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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63화 (63/250)
  • < [제21장] 남해검파 1 >

    [제21장] 남해검파

    “오늘 수업부터 육합심법을 가르쳐주겠다. 구결부터 암기하도록 해라.”

    백자안이 육합심법의 구결을 자기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관원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그가 창안한 육합심법은 매우 기초적인 심법으로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보름 전 화산에서 돌아온 백자안은 수업을 다시 맡았다. 지난 며칠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마침내 육합심법을 창안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무정 사범님. 그게 정말인가요? 역시 우리 담임 사범님이 최고야.”

    백소영의 말이었다.

    그녀 옆에는 백리설아의 모습도 보였다.

    한데 놀라운 것은 바로 두 소녀와 함께 있는 여관원이었다.

    바로 화산옥녀 악미미였던 것이다.

    악미미는 백소영과 백리설아 두 소녀와 그동안 매우 친해진 듯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백자안이 대답에 앞서 악미미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악 소저가 내 수업을 듣게 될 줄이야.’

    사정은 이랬다.

    천마동이 무너지고 악미미가 깨어난 후 열흘간 대대적인 수색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혈교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광세혈신과 살인혈객 두 사람은 이미 혈교 총단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만박서생은 해산을 명했다. 그 결과 군웅들은 각자 문파로 돌아갔다.

    물론 자파의 수장을 잃은 무사들은 혈교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그렇게 백자안과 김지혜도 낙양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갑자기 악미미가 두 사람과 함께 영웅무관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백자안이 영웅무관 사범이라는 것을 알고 무공을 직접 배우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실 악미미가 깨어나고 다음날 백자안은 무정 사범 자격으로 그녀와 다시 인사를 나눈 바 있었다.

    백자안이 악미미의 맥을 다시 띄게 해주고 생명을 연장해준 일 때문이었다.

    악미미는 감사를 표시했다. 백자안은 그 기회를 이용해 그녀에게 다시 내공을 넣어주었다.

    악미미가 백자안에게 무공을 배우려고 결심한 것은 바로 그 당시였다.

    내공 치료를 위해 두 사람이 단둘이 있을 때 백자안이 그녀에게 몇 가지 무공 수련에 대해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 일이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었다.

    그녀의 결심을 더욱더 확고하게 한 것은 백자안이 맡은 반에 백소영과 백리설아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다.

    백자안과 화해를 한 그녀는 백소영과도 친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기회가 된 것이었다.

    와룡대 복귀라는 명분도 컸다.

    와룡대원은 영웅무관 사범처럼 각자 개인적인 사정으로 얼마든지 휴가를 갈 수 있었지만, 그녀는 조속한 복귀를 원했다.

    그래서 총단과 가까운 영웅무관에서 당분간 무공을 배우며 회복에 전념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매화검선은 그녀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쾌히 허락했다.

    백자안의 능력을 천마동에서 직접 확인한 그였다.

    무적세가 대공자 독고준이 무사들을 이끌고 화산으로 오다가 남해검파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새로운 우군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사범님.”

    백소영이 다시 묻자, 백자안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모두 구결을 받아 적도록 해라. 다시 말하지만 육합심법의 구결은 너희들만 알고 있어야 한다. 구결이 쉬워 보이지만 내 지도를 받지 않고 함부로 연마하게 되면 주화입마의 위험이 높다. 알겠느냐?”

    “네.”

    “네.”

    백여 명의 관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백자안에 대한 존경심이 어려 있었다.

    만박서생의 예상대로 백자안이 천마동에서 펼친 활약은 강호에 널리 소문이 퍼져있었다.

    오죽하면 다른 반에서 수업을 받던 관원들이 모두 백자안에게 배우고 싶어 했겠는가.

    하지만 백자안은 아직 많은 인원을 가르치기 힘들다는 이유로 사양해 관원들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꼴찌반이 가장 선망하는 반이 된 것이었다.

    육합심법의 구결은 모두 천자였다.

    짧은 구결이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심오했다.

    물론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육합의 의미를 백자안이 쉽게 풀이한 것이었다.

