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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52화 (52/250)

< [제17장] 약속 2 >

다음날 정오.

예정대로 화산옥녀 악미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참여 인원은 삼만여 명.

화산파 전 무사들과 무림맹 파견 무사, 그리고 천하 각지에서 모여든 무림인들이 대거 포함된 숫자였다.

물론 단순히 화산옥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온 사람도 많았다.

둥둥.

북소리가 유난히 슬프게 들리는 가운데 매화검선이 단상 앞으로 나왔다.

무남독녀를 잃은 그의 안색은 초췌했다.

하지만 복수심 때문인지 눈빛이 강렬했다.

“화산파 장문인 악소범입니다. 먼저 바쁘신 와중에 제 딸의 장례식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미리 공포한 대로 이번 사건은 혈교 놈들의 짓입니다. 놈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제 딸아이만이 아닙니다. 본파의 장로급 고수 열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본파는 무림동도들의 도움을 받아 혈교를 공격하려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와아아.

“옳소!”

“놈들을 칩시다!”

군웅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애당초 악미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바로 영웅대회 성격을 띠게 된 것이었다.

“장문인. 먼저 악 소저의 시신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생사신의께서 오셨으니 한번 보여드리십시오.”

“네. 총군사님. 안 그래도 미미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매화검선이 무림맹 총군사 만박서생에게 공손히 말했다.

얼마 후 관 하나가 장례식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연무장으로 옮겨졌다.

군웅들이 급히 자리를 비켜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면서 관 속에 잠자듯 누워있는 악미미의 시신을 봤다.

소문대로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육신이었다.

그냥 잠들어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도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에게 다들 연민을 느낀 것 같았다.

그들 중에는 백자안과 김지혜도 있었다.

어제 화산파 총단에 들어온 두 사람은 위지경덕의 조의서신을 총관을 통해 매화검선에게 전달했다.

조문단이 너무 많아 매화검선을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객방 두 개를 배정받은 두 사람은 날이 밝자 대연무장에 나와 장례식이 진행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있던 장소 역시 귀빈석이 아니라 일반석이었다.

다만 영웅무관의 대표 자격을 인정받아 다른 일반석보다 단상에 가까웠다.

백자안이 악미미의 시신을 보고 안색을 굳혔다.

직접 손으로 만져보지 않았지만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기야 매화검선을 비롯해 고수들이 즐비한 화산파에서 악미미의 죽음 여부를 확인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있는 점이 의아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생사신의의 확인을 받아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대로 땅에 묻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미모였다.

김지혜가 탄식했다.

“같은 여자인 제가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운 미인이네요. 정말 안타까워요. 백자안 대협은 왜 아직 안 왔을까요?”

김지혜는 아까부터 귀빈석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백자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숨기고 이미 참석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이제 과연 생사신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하군요.”

김지혜가 단상 위에 놓인 관에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 한 노인을 쳐다봤다.

바로 생사신의였다.

그는 일단 악미미의 상처부터 확인했다.

어깨 부위에 일장을 맞았는데 그곳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생사신의가 붕대를 풀었다.

손바닥 모양의 장인을 확인한 그가 말했다.

“혈옥수가 확실하군요. 혈옥수는 혈교의 장로급 고수들이 익힌 무공 중 하나로 십 년 전에도 같은 상처로 돌아가신 분이 많았지요. 그때 제가 치료한 경험이 많아 확실합니다.”

“신의님. 제 딸아이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화검선의 물음에 생사신의가 말없이 악미미를 진맥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라 맥이 잡힐 리가 없었다.

“혹시 살아 있는 겁니까?”

매화검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사실 그는 복수보다 딸의 목숨이 먼저였다.

악미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그가 수립한 복수 계획은 상당히 불확실했다.

공공연히 혈교의 본거지를 이미 파악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은 사실 격장지계였다.

연이은 암습이 혈교의 소행이란 것만 확인했을 뿐 놈들의 본거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영웅대회를 열어 혈교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려는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뭐니 뭐니 해도 화산파의 안전 확보였다.

연이은 암습은 분명 혈교의 화산파 총공격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군웅들의 힘을 빌려 세를 과시함으로써 공격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두 번째는 역설적으로 혈교의 공격을 유인하려는 의도였다.

놈들의 본거지를 파악했다는 정보를 흘려 혈교가 공격을 감행하기를 기다리는 작전이었다.

이는 만박서생과도 합의가 된 것으로, 실제 그런 분위기로 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계획에도 불구하고 놈들의 반응이 없다면 영웅대회를 통해 새로운 토벌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악미미의 생명이었다.

그녀의 죽음을 목도한 매화검선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긴 상태였다.

피눈물이 날 정도였다.

한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자 혹시나 하며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생사신의가 진맥을 마친 후 말했다.

“악 소저의 상태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반사반생(半死半生)의 상태라 할 수 있군요.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니 매장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아!”

“오!”

