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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53화 (53/250)
  • < [제17장] 약속 3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자안의 내공 주입이 계속된 어느 순간.

    악미미의 부드러운 뺨에 가벼운 홍조가 나타났다.

    “휴우!”

    백자안이 손을 뗐다.

    생사신의가 악미미의 맥을 짚어 본 후 말했다.

    “극히 미약하지만, 맥이 다시 뛰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깨어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지 않지만 당분간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매화검선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 역시 딸의 맥을 짚어보고 다시 뛰는 것을 확인했다.

    “당분간이라 하심은 어느 정도인지?”

    “최소 석 달은 안심해도 될 겁니다. 이 모두가 이분 무정 사범 덕분입니다.”

    “정말 고맙소. 무정 사범.”

    매화검선이 포권하며 정식으로 백자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다른 재주는 없고 귀식대법만 오래도록 연구를 해서 약간의 성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석 달 후에도 깨어나지 못하면 그때 다시 와서 조처를 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더 진기를 주입해도 더 이상의 효과는 없을 듯합니다. 아, 그리고 저는 그다지 무공이 높은 편은 아니니, 그 점에 대해서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사범 모집에서도 꼴찌로 겨우 합격을 했었지요.”

    “하하하. 겸손한 분이구려. 지금 무공이 높고 낮은 게 중요하겠소? 내 딸아이 목숨을 석 달이나 연장해주셨으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소이다.”

    매화검선이 거듭 감사를 표했다.

    아무래도 악미미의 맥을 다시 뛰게 한 것이 주효한 것 같았다.

    매화검선은 화산파 무사들을 시켜 악미미를 원래 그녀의 방에 데려다 놓을 것을 명했다.

    살아있는 것이 확인된 이상 악미미가 관에서 나오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이제 관건은 혈교 발호에 대한 대책이었다.

    이대로 군웅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다는 게 매화검선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형산파 장문인 장대선생(長大先生)이 물었다.

    “혈교 놈들의 근거지를 알아내셨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이미 의심 가는 곳을 발견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확실한 곳은 아직 없습니다. 지금도 계속 수색 중이지요. 내부적으로 놈들이 우리 화산파를 점령해 본거지로 삼으려 한다는 강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근에 놈들의 비밀 거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 중입니다.”

    매화검선의 말에 군웅들이 술렁였다.

    하기야 지금 한 말은 사실이었다.

    악미미가 다시 살아나 희망이 생긴 마당에 일부러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장대선생이 다시 말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만박서생께서 답변해주시지요. 지금부터 총지휘권을 총군사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매화검선이 만박서생을 쳐다봤다.

    매화검선이 화산파를 대표한다면, 만박서생은 무림맹 총군사로서 군웅들 모두를 이끌 수 있었다.

    만박서생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악 장문인과 저는 이번에 격장지계를 펼쳐 혈교 놈들을 유인하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놈들의 거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지난번 악양에서 출몰한 사사천교와 마찬가지로 이번 혈교의 준동도 매우 은밀한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유인을 시도한 것인데, 지금까지는 실패입니다. 하지만 화산 어느 곳에 놈들의 거점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분이 수색에 동참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많은 인원이 수색을 벌인다면 분명 유의미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 영웅분들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옳소.”

    “찬성이오.”

    군웅들이 일제히 찬성하자 만박서생이 고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총수색은 내일 아침 일찍 시작될 겁니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쉬시길 바랍니다. 다만 내일 총수색을 해야 하니 과음은 피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와아아.

    짝짝짝.

    단 하루지만 실컷 먹고 쉬라는 말에 군웅들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그럼 효율적인 수색을 위해 편제를 짜야 하니 각파의 지휘부 고수 분들께서는 모두 작전회의에 참가해 주십시오.”

    만박서생이 말을 한 후 매화검선과 함께 장문인 처소인 매화각(梅花閣)으로 향했다.

    귀빈석에 있던 각파 지휘부 고수들과 일반석에 있던 대표단 고수들이 뒤따랐다.

    백자안과 김지혜 역시 뒤따랐다.

    그렇게 매화각 대청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삼백여 명이었다.

    그 시각 군웅들은 음식과 술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는 전형적인 영웅대회의 모습이었다.

    어차피 군웅들은 상부에서 결정된 대로 따라오는 경향이 커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 없이 총수색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이렇게 작전회의를 열게 된 것이었다.

    만박서생이 대청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사실 아까는 군웅 중에 혈교의 간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커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오늘 밤 놈들이 공격을 가해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혈교 놈들이 기습을 가해올 것이라는 겁니까?”

