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적 반로환동-58화 (58/250)
  • < [제19장] 혈교 2 >

    살인혈객이 검을 수평으로 내렸다.

    검을 든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혈옥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백자안은 검을 비스듬히 든 채 그대로 있었다.

    그가 펼칠 검법은 육합검법이었다.

    상대가 무형검 고수만 아니라면 육합검법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안심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무명검법을 펼치기 힘든 점이 아쉬웠다.

    아니 정확히 말해 지존검이 아쉬웠다.

    지존검만 있다면 무명검법을 안전하게 연마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은 힘든 상대를 만나 긴장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잘못하면 내가 당할 수도 있다. 이자는 무공 수위와 관계없이 일정 경지에 달한 자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히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살인혈객이 검을 앞으로 내민 채 빠르게 다가왔다.

    순간 검봉에서 검강이 발출되었다.

    기둥 모양의 검강은 그야말로 거대한 해일과도 같았다.

    뒤로 물러나 관전하고 있던 혈귀노인이 깜짝 놀랄 정도의 무서운 공격이었다.

    공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살인혈객의 좌수에서 손바닥 모양의 붉은 기류가 발출되었다.

    마치 공간이 툭툭 끊기듯 손바닥 잔영이 겹치면서 빠르게 다가왔다.

    백자안이 좌수를 들어 혈옥수를 쳐냄과 동시에 검으로 원호를 그려 검강을 막았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천마광장의 지반이 쩍쩍 갈라졌다.

    “우웩!”

    살인혈객이 피를 한 사발 정도 토했다.

    내공에서 크게 밀린 탓이었다.

    백자안이 지풍을 날린 것은 그 직후였다.

    살인혈객의 공력이 예상보다 많이 뛰어나 백자안 역시 기혈이 흔들린 상태였다.

    선기를 잡은 상황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흥!”

    살인혈객이 신형을 비틀어 지풍을 피했다. 그 순간 백자안이 무명보를 펼쳐 다가와 살인혈객의 목을 가격했다.

    보법을 펼쳤다고는 하지만 마치 이형환위처럼 순간 이동한 것으로 보였다.

    지풍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살인혈객이 당황했다. 백자안의 주먹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이런!”

    살인혈객이 다급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백자안의 주먹이 그의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주먹에 맞게 되면 목뼈가 부러져 즉사할 것은 자명했다.

    살인혈객이 죽음을 직감하고 탄식했다.

    자신의 무공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억울한 것 같았다.

    ‘교주님. 죄송합니다. 대업을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살인혈객이 혈교주 광세혈신(狂世血神)을 떠올렸다.

    혈마의 아들인 광세혈신이 아버지를 잃고 실의에 잠겨 있을 때 그를 보필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때부터 십 년 간 그림자처럼 광세혈신을 따라다니며 임무를 수행했다.

    혈교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한 지난 십 년이었다.

    이제 십만 혈교 무사까지 완성해 놓은 터라 비상할 일만 남았다. 한데 여기서 목숨이 다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곳 천마동은 광세혈신이 한번 다녀갔던 곳이었다.

    혈교의 교주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혈비동에서 광세혈신이 천마장보도를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혈비동 안에는 선대 교주들의 무공이 수록된 비급이 있었다. 또한 처음 혈교가 마교에서 독립했을 때의 비급도 있었다.

    그 비급에 수록된 무공들은 당시 마교의 것이었다.

    광세혈신은 그중 한 권을 살피다가 겉표지 안에서 천마장보도와 혈강시 제조술을 발견한 것이었다.

    천마장보도를 통해 천마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면 마교를 흡수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광세혈신은 신공 수련을 일시 중단하고 급히 이곳 천마동으로 왔다.

    물론 그 역시 사전에 천마장보도에 적힌 대로 천마마비류의 해약을 제조해 복용했다.

    하지만 천마의 안배는 단순하지 않았다.

    단순히 천마장보도만으로 자신이 남긴 비급이 있는 천마석실로 들어올 수 없도록 천마시까지 요구한 것이었다.

    천마석실을 열 수 있는 열쇠인 천마시는 마교주 불패마왕이 가지고 있었다.

    광세혈신은 당장 천마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익히고 있던 신공을 완성해 천마석실을 열기로 하고 총단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몇몇 지휘부 고수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혈귀노인이 송계의 계략을 듣고 이번 유인작전을 수립해 광세혈신에게 허락을 구한 것이었다.

    마침 혈강시 제조를 위한 재료를 찾고 있던 그는 천마동의 기관을 이용하기로 하고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보안이 중요해 삼백 무사들만 선발해 가도록 했다. 그리고 그 작전이 성공한 것이었다.

