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장] 천마석실 1 >
[제20장] 천마석실
우르르릉.
콰콰콰쾅.
천지가 떠나갈 듯한 폭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굉음이 멈췄다.
털썩.
백자안이 완전히 기진하여 주저앉았다.
천마광장 주위 벽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모두 백자안의 작품이었다.
천마광장을 비롯한 천마동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백자안이 미친 듯 장력을 퍼부었다. 그 와중에 다시 기관을 건드려 일시 붕괴가 멈춘 것이다.
하지만 균열은 계속되고 있어 완전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태풍을 맞아 대들보가 날아간 집이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나마 주화입마로 인한 마경에 완전히 빠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그 역시 마인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온몸에 붉은 마의 기운이 감돌았고, 두 눈 역시 홍광으로 번쩍였었다.
하지만 무명폭잠공으로 인해 내부의 마기를 어느 정도 배출할 수 있었다.
아니 마기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 마기란 주화입마로 인한 불순한 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연마하다가 주화입마가 되면 기혈이 먼저 흔들리게 된다.
흔들린 기혈은 혈도를 막게 되고 이를 뚫으려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무리하게 되면 내공의 흐름이 혼탁해져 불순한 기가 생성된다. 이 불순한 기가 정신까지 지배하게 되어 마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마경에 빠지면 스스로 통제를 못 하게 되어 파괴적으로 되는데, 미친 것과 다름없다 하여 실성마인(失性魔人)으로 부르기도 한다.
특히 무공이 높던 자가 실성마인이 되면 그 결과는 매우 참혹했다.
최소 수백 명 이상을 살상하게 되는 살인마가 되어 결국 무림인들의 합공을 받아 죽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공격을 받아 죽게 되는 것보다 기를 다 소진해 스스로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끝없이 기를 분출해야 하므로 쉴 틈도 없고 운기조식할 정신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진맥진하여 주저앉아 있을 때 누군가가 그를 공격하여 죽이게 된다. 그때는 실성마인 역시 아무런 힘이 없어 그대로 당하고 마는 것이다.
지금 백자안의 경우가 그랬다.
무명폭잠공으로 잠력을 폭발시켰지만, 이는 무형지독이 몸속에 퍼지는 것을 일시 막아주는 데 불과했다.
무명폭잠공의 효력이 모두 끝나자, 어김없이 무형지독이 다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백자안은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을 한시진 정도로 생각했다.
한시진 후면 무형지독이 심장에 침투하여 대라신선이 와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었다.
공교로운 것은 천마광장을 비롯한 천마동의 붕괴가 일시 멈춘 것도 한 시진 정도가 최대였다.
중독되어 죽든지 깔려 죽든지 결론은 똑 같았다.
그나마 이렇게 정신이 든 것은 한 가닥 희망이었다.
마치 회광반조처럼 소멸 직전에 잠시 왕성해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가 한 시진이나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뭔가 방도를 구해야 했다.
‘나 하나의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니다. 여기서 방도를 얻지 못하면 삼만 군웅들 모두가 죽게 된다. 하지만 내공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문제구나.’
백자안이 몸을 움직여봤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던 그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천마장보도가 보였다.
‘그래. 천마장보도에 천마마비류를 해소하는 방법이 적혀 있다고 했지.’
천마장보도에 더는 무형지독이 묻어있지 않았다.
백자안이 힘들게 기어가 천마장보도를 다시 집었다.
바로 읽어보니 역시 천마동 전체의 지도와 기관들이 적혀 있었다. 한쪽에 천마마비류의 해약 제조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 방법은 광세혈신이 말한 대로 매우 간단했다.
일반적인 삼매진화 방법을 거꾸로 하게 되면 내공이 타면서 수증기가 발생하는데, 그 내공 수증기를 마시면 천마마비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특히 스스로 내공 수증기를 만들게 되면 그 한번 만으로 영원히 천마마비류에 대한 면역이 되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몸에서 천마마비류를 해소해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특수 수증기를 만들어 코에 뿌려주는 것이었다.
