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장] 영웅무관 2 >
“사숙조님을 뵙습니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름이 김지혜(金知慧)라고 했었지? 많이 컸구나.”
“네. 사숙조님.”
“그래 사형께서 이번에 동방무맹의 부맹주가 되셨다고?”
“네. 부맹주께서 대인자문(大忍者門)에서 보낸 살수에 의해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로였던 할아버지께서 그 자리를 맡게 되었어요.”
“으음, 어떻게 그런 일이······ 살수는 잡았느냐?”
“네. 할아버지께서 직접 처단하셨지요. 사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부맹주가 되신 거예요.”
“삼십년 전 사부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사형은 우리 태극문(太極門)을 이어받아 문주가 되셨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중원인이라 이곳 낙양으로 돌아와 선친의 뒤를 이어 영웅무관의 관장 자리를 맡고 있다. 그 뒤로 가끔 동방에 가곤 했으나 사문의 일에 관여하지는 않고 있었지. 한데 지혜 네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냐? 단순히 날 보려고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할아버지께서 저보고 견문을 쌓고 오라고 하셨어요. 중원 무림 영웅들과 친분을 맺으라고도 하셨지요. 대인자문 놈들이 우리 동방 무림을 침공하게 되면 중원무맹에 지원을 요청하실 생각인 것 같았어요.”
“알겠다. 왜국의 무림맹이라 할 수 있는 대인자문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호시탐탐 동방무림을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지. 쳐 죽일 놈들!”
위지경덕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십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서른 살이었으며 태극문주의 둘째 제자였다.
당시 태극문주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그 딸과 연인관계였다.
한데 그 딸이 대인자문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만 것이었다.
비록 전면전은 아니었으나 동방무맹과 대인자문과의 소규모 전투는 그때도 지금처럼 끊이지 않았다.
연인을 잃은 위지경덕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는 그가 이후 사십년 동안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위지경덕이 마음을 다스리며 가만히 김지혜를 쳐다봤다.
올해 십팔 세인 그녀는 동방제일미녀였다.
‘사형이 지혜를 보낸 이유를 대강 알겠구나. 나쁜 의도는 아니지만 미색을 이용해서라도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인 것 같다. 하기야 동방무맹 역시 이전에 여러 번 중원무맹을 도왔으니, 당연히 지원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시기가 좋지 못하다. 사사천교의 본격적 발호가 예상되는 지금 고수들을 파견할 여력이 부족할 것이다.’
위지경덕이 김지혜에게 당금 무림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알고 있어요. 지원 결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상부상조의 전통이 있으니 꼭 성사되리라 믿어요. 안 되면 사숙조님이라도 지원을 해주셔야 해요. 이곳 영웅무관 사범님들을 대동하고 말이에요.”
“하하하. 물론이다. 사형께서 동방무맹의 부맹주가 되셨는데, 내 어찌 지원 출정을 가지 않겠느냐? 아직 전면전이 벌어진 것은 아니니, 그때까지 우리 무관에서 지내면서 경험을 쌓도록 해라. 나 역시 절기를 가르쳐주마.”
“제게요?”
“그렇다. 지금까지 내가 적전제자를 들이지 않았던 것은 태극문 무공이 원래 동방무림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혜 너는 몇 안 되는 태극문 계승자이니 내 어찌 전수를 마다하겠느냐? 그동안 내가 스스로 창안한 무공도 여럿 있으니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숙조님. 한데 오늘 무관에 들어오다가 봤는데 사범 공개 모집을 하나요?”
“그렇다. 오늘 열릴 예정이지. 왜 너도 생각이 있느냐?”
“물론이에요. 저도 뭐 직함이 있어야 중원 영웅들과 사귈 수 있지 않겠어요?”
“하하하. 지금 보니 네가 신랑감을 찾으러 왔구나.”
“호호! 어떻게 아셨어요? 부모님도 제가 중원 영웅에게 시집가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계세요.”
“하하하. 네 아버지는 무공도 모르는 학자인데, 무림인을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 것 같군. 혹시 생각해 둔 중원 영웅이 있느냐?”
“네. 하지만 비밀이에요.”
“으음, 설마 백자안 그 친구는 아니겠지?”
“헉!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김지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안색을 회복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하시고 사범 모집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저도 시험에 합격하면 사범이 될 수 있나요?”
“물론이다. 너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들었으니, 사범 합격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단 세 명을 뽑는데 지원자가 삼백 명이 넘을 것 같으니까.”
“헉! 그렇게나 많아요? 그래도 도전해보겠어요. 그럼 바로 가볼게요.”
“알겠다. 저녁에 벌어질 최종 결선 때 보자.”
* * *
“자, 이제 일각 후면 신청을 그만 받겠습니다. 더는 신청자가 없으십니까?”
영웅무관 총집사 영웅객이 소리쳤다.
그의 앞에는 삼백여 명의 응시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이 모두 영웅무관 사범이 되려는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많이 모일 줄은 위지경덕을 비롯해 주최 측도 몰랐다.
어제부터 있었던 사전 접수에 몰린 숫자만 이백 오십여 명.
오늘 현장 접수에 오십여 명이 더 몰려 삼백 명이 넘게 모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 세 명의 사범을 모두 뽑아야 하는 일정상 더 이상의 신청자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일각이란 시간은 금세 다 되어 갔다.
