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장] 금마옥 3 >
밤이 깊어갔다.
감옥으로 돌아온 백자안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적에게 잡힌 것이라면 곧바로 탈옥할 수도 있지만 무림맹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순리대로 이 난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봤다.
그것은 바로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서 진짜 사형 집행이 되는 경우였다.
‘그때는 부득이 도주해야겠지. 그것은 목에 칼이 닿을 때 선택할 마지막 수단이다.’
백자안은 냉철하게 생각했다.
일단 무단이탈죄에 대해서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는 무단이탈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다만 비상령이 발동되어 하루 늦게 집으로 간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하루 늦게 집에 도착했고, 참화를 막을 수 없었다.
반대로 반로환동한 이후는 때에 맞게 도착했었다.
그것을 유추해보면 비상령 발동에도 함부로 총단을 나와 집으로 갔던 게 맞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동료 순찰당 무사들의 증언이 그러하였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자신의 반로환동 사실을 솔직히 말하고 이해를 구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이 전혀 없을 것이 명백했다.
‘일단 공을 입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백자안은 사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그다지 내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홀몸이라면 아무리 무림맹이라 해도 탈옥을 해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갈 수 있겠지만, 가족들이 문제였다.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이미 무림맹에서의 성공은 반쯤 포기한 상태.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고 싶었다.
‘최소한 악양에서 뇌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준 일은 충분히 입증이 가능할 것이다. 단목 소저가 그 점에 입각해 강력히 변호해준다면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소가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백자안이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 대한 안위는 초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까지 연계가 되니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진 것이다.
백자안은 그렇다고 일부러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모든 일은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 또한 한 가지 방법이다. 무엇이 진정한 문제일까. 왜 나는 반로환동만 했을 뿐인데 시간 회귀까지 하게 된 걸까. 혹시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백자안은 가부좌를 한 채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몰두했다.
무저곡에서 나와 지금까지 사건들이 겹쳐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깨달음 연마의 시간이었다.
내일 사형 집행장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백자안의 무공이 고강함을 알고 있는 집법장로가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할 가능성도 배제 못 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다.
음식에 독을 풀 수도 있고, 무림맹에서 보유하고 있는 특수 포승줄로 온몸을 묶을 수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인내할 생각인 백자안이 그것들을 무조건 거부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답답함이 깊어졌다.
그것은 이내 깊은 번뇌가 되었다.
백자안은 번뇌를 굳이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러자 번뇌라는 것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나의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족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가족 역시 집착할 대상이 아닌 것을. 모든 것이 허공과도 같이 걸림이 없어야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자안이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다.
근본이 서면 도(道)가 생긴다고 했던가.
‘병(病)이 있으면 약(藥)도 있는 법. 생사를 초월한다면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백자안의 눈빛이 지극히 고요해졌다.
특별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아무 번뇌가 없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가 오래 유지되리라고는 그 역시 생각하지 않았다.
지속이 되면 그게 바로 무형검의 경지로 접어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백자안은 무명비급을 꺼냈다.
무영신투술로 인해 피부 속에 숨겨둔 것이었으나, 꺼낼 때는 품속에서 꺼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백자안은 묵묵히 그러나 빠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이미 모두 암기하고 있던 내용이라 거침이 없었다.
혹시나 빠진 내용이 있을까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가 죽거나 몸에 이상이 생기면 비급 또한 노출될 터. 생각이 바르지 못한 자에게 비급이 들어가면 그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지금 없애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백자안이 확인을 끝낸 후 삼매진화를 일으켜 비급을 태워버렸다.
화르륵.
푸른 불꽃을 내며 비급이 한 줌 재로 변했다.
한데 그 잔해 속에 양피지 하나가 있는 게 아닌가.
비급의 표지 속에 있었던 것 같았다.
불에 타지도 않는 재질인지 양피지는 멀쩡했다.
‘뭐지?’
양피지를 펼쳐보니 지도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이곳은 화산인데······.’
영웅무관에 다닐 때 관원들끼리 단체로 화산에 가서 보름간 숙박 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낙양과 화산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였다. 외부 수련을 하는 것에 매우 기뻐했던 기억이 있었다.
지도에는 화산 중턱 부분의 어느 동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굴 앞에 용바위가 두 개 마주 보고 있었다.
백자안은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으나 그 주변 지형은 알고 있었다.
충분히 찾아갈 수 있었다.
‘용바위 사이 수풀 속에 동굴이 있단 말인가. 왜 이런 지도가 비급 속에 있는 것이지? 혹시 지존검이 있는 장소가 아닐까?’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 마당에 지존검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기억해두었다.
어차피 이번 시련을 이겨내면 악미미 때문이라도 한 번은 더 화산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양피지가 오그라들며 공 모양을 이루더니 영롱한 구슬로 변했다.
엄지손톱 정도의 크기였다. 그 빛이 너무 아름다웠다.
‘여의주인가? 양피지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지? 하기야 보통 양피지는 아니었지.’