    다만 그 구결을 각자의 이해도에 따라 얼마든지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이는 심법에 무명심법의 원리 중 일부가 담긴 결과였다.

    처음 반에 들어오자마자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악미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범님. 육합이 결국 일합이고, 일합이 결국 육합이란 말씀인가요?”

    “그렇다. 미미가 역시 영특하구나.”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악미미를 가르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편하게 하게 된 그였다.

    이름을 부르자 이전보다 악미미를 대하는 것이 훨씬 편해진 게 사실이었다.

    “구결은 다 외웠느냐?”

    “네.”

    “으음, 구결을 암기하고 곧바로 이해까지 하려 하다니 성의가 대단하구나. 설아 역시 마찬가지냐?”

    “네. 저도 암기는 다 했어요. 하지만 저 역시 악 소저와 마찬가지로 그 부분이 좀 어렵네요.”

    “소영이는?”

    백자안이 의례적으로 백소영에게도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집에 와서 온종일 불평할 게 분명했다.

    참고로 백자안은 최근 풍운장원으로 복귀해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다만 아직 자신이 무정공자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영웅무관으로 매일 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매일 새벽 인근 야산에 가서 종일 개인 수련을 한다고 둘러댔다.

    백소영은 의외로 단순해 백자안의 말을 철통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저녁에 백자안 자신에 대해 험담을 하는 백소영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다.

    자신보다 백리설아와 악미미 두 소녀에게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등 그녀의 불만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세 명의 소녀를 동등하게 대우해주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세 소녀는 영웅무관 삼대미녀로 낙양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악미미가 이전과 달리 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바람에 세 명이 몰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 소녀를 비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하지만 백소영은 이렇다 할 두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공은 악미미가 가장 뛰어나고, 지혜는 백리설아가 뛰어났다.

    백소영으로서는 따로 내세울 게 없었던 것이다.

    무공 역시 큰 진보가 없었다.

    처음 의욕과 달리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무공들이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을러서 그런지 백자안에게도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졸라대지도 않았다.

    백소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저 역시 암기를 모두 했어요. 그리고 그 구절 역시 별것 없던데요. 육합이 일합이란 것은 전부가 곧 하나라는 뜻이잖아요? 그것은 하나가 곧 전부라는 뜻이라 바로 그 유명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지요. 즉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면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니, 전부와 일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육합심법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분별심을 버리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짝짝짝.

    악미미가 박수를 보냈다.

    백소영의 말을 듣고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백리설아 역시 박수를 보내자, 다른 관원들 역시 덩달아 손뼉을 쳤다.

    이제 남은 것은 백자안의 평가였다.

    사실 그 역시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소영이가 깨달음의 무학에 소질이 있는 것을 몰랐구나. 역시 내 동생이란 말인가. 하지만 너무 자만심이 강한 것이 문제다. 지난번에 한번 버릇을 고쳐주려고 했는데 실패했었지. 아니다. 지금은 칭찬해줄 때라 할 수 있겠군. 그러면 소영이 성격에 더 열심히 할 가능성이 높다.’

    백자안이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

    “소영이의 구결 이해력이 대단하구나. 내 생각에 육합심법은 네가 제일 먼저 상승 경지에 접어들 것 같다.”

    “호호! 그게 정말인가요? 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했을 뿐인데······.”

    백소영이 매우 기뻐하며 얼굴을 붉혔다.

    주목병이 다시 도진 것이었다. 눈빛이 빛나는 것이 이번에는 백자안의 예상대로 좋은 쪽으로 작용할 것 같았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고 할 수 있지. 깨달음의 길은 실로 지난한 것이니까. 모두에게 다시 말한다. 조금 전 소영이가 한 말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집중이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주된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이 외물에 따라 날아가고 달려가게 될 것이다. 다들 알겠느냐?”

    “네.”

    “네.”

    “으음, 좋다. 다시 강조하지만, 심법은 기를 기르는 것이다.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지만 너무 욕심이 앞서서 결과를 마음에 예상하게 되면 좋지 못하다. 항상 있고 없음에 초연해 마음의 중심을 세워야 할 것이다.”