다만 특수 수증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공이 일갑자 이상이어야 했다.
백자안이 절망에 빠진 이유였다.
그는 지금 단 한줌의 내공도 일으킬 수 없었다.
무명폭잠공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지만, 최소 하루 이상이 지나야 회복의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원래 지금 그는 이전처럼 정신을 잃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형지독 때문에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아 정신이 깨어있는 것이다.
‘큰일 났구나. 방법을 아는데 내공이 없어 무용지물이다.’
백자안이 탄식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지금이라도 무형검을 연마해 무형지독을 몰아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깨달음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천상여의주를 떠올렸다.
간절할 때 자신의 물음에 답을 해주는 법보.
간절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인지 평소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백자안이 기뻐하며 즉각 의념을 일으켰다.
지금 닥친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질문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바로 대답이 없으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실망이 더욱 컸다.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아니다. 대답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뭔가 내가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백자안이 천마장보도를 손에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윽!”
뼈마디가 부서질 정도로 통증이 왔으나,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온몸에 힘이 없어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나 자신뿐이다. 나를 믿어야 한다.’
그가 천마장보도를 다시 살핀 후 천마동 쪽으로 걸어갔다.
천마동은 예의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던 곳으로, 천마광장 북쪽에 있었다.
물론 매화곡 절벽에 나 있던 통로부터 이곳까지 전부를 천마동으로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천마석실이 있는 곳을 천마동이라 할 때 그곳은 바로 지금 향하고 있는 동굴이었다.
또한 천마동에는 외부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어 이미 광세혈신과 살인혈객이 탈출한 상태였다.
다행히 천마동 역시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다.
광세혈신이 나가면서 붕괴 기관을 건드렸지만, 그 기관 역시 붕괴로 인해 반쯤 부서진 상태였다.
얼마 후 힘겹게 천마동 입구에 도착한 백자안은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광채는 아직도 나오고 있었다.
얼마쯤 들어갔을까.
통로가 구부러진 곳 옆에 비밀통로로 예상되는 곳이 하나 보였다.
하지만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백자안은 이를 예상했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설사 비밀통로가 개방되어 있었다고 해도 혼자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천마동에서 탈출할 수는 있지만 무형지독 때문에 죽음을 피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군웅들을 이대로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또 걸었을까.
죽을힘을 다해 걷고 또 걸으니 걸음이 조금 빨라지긴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철문 하나가 나왔다.
철문은 언뜻 보기에도 보통 철문이 아니었다.
특수 철문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천마시라는 열쇠가 있어야 열리는 문이라고 했던가. 철문 안쪽에 천마석실이란 곳이 있는 모양이구나.’
백자안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벌써 무형지독이 심장 부근까지 접근해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었으면 좀 더 늦출 수 있었지만, 무리하는 바람에 독이 퍼지는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백자안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사실 막막했다.
그래도 일단은 시도는 해야 했다.
백자안이 있는 힘을 다해 철문을 밀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자안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신의 내공이 정상 상태라 하더라도 천마시가 없으면 절대 문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괜히 광세혈신과 혈귀노인 등이 발길을 돌린 것이 아닌 것이다.
털썩.
다시 다리 힘이 풀리며 백자안이 주저앉았다.
벌써 한 시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동굴 안팎에 들리는 굉음은 부쩍 커져 있었다.
이제 언제든 모든 것이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정말 끝인가.’
백자안이 허탈해했다.
다시 한번 천상여의주에 도움을 청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이 번 만큼은 최후까지 자신을 믿어볼 생각이었다.
백자안은 문득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무형검에의 도전을 마지막으로 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무명심법 팔성에 도달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형검의 단계 역시 27개나 있었다. 그 첫 단계는 상선(上仙)이며 마지막 단계는 지성(至聖)이었다.
무명심법 팔성은 상선에 도달함을 뜻했다.
물론 일시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영구적인 경지를 뜻했다.
백자안은 최후의 경지인 지성은 바라지도 않았다.
첫 단계인 상선만 도달하기를 소망했다.