탄성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매화검선이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제 딸아이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추측건대 악 소저가 숨이 끊어지기 전 일종의 귀식대법을 펼친 것 같습니다. 악 소저가 연마한 무공이 옥녀심공이라고 했습니까?”

“네.”

“아마도 최후의 수단으로 옥녀심공을 펼쳐 혈옥수의 혈옥진기(血玉眞氣)가 심장에 파고드는 것을 막으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옥녀진기가 모자랐고 부득이 귀식대법을 펼쳐 스스로 숨을 정지시켜 둔 것이지요. 귀식대법은 다들 아시다시피 임시적인 방편으로 지속하기 어려운 무공입니다. 게다가 악 소저는 지금 무의식 상태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아, 그럼 지금이라도 외부에서 혈옥진기를 빼내면 어떻겠습니까?”

매화검선이 당장에라도 자하신공을 일으키려 했다.

생사신의가 급히 손을 저었다.

“절대로 안 될 말씀입니다. 지금 악 소저의 몸속에는 옥녀진기와 혈옥진기가 대립하고 있어서 외부진기가 들어오면 주화입마되어 즉사할 겁니다. 유일한 방법은 옥녀진기를 외부에서 보충해주는 겁니다. 옥녀심공을 연마한 분이 또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결 또한 제 딸아이만 알고 있지요.”

“아! 애석하군요. 귀식대법이 풀리면 혈옥진기가 진짜로 심장에 침투하게 되고 곧바로 사망하게 될 겁니다. 그때부터 시신도 부패하게 되겠지요. 혹시 악 소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없었습니까?”

“있긴 있었지만, 사적인 문제라······.”

“사적인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말씀해보십시오.”

“네.”

매화검선이 악미미가 숨을 거둘 때 남긴 유언을 말해줬다.

바로 백자안과의 약속에 관한 것이었다.

“으음, 약속이라······ 어쩌면 그 약속과 악 소저가 살아날 방법이 관련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약속이란 것이 옥녀진기 보충과 관련이 있다면 말입니다. 다만 지금 상태로는 사흘을 버티기 힘들 수 있습니다.”

군웅들이 술렁였다.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백자안이었다.

생사신의의 말을 듣고 그 또한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옥비녀가 단순한 장신구였다면 내게 굳이 찾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명 옥녀심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백자안이 자책과 동시에 희망을 떠올렸다.

귀면탈 소녀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옥비녀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악미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귀면탈 소녀의 행방을 모른다는 점도 문제였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역용을 해서 귀면탈 소녀가 자신을 찾아올 가능성도 적었다.

풍운장원에 있는 가족들을 통해 연락을 취해올 가능성이 있지만, 그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정 안되면 내가 직접 마교로 찾아갈 수밖에 없겠구나. 그때까지 시간을 벌려면 나의 내공을 악 소저 몸속에 넣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치유력이 있는 내공이니까 깨어나게는 못해도 상당 기간 버틸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백자안이 결심을 굳히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옆에 있던 김지혜도 깜짝 놀랐을 만큼 돌발행동이었다.

“귀하는?”

매화검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자안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올라와 단상 옆에 있던 화산파 경계 무사들도 저지할 생각을 못 했다.

“저는 영웅무관 사범 무정공자라고 합니다. 제가 귀식대법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올라왔습니다. 악 소저를 깨어나게는 못해도 최소 몇 달 정도 더 버티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동안 백자안 대협을 만나 방법을 마련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매화검선이 기뻐하기보다 불신의 표정을 지었다.

화산파 총관 매화선생(梅花先生)이 다가와 백자안의 신분을 확인해주었다.

“영웅무관주의 조의서신을 가져온 사범 중 한 명이 맞습니다.”

“저도 있어요.”

김지혜까지 단상에 올라왔다.

백자안의 신분을 확인해주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지난 사범대회 때 백자안을 봤던 사람들이 증언해주었다.

매화검선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자칫 손을 잘못 댔다가 생사신의 말대로 큰일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어떤 식으로 악 소저를 더 버티게 할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저의 진기를 넣어주려 합니다. 귀식대법을 강화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신의께서 먼저 확인해주시겠습니까?”

백자안이 천천히 다가가 생사신의의 팔을 잡았다.

천천히 손을 뻗었고, 생사신의 역시 피하지 않았다.

백자안이 빠르게 무명진기를 일부 넣어주자, 생사신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자안이 손을 놓자, 생사신의가 껄껄 웃었다.

“천하는 넓고 고수는 많구려. 귀하의 진기는 천하제일이니 어찌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겠소. 무엇보다 다른 진기와 달리 포용력이 있으니 득이 되면 되었지 절대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부탁하오.”

생사신의가 악미미가 누워있는 관을 가리켰다.

이렇게 되자 매화검선 역시 더는 거절 할 수 없었다.

“무정공자라고 하셨소? 내 딸아이를 부탁드리오.”

“네. 무정 사범이라고 부르시면 될 겁니다. 그럼.”

백자안이 악미미에게 다가가 그녀의 맥문을 잡고 무명진기를 넣어주기 시작했다.

< [제17장] 약속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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