    함께 온 살인혈객은 혹여 혈귀노인이 딴마음을 품을 수도 있어 광세혈신이 특별히 보낸 사람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천마시가 없어 천마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석실 문이 열리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살인혈객이 절망에 잠긴 이유는 또 있었다.

    죽은 혈마의 부인이자 광세혈신의 모친인 혈부인(血婦人) 때문이었다.

    혈부인은 살인혈객이 흠모하던 여인이었다.

    비록 혈마에게 밀려 맺어지지는 못했지만,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혈부인이 십년 전 혈마와 함께 죽으면서 살인혈객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한 것이다.

    당시 이십 세였던 광세혈신은 경험이 적었고 무공도 약했다.

    반면 살인혈객은 패전 후 존망의 갈림길에 있었던 혈교의 희망 중 한 명이었다.

    살인혈객은 혈부인에게 약속을 했고,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

    한데 이렇게 끝나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큰 후회는 없었다.

    광세혈신의 무공은 이제 천하무적에 가깝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공을 완성하면 불패마왕을 죽이고 마교까지 흡수한 후 중원무림을 정복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혈강시 제조 역시 원래는 비장의 한수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사천교의 등장으로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 재원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었다.

    살인혈객은 그렇게 죽음을 직감했다.

    많은 회상을 했지만 실제로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살인혈객의 목 부분에 백자안의 주먹이 닿기 직전.

    금빛이 우러나오는 동굴 안에서 지풍 하나가 날아왔다.

    붉은색의 일지풍.

    마치 붉은 실이 펼쳐진 것처럼 그야말로 순간적이었다.

    백자안이 주먹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난 것은 그 직후였다.

    지풍에 담긴 암경이 너무 강했다.

    끝까지 살인혈객의 목숨을 취하게 되면 방어가 어려울 것을 직감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지풍은 끝까지 따라왔다. 백자안은 검을 내리쳐 이를 막았다.

    쩡.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백자안의 검이 두 동강 났다.

    그와 동시에 동굴 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서른 살 정도의 청년이었다.

    그를 본 살인혈객과 혈귀노인, 송계 등 혈교 무사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교주님!”

    “교주님!”

    “피해가 크군.”

    청년, 즉 혈교주 광세혈신이 백자안의 검에 죽은 혈교 무사 백여 명의 시신을 쳐다봤다.

    하지만 무심한 표정이었다.

    혈귀노인이 물었다.

    “언제 오신 겁니까?”

    “조금 전에 도착했소. 신공을 거의 완성해 한번 더 시험해보려 했었소.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오.”

    광세혈신이 말한 후 백자안을 가리켰다.

    “저자는 누군데 저토록 무공이 고강한 것이오?”

    “영웅무관 사범 무정공자라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혼자서 암기 기관과 독지네 떼를 파괴한 놈입니다.”

    “그것보다 천마마비류를 견뎌낸 게 더욱더 대단하군.”

    광세혈신이 백자안을 향해 말했다.

    “무정공자라고 했소?”

    “그렇소. 무정 사범이라고 부르면 될 것이오. 귀하가 혈교주요?”

    “그렇소. 이전에는 소혈마라고 불렸지만, 이제 교주가 되었소. 지금은 다들 나를 광세혈신이라고 부르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그대의 내공이 정말 대단하나 본인의 적수는 되지 못하오. 인정하시오?”

    “인정하지 않소. 지금 보니 귀하는 본인을 두려워하고 있군. 안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는 않겠지.”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조금 전 겪어본 광세혈신의 무공은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내공 면에서 자신이 그렇게 큰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 말은 광세혈신의 내공 역시 측정 불가할 정도로 높다는 의미였다.

    “하하하. 제법 배짱도 있군. 좋소. 그대의 말이 맞는지 다시 겨뤄보면 되겠군. 그 전에 내기를 합시다. 이긴 사람의 말을 한 가지 따라주기로 하는 것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구미가 당기는구려. 조건을 들어보고 결정하겠소.”

    “하하하. 어리석지는 않구려. 좋소. 나부터 말하겠소. 본인은 대업을 위해 인재를 필요로 하오. 그대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라 무관 소속이라고 하니 특별히 제의하는 것이오. 본 교주에게 패배하면 십 년 간 본인의 수하가 되시오. 그러면 그대에게 부교주 자리를 주겠소.”

    “교주님!”

    혈귀노인이 놀라며 소리쳤다.

    혈교 부교주 자리가 공석이긴 하나 태상장로인 자신보다 높은 지위였다.

    일개 무관 사범에게 그 자리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태상장로는 반대하는 것이오?”

    “그게 아니라 부교주 자리는 교주님을 제외하고 본교에서 가장 높은 직책입니다. 저는 저자가 그 정도로 무공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말뜻은?”