마감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기 직전.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바로 김지혜와 한 사내였다.
응시자들의 시선이 몰린 것은 단연코 김지혜였다.
그녀의 미모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다만 사범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보였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나면 나이 또한 상관없는 것이 바로 무림이었다.
“무림삼미에 버금가는 미인이다!”
“이제 무림사미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사범 응시자들이 웅성거렸다.
김지혜와 함께 마지막으로 합류한 사내는 삼십대 초반 정도로 평범한 용모였다.
“김지혜라고 합니다.”
김지혜가 응시 장부에 이름을 기록하자, 사내 역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무정공자(無情公子)라고 합니다.”
실제 이름이 아니고 별호였다.
무림인 중에는 이처럼 이름 대신 별호만 사용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이름보다 별호가 유명한 경우였다.
하지만 무정공자라는 별호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전무했다.
잠시 무정공자에게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의 눈길이 다시 김지혜에게 쏠렸다.
이제 신청자가 모두 모였기 때문에 공개 선발시험 장소인 대연무장으로 가야 했다.
대연무장에는 벌써 관람을 위해 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
군중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이곳 총집사 처소까지 들리고 있었다.
“자, 모두 대회장으로 갑시다.”
영웅객이 앞장서자 삼백여 명의 응시자들이 일제히 따라갔다.
김지혜와 무정공자는 가슴에 번호표를 다느라 조금 늦어 가장 마지막에 함께 출발했다.
대연무장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일각 정도.
저 멀리 앞서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따라가고는 있지만, 두 사람 사이가 서먹한 것은 물론이었다.
김지혜가 눈짓으로 무정공자를 봤다.
냉막한 인상의 그는 정면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중원에는 영웅이 많다고 하더니만 기본적인 예의도 없네. 의례적이라도 한 마디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여자인 내가 먼저 꼭 먼저 인사해야 하나?’
김지혜가 어쩔 수 없이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덕분에 참가번호 꼴찌를 면했어요.”
“허엄!”
무정공자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한번 하고 그냥 걸어갔다.
화가 난 김지혜가 코웃음을 한번 친 후 발걸음을 빨리 해 먼저 걸어갔다.
무정공자는 여전히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괜히 역용까지 했나. 최대한 조용히 합격한 후 관장님께만 사실 대로 말씀드려야겠다. 무정공자가 바로 백자안이라는 사실을.’
그랬다.
무정공자는 바로 백자안이었다.
고민한 결과 공개 시험을 역용한 얼굴로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 후 위지경덕을 만나 사실대로 밝힐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소영이 이 녀석은 수업을 잘 받고 있나 모르겠군. 오늘 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게 될 것 같은데, 사범 선발 대회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구나.’
백자안이 천천히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응시자들이 왔다는 소식에 대연무장은 지금 군중들의 함성 소리로 가득했다.
“어서 빨리 오시오! 뭘 그렇게 꾸물대는 것이오?”
영웅객이 마지막으로 오는 백자안을 재촉했다.
백자안이 황급히 걸음을 빨리 해 응시자 대기석이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둥둥둥!
“그럼 지금부터 영웅무관 사범 선발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응시자들은 단상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백자안을 비롯한 삼백 여명의 응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기막사는 군중들이 볼 수 없는 단상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셈이었다.
백자안은 담담히 단상 위를 쳐다봤다.
아직 예선전이라 그런지 단상에는 영웅객 한 사람 뿐이었다.
단상 앞에는 넓은 원형 비무대가 있었다. 군중들은 비무대를 감싸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선발 시험을 치를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예선 때 여덟 명의 결선진출자를 뽑는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상으로 볼 때 단순 일대일 비무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응시번호 순으로 줄을 섰기 때문에 백자안과 김지혜는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다.
“흥!”
나란히 붙어 있었지만, 김지혜가 이번에는 아예 백자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중원 영웅에 대한 동경이 백자안 때문에 무너진 그녀가 완전히 마음의 벽을 세운 것 같았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김지혜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무공 순으로 뽑힌다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두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할 것이 분명했다.
‘둘 다 합격하게 되면 동기 사범이 되는데, 무정공자라는 별호에 맞게 행동하려다 보니 내가 너무 무심했군. 첫 인상이 안 좋게 비치면 나중에 내가 힘들어 질 수 있다.’
신입관원들도 같이 들어온 동기끼리 친해지듯이 사범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영웅무관처럼 사범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 텃세를 이겨낼 수 있는 힘 중 하나가 동기간의 끈끈한 동료애였다.
그것은 남녀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백자안이 최대한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김 소저시군요. 아까는 소저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긴장하는 바람에 대답을 잘 못했습니다. 무정공자라고 합니다. 오늘 김 소저께서도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흥!”
김지혜가 다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표정이 많이 풀려있었다.
그 모습이 화산옥녀 악미미와 비슷했다.
백자안이 문득 악미미를 떠올렸다.
백소영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신입 와룡대원이 된 그녀는 한 달 전 매화검선의 부름을 받아 급히 화산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화산파에 변고가 생겼다고 했다.
화산파 주요 고수들이 하나 둘 암습을 받아 죽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면적인 외부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니라 일단 문파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지존검 때문에 화산에 한 번 가본다는 것이 아직 못가고 있구나. 시간이 되면 최대한 빨리 가봐야겠군.’
< [제15장] 영웅무관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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