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장] 무자천서 2 >
“네 번째 시합은 무정공자와 죽엽객(竹葉客) 두 사람 간의 대결이오. 어서 비무대 위로 오르시오.”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백자안과 죽엽객이 비무대 위에 올랐다.
결선 네 번째 시합으로 이미 세 명의 승자가 나온 상황.
물론 그 승자 중에는 김지혜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일초에 승리를 거둔 그녀는 합격자석에 앉아 있었다.
백자안을 유심하게 보고 있는 것이 아마도 그의 무공을 정확하게 평가해보고자 하는 의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진표에 의해 백자안이 올라오면 그녀와 준결승을 치러야 했다.
‘하필이면······.’
김지혜가 안색을 굳혔다.
경공 시합 등을 통해 그녀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백자안뿐이란 것을 간파한 상황.
그래서 내심 결승전에서 맞붙어 자신이 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준결승에서 붙을 수밖에 없었다.
동방 무림의 명예도 달려있기 때문에 최소 결승 진출은 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무조건 결승에 진출해야 해. 무정공자 저 사람도 약점이 있을 것이다.’
김지혜가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결승에 진출하기만 해도 사범 자리는 확보되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은 당연했다.
만약 결승전에 오르지 못하면 남은 한 자리를 놓고 3, 4 위전을 벌여야 했다.
그 역시 자신은 있었다. 다만 태극문의 명예를 생각하면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백자안은 무심히 서서 죽엽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엽객은 삼십 대 중반 정도의 사내로 낭인 출신이었다.
병장기 사용이 금지된 시합이라 그 역시 적수공권이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굳이 두각을 나타낼 필요가 없다. 백합 정도 싸우다가 겨우 이기는 것으로 보이는 게 좋겠군.’
백자안이 우수를 수평으로 들었다.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면 질투와 시기가 따른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그였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실력을 숨길 생각이었다.
둥둥둥.
“시작하시오!”
영웅객이 소리치자, 백자안이 먼저 선공을 가했다.
빠르게 다가가 오른 주먹으로 죽엽객의 어깨를 후려친 것이었다.
“흥!”
죽엽객이 코웃음을 치며 신형을 비틀었다. 백자안의 주먹이 빗나갔다. 죽엽객이 그 틈을 노려 몸을 회전하며 오른발을 높이 들어 백자안의 목을 가격했다.
쐐애액.
“무영각(無影脚)!”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영각은 소림파 절기 중 하나로 강호에 제법 알려진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연마가 매우 까다로웠다.
죽엽객은 사실 소림사 출신이었으나 여자 문제로 파계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한 사정을 사람들이 알 리 없었다. 게다가 소림파 무공 중 상당수는 세속 무공으로 보편화하여 타파 사람들이 익히는 경우도 제법 되었다.
죽엽객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백자안의 목을 가격할 찰나.
백자안이 몸을 뒤로 빼며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다.
그 뒤는 두 사람의 치열한 박투가 전개되었다.
파파파팍.
공격과 수비가 연달아 이어지며 타격음이 일었다.
주먹을 날리면 주먹으로 막고, 발로 차면 발로 막았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백여 합을 서로 교환했을 때.
백자안이 머리를 아래로 숙여 박치기를 시도했다.
죽엽객이 급히 피하려 했으나, 이전과는 달리 백자안의 공격 속도가 두 배 이상 빨라졌다.
퍽.
결국 머리를 강타당한 죽엽객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아직 정신이 있는지 쌍장을 날렸다.
쏴아아.
백자안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장세를 피했다. 그런 후 착지 과정에서 두발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가 오른 주먹으로 턱을 가격했다.
퍽.
죽엽객이 다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백자안의 타격력이 약했는지 아직 비무대 끝까지는 가지 않았다.
백자안이 일장을 날린 것을 바로 그때였다.
쏴아아.
죽엽객이 급히 두 손을 올려 막았으나, 더 버티지 못하고 비무대 밑으로 떨어졌다.