    “제가 먼저 저자와 겨뤄보겠습니다. 제가 이기면 부교주 자리를 제게 주십시오.”

    “하하하. 태장장로 그대의 명예욕은 나이가 들어도 대단하군. 좋소. 솔직해서 마음에 드오. 하지만 저자는 그대의 적수가 아니오. 아직 실전무공 수준이 낮아서 그렇지 내공 면에서는 독보적이오.”

    “천년혈수(千年血水)를 모두 마셔 최고의 내공을 지니신 교주님보다 뛰어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물론 큰 차이는 아니라 상승무공을 익힌 나의 적수는 되지 못하오.”

    “그렇다면 나중에 부교주가 되더라도 교주님을 배신할 겁니다.”

    “하하하. 내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겠소? 내게 절대복종하는 수하가 된다는 것은 혈뇌단(血腦丹)을 복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오.”

    혈뇌단이란 말에 혈귀노인, 송계 등 혈교무사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혈뇌단은 고독의 일종으로 해약이 따로 없었다.

    특히 만독불침의 몸을 가진 자도 중독을 시킬 수 있는 혈교 최고의 독약 중 하나였다.

    전대 교주였던 혈마는 이 혈뇌단을 이용해 수하들을 관리해왔었다.

    물론 반역의 기미가 있어 보이는 자들에게만 먹였다. 그들 대부분은 전쟁 중 혈교에 투항한 자들이었다.

    “모두 들었소? 내 수하가 되면 혈뇌단을 복용해야 하오. 하지만 십 년 후 그대가 본교를 떠나고 싶어 하면 혈뇌단을 제거해주겠소. 이것은 내가 사내로서 약속하는 것이니 믿어도 될 것이오. 어떻게 하겠소? 내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좋소. 이제 나의 조건을 말하겠소.”

    “후후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소. 천마마비류에 당한 삼만 군웅을 회복시킬 해약을 달라는 것이겠지?”

    “그렇소. 그와 더불어 그대들 역시 화산을 떠나야 하오. 원래는 그대들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으나 해약을 얻기 어려울 것 같아 참는 것이오. 다만 이번 한 번 뿐이오. 만약 화산을 떠나지 않고 다시 음모를 꾸민다면 모두 본인 손에 죽게 될 것이오.”

    “하하하. 병장기도 못 지킨 친구가 허풍이 심하군. 어쩌면 생각보다 약할 수도 있겠군. 좋소. 태상장로 그대에게 기회를 주겠소. 저자를 제압하면 부교주 자리를 주겠소.”

    “감사합니다.”

    혈귀노인이 고개를 숙이며 기뻐했다.

    옆에 있던 송계가 말했다.

    “저자는 조금 전 교주님의 지풍을 막느라 내상을 입었을 겁니다. 제가 먼저 시험해보겠습니다.”

    “송 부군사 그대가?”

    혈귀노인은 물론이고 광세혈신 또한 가볍게 놀랐다.

    하지만 송계는 진지했다.

    송계가 광세혈신을 향해 말했다.

    “교주님. 제가 저놈을 죽이면 저를 총군사 자리에 임명해주십시오.”

    “본교 총군사 자리에는 혈군자(血君子)가 엄연히 있는데, 어찌 너를 임명하겠느냐?”

    “공동 총군사 자리를 원하는 겁니다.”

    “당돌하군. 정말 자신이 있느냐?”

    “네.”

    “좋다. 한번 시험해 보아라.”

    “감사합니다.”

    송계가 매우 기뻐하며 품속에서 비수 하나를 꺼냈다.

    그 비수는 그가 우연히 습득한 것으로 절명비수(絶命匕首)란 것이었다.

    한 번 사용하면 삼 년간은 다시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력이 뛰어났다.

    머리가 비상한 송계는 이 절명비수로 백자안을 죽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사실 백자안의 안색은 처음보다 창백해져 있었다.

    송계의 예상대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광세혈신이 날린 혈마지(血魔指)는 보통 무공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 연마하고 있는 삼대신공 중 하나였다.

    대성하게 되면 무형검에 거의 근접하는 위력이 있었다.

    만약 광세혈신이 혈마지를 대성했다면 검을 부러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부까지 꿰뚫었을 가능성이 컸다.

    “호오. 절명비수라면 나도 위험한데······ 좋다. 어서 공격해 보아라. 그 정도에 죽을 놈이라면 나와 겨룰 가치조차 없지.”

    “존명.”

    송계가 절명비수를 들고 천천히 백자안을 향해 다가갔다.

    < [제19장] 혈교 2 > 끝

    ⓒ 행호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