백자안이 신기해하며 구슬을 손으로 잡자 머릿속으로 어떤 정보가 들어왔다.
그것은 구슬의 내력에 관한 것이었다.
구슬의 이름은 천상여의주(天上如意珠)라 했다.
천계에 있던 법보 중 하나이며 어떤 것이든 알려주는 효능이 있다고 했다.
물론 천상여의주가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음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의념(意念)으로 답을 해주는 원리였다.
조금 전 구슬의 내력에 대해 알려준 방법과 같은 이치였다.
‘신기하군. 불가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있는데 바로 그것과 비슷하구나.’
이심전심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게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는 의미였다.
백자안은 뜻하지 않게 법보를 얻게 되었지만, 직감적으로 이 천상여의주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절실할 때 도움을 요청해야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자안은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가장 절실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대답은 바로 나왔다.
자신이 정말 무단이탈했는지 그 과정이 알고 싶었다.
시간 회귀로 인해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과거의 한 부분이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단 하루지만 그 기억의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상식의 문제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무단이탈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백자안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천상여의주를 손에 쥐고 의념을 일으켰다.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다. 내가 어떻게 비상령 발동에도 집으로 갔는지 알고 싶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거짓말처럼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과 다른 한 사람과의 대화였다.
그의 기억 속에 전혀 없던 장면이었다.
한데 그 상대방이 다름 아닌 영호광이 아닌가.
뜻밖의 일이었다.
백자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의념이라 광경이 명확히 보이는 것은 아니고 자신과 영호광의 얼굴만 조금 보일 정도였다.
그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그래 마을이 마적 떼에 몰살당하는 예지몽을 꿨다고 했는가?>
<네. 총순찰님. 그래서 지금 바로 집으로 가볼까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야 가능하지만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것인가? 비상령이 발동된 상황에 아무 근거 없이 휴가를 보내줄 수는 없네. 이만 돌아가게.>
<제발 부탁드립니다. 꿈속에 천년색마와 그 일당이 분명 나타났습니다.>
<천년색마? 천년색마라면 사매가 꼭 잡고 싶어 하는 놈인데······ 으음, 하기야 이런 예지몽을 꾼 후 실제 적중했다는 말을 듣긴 했다. 좋다. 허락할 테니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고 바로 출발해라. 혹시라도 천년색마를 발견하게 되면 나에게 먼저 알려야 한다. 그래야 내가 가서 놈을 제거할 수 있을 테니. 알겠느냐?>
<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가보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봐라. 사실 이번 비상령은 혹시나 해서 발동한 것이라 내일이면 해제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속는 셈 치고 보내주는 것이니 그렇게 알도록.>
의념은 여기까지였다.
백자안이 탄식했다.
그는 무단이탈을 한 것이 아니라 영호광의 허락을 받고 간 것이었다.
다른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그의 명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왜 그는 모른 척했을까? 내가 그때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텐데. 아무래도 처음부터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 작정이었던 것 같구나.’
영호광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지만, 이 역시 확인이 필요했다.
천상여의주의 효능 역시 아직은 불분명했다.
백자안은 일단 천상여의주를 피부 속에 넣어두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백자안이 있는 독방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감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한데 그는 영호광이 아닌가.
백자안이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아니!”
“하하하!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인가? 난 자네를 구해주러 왔네.”
“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가 익힌 무공이 수록된 비급은 어디 있나? 그 비급을 내게 넘기면 자네를 위해 증언을 해주겠네.”
“증언이라 하심은?”
“내가 자네에게 비상령 발동 상황에 집에 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해주겠네. 일이 많아서 깜박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구심은 가져도 반박은 못 할 걸세.”
“제가 마적 떼가 마을을 습격하는 예지몽을 꿔서 총순찰님께 부탁드렸다고 하면 더욱더 그럴싸하겠군요.”
“아니! 그때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었느냐?”
영호광이 매우 놀랐다.
백자안이 그 모습을 보고 확신한 것은 물론이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그때 일만 기억 못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총순찰님께서 스스로 밝혀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럼 왜 처음부터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냐?”
“무단이탈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알아차렸죠. 총순찰님께서 저를 옭아매려 한다는 것을.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봐야 총순찰님이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냐?”
“확신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상소가 받아들여져 다시 재판이 열리면 적극적으로 주장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늦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이상 네 죄는 더 늘어날 뿐이다. 상관을 무고한 죄 말이다. 그보다 내 제의를 받아들여라. 비급이 어디 있느냐?”
“비급을 드리면 약속을 지키실 겁니까?”
“물론이다.”
“믿을 수 없군요. 비급을 드리면 아마 저를 죽이려 하시겠지요. 감방에서 자진한 것으로 처리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이놈이! 정말 죽고 싶은 것이냐?”
영호광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일장에 쳐 죽일 기세였다.
그때였다.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영호광이 급히 손을 내렸다.
얼마 후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단목수련이었다.
“아! 대사형도 와 계셨군요.”
< [제13장] 금마옥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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