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장] 지존장보도 3 >
스팟.
백자안의 검이 빠르게 원호를 그리며 독지네를 두 동강 냈다.
툭.
마지막 남은 독지네였다.
독지네 수천 마리를 거의 혼자서 죽인 그였다.
그의 몸에는 독지네가 뿜어낸 초록색 피가 묻어있었다. 하지만 삼매진화를 일으켜 모두 태워버렸다.
원래는 독지네의 피 또한 독이 묻어 있어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백자안의 몸은 만독불침이었다.
무저곡에서 나오면서 흡수한 독 기운을 끝내 내공으로 변환한 결과였다.
다른 지휘부 고수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독지네의 공격을 받은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병장기로 독지네를 공격했으나 놀랍게도 놈들은 도검불침이었다.
급기야 독지네에게 물려 즉사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나마 몇 마리라도 제거한 사람은 만박서생과 매화검선, 그리고 장대선생이 유일했다.
그렇게 수십 명이 다시 사망해 누적 사망자가 백여 명이 되었다.
그때 백자안이 나섰다.
그는 십여 마리씩 계속 제거를 하고 있었으나, 독지네의 수가 너무 많아 지휘부 고수들의 몰살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백자안이 선택한 것은 화공이었다.
도검불침인 독지네의 몸뚱이는 보통 불에는 끄떡도 없었다. 백자안의 내공으로 만들어진 삼매진화에는 취약했다.
백자안이 독지네를 상대하며 시범적으로 몇 마리를 태우는 데 성공하자, 대대적으로 내공화(內攻火)를 일으킨 것이었다.
내공화는 말 그대로 내공으로 일으키는 불이었다. 비교적 작은 불꽃을 내는 삼매진화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었다.
가히 절대 내공을 가진 사람이라야 만들 수 있는 특수 화염이었다.
백자안은 지휘부 고수들을 자신의 뒤로 물러나게 한 후 내공화를 일으켜 독지네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화르르.
내공화의 불길은 그와 독지네 사이에 불의 장벽을 만들었다.
불길을 유도해 독지네를 한 곳으로 모으는 데 성공한 그는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렇게 마침내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조금 전 검으로 두 동강 낸 독지네는 놈들의 우두머리로 용케 내공화를 뚫고 나온 것이었다.
백자안은 놈을 두 동강 냄으로써 독지네 제거에 완전히 성공한 셈이었다.
“무정 사범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만박서생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남은 지휘부 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독지네에 물린 사람은 어김없이 사망했기에, 생존자는 그들 이백여 명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매화검선의 물음에 만박서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피해가 너무 큽니다. 또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철수하는 게 좋겠습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도록 하지요.”
장대선생의 말이었다.
백자안 덕분에 독지네가 몰살당하자 다시 지존검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 같았다.
백자안이 말했다.
“지존검은 이곳에 없습니다. 지존검 때문이라면 그냥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머뭇거리면 다시 새로운 공격이 시작될 가능성이 큽니다.”
백자안이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광장 벽을 가리켰다.
파괴된 부분이 많지만, 여전히 수많은 구멍이 있었다.
구멍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 안에서 암기와 독지네들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무정 사범의 말씀이 옳소. 일단 철수합시다. 장대선생께서도 양해해주시오.”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저 혼자라도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함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저 안에 지존검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와서 포기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총군사님이라 해도 이런 문제로 철수를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장대선생이 신형을 날려 벽면에 나 있는 구멍 중 가장 큰 구멍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떻게 보면 용기 있는 행동이었으나, 위험천만한 일임은 틀림없었다.
문제는 남은 사람들의 동요였다.
장대선생의 비명이 들리지 않자, 하나둘 따라서 구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존검은 내 것이다!”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다!”
눈 깜박할 사이에 백여 명의 지휘부 고수들이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만박서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명을 철회하지 않았다.
“우리라도 밖으로 다시 나갑시다. 남을 사람은 남도록 하시오.”
만박서생이 매화검선과 함께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남은 백여 명의 고수들은 망설이다가 그들을 따라갔다.
백자안과 김지혜 역시 의견을 교환 후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한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동굴 입구 쪽으로 얼마 가지 않았을 때였다.
엄청난 함성과 함께 군웅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런!”
만박서생이 매우 놀랐다.
동굴 밖에 있던 삼만 군웅들이 거세게 안으로 진입하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 기세가 너무 강해 백여 명의 지휘부 고수들은 다시 지하광장 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있다가 군웅들에게 밟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마 후 우려대로 삼만 군웅들이 빠른 속도로 지하광장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루를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소?”
만박서생이 호통을 쳤다.
삼만 군웅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루가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어 약속대로 들어온 것뿐입니다. 예상대로 피해가 막심하군요.”
말을 한 사내가 광장 바닥에 있는 백여 구의 시신을 가리켰다.
만박서생과 매화검선 등 백여 명의 지휘부 고수들이 안색을 굳혔다.
독지네와의 싸움이 매우 길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한데 정말 하루가 지났던 것이다.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군웅 중 대표자 격인 낭인객(浪人客)의 물음이었다.
“백여 명 정도는 위험을 무릅쓰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소. 저기 구멍을 통해서 말이오. 우리는 이곳에 지존검이 없을뿐더러 이 모든 것이 혈교의 음모라고 생각해 다시 나가려던 중이었소. 독지네 사체들을 보고 알 수 있겠지만, 이곳의 함정은 매우 무섭소. 일찌감치 밖으로 나가는 것이 상책이오.”