그렇게 해야 자신도 살고 삼만 군웅도 살릴 수 있었다.
‘아니다. 내가 무형검에 도달해 내공을 회복하고 군웅들의 천마마비류를 해소해주어도 천마동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장이구나.’
백자안이 암담한 사실 하나를 비로소 깨닫고 다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비우자. 이것이 운명이라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백자안이 눈을 감고 가부좌를 했다.
이제 한 시진이란 시간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무리했기에 지금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자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뭔가에 쫓기는 것이 사라졌다.
무형지독도, 동굴 붕괴도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부동심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백자안은 그 마음의 주인이 되어갔다.
물론 그렇다고 특별한 기적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편안한 마음속에서 진정한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백자안이 고개를 돌린 후 탄성을 내었다.
“아!”
그도 그럴 것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귀면탈 소녀였다.
백자안은 뜻밖의 만남에 의아해하면서도 반가워했다.
착각인지 몰랐지만 귀면탈 소녀가 나타난 순간부터 동굴 붕괴가 멈춘 것 같았다.
“소저는?”
백자안이 물었다.
귀면탈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내놔.”
“무얼 말이오?”
“천마장보도.”
“천마동 전체가 곧 붕괴할 것이오. 그 전에 군웅들을 대피시켜야 하오. 그러려면 천마마비류부터 해소해야 하오. 나는 무형지독에 중독되어 곧 죽게 되었으니, 소저가 군웅들을 구해주시오.”
“더럽게 말이 많네. 빨리 내놔.”
“알겠소.”
백자안이 천마장보도를 귀면탈 소녀에게 줬다.
어차피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천마장보도를 받아든 귀면탈 소녀가 품속에서 환약 하나를 꺼냈다.
“먹어.”
“그것이 무엇이오?”
“그냥 먹어.”
“알겠소.”
백자안이 미소를 지으며 환약을 받았다.
귀면탈 소녀가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면 벌써 손을 썼을 것이었다.
백자안이 환약을 먹자,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심장까지 침투하기 직전이었던 무형지독이 바로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갈증에 허덕이던 사람이 냉수 한 사발을 먹은 것과 같았다.
“무형지독의 해약이었소?”
“그래. 그냥 준 것 아냐. 지금부터 내 말대로 해야 해. 안 그러면 머리가 박살 날거야.”
“하지만 그 전에 동굴이 붕괴하지 않겠소?”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붕괴 시간을 늦춰놨으니까. 네가 천마광장 벽을 모두 부숴놨지?”
“그런 것 같소.”
“네 덕분에 내가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어. 비상 탈출구가 꼭 한 곳은 아니지. 내 말만 잘 들으면 망부석 삼만 개 모두 무사히 깨워서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거야.”
“알겠소. 소저를 믿겠소.”
“몸은 좀 어때?”
“독은 완전히 제거된 것 같소. 고맙소. 내 목숨을 구해주었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리 비켜봐.”
백자안이 옆으로 비켜나자, 귀면탈 소녀가 품속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혹시 저것이 천마시?’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귀면탈 소녀가 천마장보도를 펴고 그 내용을 유심히 봤다.
“제길.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괜히 탈을 뒤집어쓰고 다녔잖아.”
귀면탈 소녀가 투덜댔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처음으로 천마마비류 해약 제조 방법을 본 것 같았다.
백자안은 아직 내공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면탈 소녀에게 대신 군웅들의 마비를 풀어달라고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녀는 지금 천마석실 안으로 들어가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귀면탈 소녀가 삼매진화를 일으켜 천마장보도를 태워버렸다.
백자안이 놀랄 사이도 없이 천마장보도가 한 줌 재가 되어 버렸다.
한데 귀면탈 소녀가 그 가루를 철문에 뿌리는 게 아닌가.
순간 철문이 금빛을 더욱더 발하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열쇠 구멍이 옆으로 한 자 정도 이동한 것이었다.
귀면탈 소녀가 그 구멍에 열쇠를 넣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따라와.”
< [제20장] 천마석실 1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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