    백자안이 말을 한 바로 그때였다.

    잠룡각 대청 안으로 영웅무관 총집사 영웅객이 들어왔다.

    “총집사님.”

    백자안이 인사하자 영웅객이 말했다.

    “수업은 다 끝났소?”

    “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맹에서 총군사께서 오셨소. 지금 관장님과 함께 영웅각에 계시는데, 무정 사범을 급히 찾으시오.”

    “아, 저를 말입니까?”

    “그렇소. 어서 갑시다.”

    “네.”

    백자안이 영웅객을 따라갔다.

    얼마 후 도착한 영웅각 관장실에는 만박서생과 위지경덕이 백자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무정 사범.”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급한 보고가 올라와 상의를 드리러 왔소이다.”

    “남해검파 일입니까?”

    “그렇소. 상황이 매우 심각해진 것 같소. 그래서 무정 사범이 남해검파로 한번 가봐줬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 물론 나 역시 지원 병력을 이끌고 남해검파로 갈 것이오.”

    “제가 말입니까?”

    백자안이 위지경덕을 봤다.

    사범 파견은 원래 관장의 권한이기 때문이었다.

    위지경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정 사범. 힘들겠지만 한 번 더 수고해주시오. 부탁하겠소. 이번에 광동, 광서, 복건성 등 남쪽 지방을 휩쓸고 있는 왜구들의 무공이 너무 강하오. 무적세가 고수들이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토벌되지 않고 있다고 하오. 아무래도 적장을 죽여야 하겠는데, 그 무공이 뛰어나 독고 공자 역시 상대가 안 되어 패했다고 하니 이를 어찌하겠소?”

    “알겠습니다. 왜구들의 무공이 그렇게 강합니까?”

    “단순한 왜구들이 아니오. 왜국의 무림맹이라는 대인자문 소속 무사들이 대거 합류한 이후 그 세력이 막강해졌소. 무정 사범에게 부탁하는 것은 놈들의 수괴를 죽여 달라는 것이오. 왜구의 특성상 수괴가 죽으면 일단 철수를 할 것이니,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오.”

    “출발은 언제 합니까?”

    “내일 아침이오.”

    만박서생이 말을 했을 때 관장실 안으로 세 명의 소녀가 들어왔다.

    바로 악미미와 백리설아, 백소영이었다.

    이들 세 명 역시 만박서생이 부른 것이었다.

    “백 소저. 백자안 대협은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소?”

    “네.”

    “으음, 아쉽구려. 이번에 남해검파로 꼭 함께 갔으면 했는데······.”

    “가족들 모두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몇 달 있다가 온다고 했으니 한두 달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백소영의 말에 옆에 있던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풍운장원에 돌아온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백소영이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 하고 있는 것이다.

    ‘몸은 하나인데 무정 사범과 백자안이 동시에 움직일 수는 없지. 번거롭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악미미가 물었다.

    “이번에 남해검파로 가실 생각인가요?”

    “그렇소. 악 소저도 가려는 것이오?”

    “네. 저 역시 와룡대원으로서 이번에는 꼭 참가해야 할 것 같아요. 대주님을 비롯해 전 와룡대원들이 그곳에 가 있는데, 저도 힘을 보태야지요. 무정 사범님도 가시는 건가요?”

    “그렇다. 미미도 함께 간다니 잘 되었구나.”

    “저도 가겠어요. 이번에 우리 대륙표국에서 식량과 병장기 운송을 맡았으니,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야 할 것 같아요.”

    백리설아의 말에 만박서생이 기뻐했다.

    백소영이 말했다.

    “저도 갑니다.”

    “백 소저까지?”

    “네. 제가 가야 자안 오라버니도 소식을 듣고 그곳에 오지 않겠어요?”

    “아! 백 대협이 온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오.”

    만박서생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백소영까지 함께 부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백자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총군사님 계략에 소영이가 넘어갔구나. 고집이 세서 반드시 갈 것이다. 위험할 텐데 걱정이군.’

    < [제21장] 남해검파 1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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