죽엽객이 벌떡 일어났으나 이미 승부는 결정된 후였다.
“무정공자 승리!”
와아아.
짝짝짝.
백자안이 미소와 함께 포권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김지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백자안이 고전했기 때문이었다.
죽엽객의 무공이 뛰어났기도 했지만, 백자안의 움직임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해볼 만하겠네. 실력을 일부 숨긴 것은 맞지만 빈틈이 제법 있었다.’
김지혜가 분석을 마치고 눈을 빛냈다.
다음 시합은 첫 번째 준결승전이었다.
가장 먼저 결승에 오른 사람은 철혈객(鐵血客)이란 자로, 별호와 달리 생김새는 매우 순박했다.
이렇다 할 사문은 없고 천애고아로 산속에서 나무꾼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동굴에서 기연을 만나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었다.
그가 발견한 비급은 철혈비급이란 것으로, 기초가 부족한 때문에 아직 일성 정도밖에 연마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앞으로가 기대되는 청년이었다.
나이는 스물셋으로 백자안과 동갑이었다.
그의 내공 또한 기연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철혈비급과 함께 발견한 구렁이 내단을 복용한 덕분에 내공이 일갑자를 훌쩍 넘었다.
다만 이 역시 아직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상태로 시간이 지나면 내공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컸다.
‘철혈객 저 친구가 또 다른 동기 사범이 되겠군. 인상이 좋다. 예의도 바르고.’
백자안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지혜도 그렇지만 철혈객 역시 마음에 든 것이다.
“두 번째 준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김지혜 소저와 무정공자 두 분은 어서 비무대 위로 오르시오.”
영웅객의 말에 김지혜와 백자안이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백자안은 일부러 져줄 생각이었지만, 절대 표가 나지 않아야 했다.
“시작하시오!”
영웅객의 목소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선공을 가한 사람은 백자안이었다.
권법을 펼치며 빠르게 공격을 가했다.
아까 죽엽객과 싸울 때 보다 전체적으로 두 배 빠른 속도였다.
김지혜가 여유 있게 피했다.
그러다가 백자안이 좀 더 빨리 손을 놀려 김지혜의 소매 한 자락을 찢어버렸다.
“흥!”
김지혜가 코웃음을 치며 오른 주먹으로 백자안의 어깨를 가격했다.
바로 태극권(太極拳)이었다.
백자안이 급히 신형을 비틀었으나, 김지혜의 주먹이 공간을 접고 다가와 어깨를 강타했다.
“으윽!”
백자안이 비무대 밑으로 떨어졌다.
“김지혜 승리!”
와아아.
짝짝짝.
엄청난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일방적으로 김지혜를 응원하던 군중들이 자기 일 인양 기뻐했다.
백자안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일어났다.
겉보기에는 내상이 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백자안은 멀쩡했다.
‘일부러 져주기도 어렵군. 김 소저의 무공이 생각보다 뛰어나긴 하나, 아직 멀었다. 독고준 그자보다 약하다. 그래도 당대 여협 중에서는 단연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군. 역시 동방 무림은 뛰어나군.’
백자안이 비무대 옆에 가부좌하고 앉아 회복운공을 하는 척했다.
김지혜는 합격자석으로 돌아가 백자안을 쳐다봤다.
‘내상을 입을 정도로 강하게 공격하지는 않았는데, 엄살이 심하군. 한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남은 시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먼저 3, 4 위전이 있었다.
그 결과 백자안이 역시 수백 합을 겨룬 후 가까스로 승리해 최종 3위로 사범 자격을 획득했다.
결승전은 의외로 간단히 끝났다.
김지혜가 단 일초로 철혈객을 누른 것이었다.
철혈객의 경험이 부족한 탓이었다.
와아아.
짝짝짝.
군중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와 함께 김지혜, 철혈객, 백자안 세 사람에 대한 사범 임명장이 수여 되었다.
위지경덕이 말했다.
