배는 무림맹 소속 배였다.
선실 안에는 백여 명의 선원이 숨어 있었다.
그 선원들은 일반 선원이 아니라 무림맹 소속 무사들이었다.
모두 뱃사람 출신으로, 이번에 만박서생이 해상 전투를 위해 특별히 선발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배를 모는 기술은 탁월했다. 돛의 방향만 잘 되어 있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몰 수 있었다.
백자안이 소리쳤다.
“각 운반선에 알려 모든 배를 밧줄로 서로 묶도록 하시오. 각 배에 타고 있는 무사들은 모두 지휘선으로 건너오도록 하시오. 백자안 저놈의 무공은 문주님과 대등하니 우리 모두 합공해야 승산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놈이 우리 병력에 놀랄 수 있으니 모두 갑판 위에 엎드리도록 하시오. 안개를 헤치고 조금만 들어오면 우리 모습이 확실히 보일 것이니 서두르도록 하시오! 시간이 없으니 이의는 받지 않겠소. 꾸물대는 자는 즉시 참할 것이오!”
백자안이 검을 높이 들었다.
“존명!”
“존명!”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백자안의 명이 실천되었다.
먼저 운반선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사실 원래 이탈을 막기 위해 서로 긴 밧줄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밧줄을 끌어당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각 운반선에 있던 대인자문 무사들이 지휘선으로 넘어왔다.
모두 백여 척이라 천여 명이나 되는 대병력이었지만 일사불란했다.
다행히 지휘선은 이천 명까지도 태울 수 있는 규모였다.
그다음은 백자안의 말대로 모두 갑판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마중을 나온 백자안이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명분이었다.
다들 암습을 위해 은신한다고 생각해 최대한 몸을 갑판 위에 밀착시켰다.
사백여 고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선실 안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백자안은 그들 역시 갑판에 있게 했다.
무명폭잠공을 펼쳤을 때의 위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각자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지만,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 있는 사람은 이제 백자안, 단목수련, 타츠이, 해신수석자사 네 사람 정도였다.
백자안이 말했다.
“백자안 저자가 가까이 오면 운송관이 그자의 배로 먼저 가서 상황을 살피시오. 특히 선실 안에 혹시라도 무사들이 숨어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오.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백자안 그자와 함께 이곳으로 오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단목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이 부분은 이곳으로 오면서 이미 백자안과 합의된 부분이었다.
무명폭잠공으로 지휘선 자체를 날려버릴 생각이라, 단목수련으로 하여금 미리 대피하게 하고 이후의 일을 맡길 계획이었다.
물론 이후의 일이란 부녀자들을 모두 무사히 남해검파 총단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죽립인을 태운 배가 십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단목수련이 경공을 펼쳐 그쪽으로 날아갔다.
바람 때문에 물 위에 한 번 닿긴 했지만 가볍게 다시 솟구쳐 배 위로 올라갔다.
죽립인이 흠칫한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미리 전서구를 통해 백자안과 단목수련 두 사람이 역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였다.
“단목수련이에요.”
단목수련이 신분을 밝히자, 죽립인이 말했다.
“단목 소저였구려. 나 만박서생이오.”
“아, 총군사님.”
단목수련이 기뻐했다.
누가 백자안으로 변장했을까 궁금했었는데, 놀랍게도 만박서생이 직접 온 것이었다.
만박서생은 보안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번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왜구에서 보낸 간자들이 분명 남해검파 총단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히 선원 경력이 있는 무사 백 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이렇게 배를 끌고 온 것이었다.
물론 백여 척의 함선 역시 준비를 해두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이번 작전이 부녀자 구출과 관련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신호탄을 쏘면 출동해 전투에 참여하라는 명을 전달해두었을 뿐이었다.
남해무림연합과 정의련 쪽에서는 서쪽에서 진군해 오는 왜구들을 막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기에, 이쪽에 관심을 크게 두지 못했다.
“어떻게 되었소? 무정 사범 혼자 저놈들을 제거할 수 있겠소? 놈들의 병력은?”
만박서생이 묻는 순간.
엄청난 폭발 소리와 함께 운송대 지휘선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마치 거대한 화약을 설치해두었다가 폭발시킨 것 같았다.
“아!”
단목수련이 안색을 굳히며 불타는 지휘선을 쳐다봤다.
지휘선 잔해 속에는 지금 한편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화염 속에 천사백여 명의 대인자문 무사와 해신사자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백자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명폭잠공을 펼친 것만은 확실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백자안은 단목수련이 무사히 만박서생이 타고 온 배에 올라타자 곧바로 무명폭잠공을 일으켰다.
내공과 무관한 무명폭잠공이지만 무명심법 칠성에 도달한 상태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정감이 있었다.
하지만 무명폭잠공의 특성상 이를 연습해볼 수는 없어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매우 순조로웠다.
역시 내공은 다다익선인지 이대로 가면 후유증도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내공의 극한에 잠력까지 완전히 폭발시키기 직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몸속에 있던 천마진기가 무명폭잠공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이미 무명진기화시켜 둔 상태라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든 분리가 가능할 정도로 독립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잠력을 폭발시키는 무명폭잠공이 발동되자, 천마진기 자체의 본성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것은 숨어 있던 마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주화입마되어 갑자기 실성마인이 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나 강력한 천마진기의 원력이 폭발함으로써 제어가 힘들었다.
그 결과는 통제 불능이었다.
백자안은 공력을 발출함과 동시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다만 백자안의 공격을 받은 지휘선과 그 안에 타고 있던 천사백여 무사들은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죽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백자안은 바다 밑으로 하염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 [제24장] 해신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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