    장대선생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만박서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놈들의 목표는 우리 무림맹 전력을 약화하는 겁니다. 삼만 군웅이 모여 있는 지금이 놈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겠지요. 제가 혈교 측 지휘부 사람이라면 이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네. 지금 이곳 화산파 총단 주위에 무림맹 정예무사 삼천을 매복시켜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천 명의 무사만 데리고 온 줄 알지만, 사실은 사천 명을 데리고 왔지요. 그중 천명은 지금 대연무장에 군웅들과 함께 있고, 나머지 삼천 명을 매복시켜 비상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화산파 자체에서도 준비하고 있지요?”

    “네. 놈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게 되면 총단 전체에 설치한 기관들이 작동하게 될 겁니다. 놈들은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몰살될 겁니다.”

    “놈들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공격을 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때는 부득이 총수색을 해야겠지요. 삼만 군웅들이 화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면 분명 성과가 있을 겁니다. 물론 총수색을 했음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그때는 또 다른 계획이 있습니다.”

    “무슨 계획입니까?”

    “외곽 방어선을 구축해 아예 우리 화산파 권역에 발을 내딛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놈들이 본파를 노리고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맹에서도 천 명의 무사를 상주시켜 줄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매화검선이 말을 한 후 만박서생을 쳐다봤다.

    만박서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 장문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맹주님께서는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으십니다. 화산파에 상주할 병력은 지금 대연무장에 있는 일천 무사들입니다. 그들은 일당백의 정예무사들로 설사 군웅들이 해산한 이후 적이 공격 해와도 며칠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화산파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고, 그동안 우리는 또 다른 지원 무사들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만박서생의 말에 각파 지휘부 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막연한 것이 아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 같았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혈교 놈들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노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군웅들이 모이는 것을 처음부터 노리고 특별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 또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므로 무작정 총공격을 가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백자안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매화검선이 물었다.

    “무정 사범께서는 어떤 고견을 갖고 계시오?”

    “저 말입니까?”

    백자안이 조금 당황했다.

    비록 악미미를 치료해주긴 했으나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물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무관 대표들은 작전회의에서 머릿수만 채웠지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백자안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제 생각에 혈교 놈들이 화산파를 노린 것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것은 본파 전대 장문인이자 본인의 사부님께서 혈마의 죽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오. 당시 사부님께서는 무적세가주와 함께 합공을 가해 혈마를 처단했는데, 놈들이 앙심을 품고 본파를 공격하려는 것이외다.”

    “그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데 무적세가에서는 무사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원래는 무사들을 보내주려 했는데 사정이 생겨······.”

    매화검선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한 곳이 무적세가였다.

    무적세가주가 혈마를 죽인 장본인이라 화산파와 한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산파 고수들이 암습을 받고 죽어 나갈 때 일찌감치 도움을 요청했었다.

    무적세가주는 흔쾌히 수락했다.

    무적세가 무사들을 주축으로 한 정의련 무사 일만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한데 조건이 있었다.

    악미미와 백자안 두 사람의 파혼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해달라는 요구였다.

    매화검선이 고민을 하다가 낙양에 있던 악미미를 급히 부른 이유이기도 했다.

    악미미를 만난 매화검선은 그녀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을 구했다.

    악미미는 단번에 거절했다.

    자신이 먼저 백자안과의 혼약을 파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매화검선에게도 파혼 선언을 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매화검선 역시 백자안의 명성이 높아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독고준이 백자안에게 패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렇다고 무적세가와의 혼담을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무적세가 쪽에 완곡한 거절 의사를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은 당장은 파혼이 어려우니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무적세가주 독고승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원무사들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악미미가 암습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무적세가 측에서는 총관이 대표로 조문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역시 지원무사들은 파견하지 않았다.

    마침 작전회의에 참석 중이던 무적세가 총관 무적선생(無敵先生)이 말했다.

    “우리 무적세가 역시 혈교의 공격 위험에 처해 있어 이번에 무사들을 파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다시 보고하면 반드시 가주께서 보내주실 겁니다. 아니 정의련주로서 정의련 무사 일만을 원래 계획대로 파견하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으음······.”

    매화검선이 안색을 굳혔다.

    ‘미미가 다시 살아날 것 같으니 혼사를 재추진하려는 것 같구나. 독고 공자가 미미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니, 그럴 가능성이 높겠군. 하기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백자안 그 녀석보다 독고 공자가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내가 잠시 판단을 잘못했구나. 독고 공자가 부친의 무공을 완전히 전수하게 되면 백자안을 충분히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매화검선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발호한 혈교의 힘은 보지 않아도 막강할 겁니다. 무적세가주께서 무사들을 보내주신다면 저 역시 성의를 보일 겁니다. 그렇게 전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을 드리지요.”

    무적선생이 대답한 그때였다.

    대청 문이 열리며 화산파 무사 한 명이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군웅들 사이에 난데없는 소문이 돌고 있어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무슨 소문이냐?”

    “지존장보도(至尊藏寶圖)가 화산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 [제17장] 약속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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