“오늘부터 이 세 사람을 우리 영웅무관의 공식 사범으로 임명할 것을 천명합니다. 사범 자격은 종신이며, 본인이 원할 때까지 사범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각자 사문 등의 일로 시간을 내기 힘든 경우에는 언제든 휴가를 갈 수 있으며, 그 휴가 기간 또한 제한이 없음을 알립니다. 참고로 우리 영웅무관은 무림맹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필요할 때 무사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범들이 파견되어 공을 세운 경우 또한 무수히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무림 정의를 위해 적극 협조할 것을 다짐합니다.”
와아아.
짝짝짝.
무림맹과 무관의 협력.
이는 당금 무림의 대세였다.
사실 무관을 통해 무림맹에 진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유명 무관 사범들의 무공은 매우 뛰어났다.
그들의 능력을 무림맹 지휘부에서 활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백자안은 사범 임명장과 함께 사범 신분을 증명하는 영웅사범패를 받아 품속에 넣어두었다.
영웅사범패는 영웅무관 사범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 패로 성내 객잔에서 일정 금액까지 사용할 수 있는 혜택까지 있었다.
그것과 별도로 월봉도 있는데, 매달 은자 삼백 냥이 지급되었다.
물론 임의 휴가를 가게 되면 그 날짜만큼 월봉이 깎이는 구조였다.
무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사범들을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특히 사문을 가지고 있는 사범들은 문파 일에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사범이 서른 명이 넘는 것도 그 이유였다.
항상 대체자가 있기 때문에 사범이 없어 수업이 중단되는 경우는 없었다.
위지경덕이 말했다.
“아, 오늘 또 한 가지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군요. 여기 계신 백리설아 소저께서 이번에 우리 무관에 특별 입관했다는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군중들의 함성과 박수가 다시 쏟아졌다.
백리설아가 단상에 나와 인사를 했다.
“대륙표국 소국주 백리설아입니다. 제가 이번에 영웅무관 관원이 된 것은 다름 아니라 무공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체질상 상승무공을 배우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이 많은 사범님 중에 저에게 맞는 무공을 가르쳐 주실 분이 분명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아낌없는 박수가 나왔다.
백리설아가 칠음절맥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백자안이 준 치유옥 덕분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긴 하나, 그동안 무공 수련은 꿈도 못 꾸었다. 한데 이번에 용기를 내 한번 시도해보려는 것 같았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잘되었군. 설아를 가르쳐줄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공교롭게도 내가 사범이 되는 날 관원으로 들어오다니. 인연이 따로 없군.’
영웅객이 말했다.
“자, 이제 오늘 대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새로 뽑힌 사범들을 제외하고 모두 집으로 잘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사범 모집 대회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위지경덕 주최의 연회였다.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영웅무관 사범들과 그 외 고위 실무자들이었다.
영웅무관에는 은퇴한 사범들을 위한 원로각도 있었기 때문에, 원로사범들까지 참가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
백자안은 풍운장원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었으나, 빠질 수도 없는 자리였다.
‘통성명 정도만 하고 빠져나와야겠군.’
“어서 연회장으로 갑시다.”
“네.”
“네.”
영웅객의 인솔하에 백자안, 김지혜, 철혈객 세 사람은 위지경덕의 처소인 영웅각(英雄閣)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백자안은 철혈객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철혈객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무정공자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지냈으면 합니다.”
“무정공자님. 몸은 괜찮으세요?”
김지혜의 물음에 백자안이 껄껄 웃었다.
“하루 정도 지나면 완쾌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다행이네요. 저는 혹시나 해서······ 죄송해요.”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요. 김 소저께서 이렇게 저를 걱정해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앞으로 동기 사범으로서 두 분과 잘 지냈으면 합니다.”
“동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진 김지혜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철혈객 또한 생각도 못 한 성과를 거둔지라 표정이 밝았다.
백자안이 미소 지었다.
‘이제 관장님께 내 정체를 밝히는 문제만 남았구나. 분위기를 보고 며칠 후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무림맹의 압력이 심하다고 판단되면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번거롭게 하는 사람도 없으니 내 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제16장] 무자천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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