“나가고 말고는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우리 무림인들이 안전한 길만 선택했습니까? 지존검이 이곳에 없다고 하셨는데 증거라도 있습니까?”
“증거는 없소. 하지만 살인 기관은 확인되었으니 속히 철수해야만 하오.”
만박서생이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군웅의 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수장을 잃은 문파의 무사들은 그 복수를 다짐하며 철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박서생과 매화검선 등 지휘부 고수들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 광장과 연결된 통로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
“이런!”
군웅들이 다급성을 터뜨렸다.
지존검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퇴로가 막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갈 길이 막힌다면 지존검을 얻어도 여기 갇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통로는 완전히 무너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만박서생이 난감해했다.
삼만이나 되는 대인원이 들어오면서 폐쇄 기관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사실 군웅들이 들어오면서 동굴 벽을 장력으로 무차별 공격하긴 했다.
혹시 암기 공격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아 선제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무정 사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만박서생의 물음에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좀 더 들어가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반대편에 통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동감이오. 어쩔 수가 없구려.”
만박서생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말했다.
“모두에게 알리겠소. 출구가 막혀 부득이 좀 더 안쪽으로 진입하겠소. 하지만 보다시피 광장 벽에 나 있는 새 통로는 매우 좁소. 물론 다른 동굴보다는 넓지만 한 번에 열 명 정도 들어가는 것도 벅찰 것 같소. 우리 지휘부 고수들이 앞장설 것이니 그렇게 알고 차례대로 진입하시오.”
“그 말씀은 지휘부에서 지존검을 독차지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지금 보니까 다른 구멍을 통해서도 충분히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네요. 구멍 역시 수천 개이니 각기 알아서 들어가다 보면 나중에 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낭인객이 신형을 날려 작은 구멍 한 곳으로 들어갔다.
역시 어떤 비명도 들리지 않자, 군웅들이 일제히 구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구려. 우리도 갑시다.”
만박서생과 매화검선을 비롯한 백여 지휘부 고수들 또한 구멍 속으로 몸을 날렸다.
물론 그들이 들어간 구멍은 가장 큰 것으로, 구멍이라기보다 새 통로라 할 수 있었다.
백자안과 김지혜 역시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군웅들이 모두 구멍을 통해 사라진 순간 굉음과 함께 지하 광장 전체가 무너져 버렸다.
콰르르릉.
입구가 막힌 것도 모자라 아예 광장 자체가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백자안이 뒤를 돌아보며 탄식했다.
“완전히 퇴로가 닫힌 것 같군요.”
“네. 어쩔 수가 없네요. 운명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요.”
김지혜가 안색을 굳혔다.
동굴 속 기관진식이 예상보다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출구까지 막힌 터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형국이었다.
군웅들 역시 지하광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불안해했으나 이미 기호지세였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휙휙휙.
그렇게 얼마나 더 들어갔을까.
구멍 안의 길은 점점 넓어졌다. 다행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통로가 끝이 없을 정도로 길었다.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 이해될 정도였다.
맨 마지막에서 배후 공격을 감시하며 군웅들을 뒤따랐던 백자안과 김지혜 역시 안정을 찾아갔다.
사실 앞서 있었던 독지네 공격은 백자안이 아니었다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정말 더는 살인 기관이 없는 건가요?”
“안심 놓을 때는 아닙니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군웅들 모두 한곳에 모여 있을 겁니다. 통로는 끝이 있기 마련이고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속도를 더 높이죠.”
휙휙
두 사람이 경공 속도를 높였다.
얼마 후 또 다른 지하광장 하나가 드러났다.
백자안의 예상대로 그곳에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다.
삼만 군웅들과 장대선생, 만박서생, 매화검선 등 이백여 지휘부 고수들이 모두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모두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모든 사람이 혈도를 찍힌 것처럼 굳어있었다.
백자안은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광장 전체에 떠 있는 붉은 기류 때문이었다.
공기 중에 완전히 퍼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천마마비류(天魔痲?流)!”
백자안이 놀라 소리쳤다.
그랬다.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천마마비류뿐이었다.
천마마비류는 마교의 창시자 천마가 직접 제조한 것으로 공기 중에 살포하면 모든 것을 정지시킬 수 있었다.
몸 전체의 혈도가 마비되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망부석과 다름없었다.
무서운 것은 해약 제조 방법을 천마만이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해약을 어떤 식으로든 복용하지 않게 되면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마교의 전설에 따르면 천마는 자신이 연공하는 장소 주위에 이 천마마비류를 뿌려놓았다고 했다.
급한 보고 때문에 수하들이 실수로 들어오다가 마비가 되면 손수 해약을 복용시켜 풀어주었다. 이런 방식 때문에 살수들의 침입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전해졌다.
백자안이 급히 김지혜를 보았다.
놀란 나머지 신경을 못 썼는데, 지금 보니 그녀 역시 그대로 굳어있었다.
마치 빙공에 당해 그 자세 그대로 얼어버린 것 같았다.
굳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백자안뿐이었다.
백자안은 광장 끝에 붉은 광채가 우러나오는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절대 고요 속에서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제18장] 지존장보도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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