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장] 사사천교 2 >
토벌군이 물러나자, 장강수왕을 비롯한 수적 지휘부도 관아로 돌아왔다.
백자안 역시 용왕채 지휘막사로 돌아왔다. 그의 옆에는 백리설아와 백풍, 악미미 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수채의 채주가 무림삼미 중 두 명이나 자기 여자로 만든 셈이었다.
장강수왕이 질투할 만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다른 채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자안이 독고준을 이겼을 때 보여준 무공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백자안이었다.
지휘막사로 들어온 백자안은 먼저 악미미에게 상황 설명부터 했다.
도중에 역용을 풀어 본 얼굴을 보여준 것은 물론이었다.
백리설아와 백풍 또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악미미는 조금 남아있던 의심조차 푸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미모와 쌍벽을 이루는 백리설아가 백자안과 밤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쁜 그녀였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정혼녀임을 내세워 뭐라 할 처지도 아니라 별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반시진 후 정오가 되면 뇌옥에 매설된 화약이 폭발할 것이라는 백자안의 말에 그녀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백리설아는 악미미가 백자안의 정혼녀라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아직 백자안과 악미미의 사이에 대한 소문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뇌옥에 갇힌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실을 알고 사적인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백풍이 말했다.
“자안아. 어떻게 할 셈이냐? 장강수왕에게 찾아가 화약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물어보면 분명 의심할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아마도 폭발 시간을 최소 하루는 늦출 것이니, 좀 더 기다려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놈이 저를 부를 것도 같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요?”
악미미의 물음이었다.
“놈이 내가 아직 내공환을 복용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소. 정오 무렵에 이전에 먹은 것으로 알고 있는 내공수 효력이 사라질 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전에 나를 제거하려할 확률이 높소.”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그것은 너무 수동적이에요. 제 생각에는 오라버니가 먼저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공환을 들고 가서 진짜 먹어도 좋은지 물어보는 것이죠. 놈은 지금 오라버니 무공을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니, 내공환을 직접 보여주면 분명 수작을 부려 해코지를 하려 할 거예요. 그러면 오라버니가 그를 제거한 후 섭혼술로 뇌옥의 기관 장치를 알아내면 되지 않겠어요?”
백리설아의 말에 백자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장강수왕이 화약을 제거하지 않으려 한다면 바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설아 의견이 좋겠군. 악 소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흥! 몰라요. 알아서 하세요. 한데 언제부터 두 사람이 오라버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것이죠?”
악미미가 말을 해놓고도 실언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백리설아가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라버니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다만 어릴 적에 서로 만난 적이 있어 호칭을 그렇게 하기로 한 거예요. 자세한 사정은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지금은 시급한 문제가 있으니까.”
“알겠어요. 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백 공자와 저는 어차피 파혼할 사이니까요. 저와 백 공자가 서로 먼저 파혼을 요구하지 않겠지만, 제 아버지는 다르시니까요. 그 문제는 그만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악미미가 안색을 회복했다.
사실 백자안에 대한 마음은 아직 그녀 자신도 몰랐다.
분명한 것은 아직 누구와도 혼인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자안과 당장 파혼할 생각 역시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을 두고 알아가다 보면 남녀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그 점에서는 백자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변수는 매화검선이었다.
매화검선이 파혼을 결정하면 그 역시 효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파혼은 혼인 약속을 한 사람도 할 수 있었다. 백자안과 악미미의 정혼은 백청과 매화검선 두 사람이 맺은 것이었다.
물론 매화검선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결정해도, 백자안과 악미미 두 사람이 서로 다시 약혼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매화검선이라 해도 다시 파혼을 결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정이 있지는 의문이었다.
“지금 바로 가보겠소.”
백자안이 장강수왕이 있는 총지휘 막사로 가려는 찰나.
용왕채 수적 한 명이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총채주께서 부르십니다.”
“그래? 마침 잘되었군.”
백자안이 미소를 지으며 막사에서 나갔다.
* * *
백자안이 불려간 곳은 바로 대청이었다.
그곳에는 장강수왕 혼자 있었다.
백자안이 안도했다.
내심 사천사자들이 있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만약 그들과 싸우게 되면 뇌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오까지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백자안은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어떤 변수에서도 침착함이야말로 최대의 무기가 된다는 것을 최근 몸소 깨달았었다.
“부르셨습니까?”
“하하하. 박 채주. 어서 오시오. 독고준 그놈을 격퇴하느라 수고가 많았소. 그 일을 치하하기 위해 불렀소. 내공환 문제도 있고 말이오.”
“내공환 문제라니요?”
“그게 박 채주 말이 맞는 것 같소. 내공환을 복용한 후 몸에 이상이 느껴지고 있소. 내공수를 먹을 때와 확연히 다르오. 그래서 내공환을 한번 분석해보고 싶은데, 혹시 아직 복용하지 않고 있소?”
“네. 안 그래도 지금 막 복용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내공수는 그 효력이 하루밖에 가지 않으니까요. 물론 여유 있게 반나절 정도는 더 간다는 게 정설이고, 아직 저 역시 이상 징후를 못 느끼지만 곧 효력이 소멸할 것 같습니다.”
“복용하기 전에 내가 한번 분석을 해보고 싶으니 좀 보여주시겠소?”
“네. 한데 이 일을 알면 사천사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소. 사천사자들은 이미 떠났소. 그들 말로는 박 채주가 있으니 자신들이 할 일은 없다고 했소. 녹림왕 쪽에서 더 못 기다리겠다는 연락이 와 그를 만나러 조금 전 성을 떠났소이다.”
“사천사자 모두 말입니까?”
“그렇소. 원래는 내 신변 보호를 위해 열 명의 사자들이 곁에 있었는데, 그자들 역시 모두 갔소. 이제 나와 박 채주가 힘을 합쳐 토벌군을 격퇴해야 하오. 한데 내공환에 문제가 있어선 안 되지 않겠소? 어서 주시오.”
“네. 여기 있습니다.”
백자안이 품속에서 내공환을 꺼내 장강수왕에게 줬다.
사천사자들이 떠났다면 성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내공환이었다.
백자안으로서는 내공환을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넘겨줘도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알 수 없는 것이 장강수왕의 의도였다.
‘일단 하자는 대로 따라주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지. 내 실력만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백자안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내공환을 건네받은 장강수왕은 마치 진맥하듯 조심스레 살폈다.
“어떻습니까?”
“으음······ 역시 독이 있는 것 같소. 고독과 비슷한 것 같소. 아무래도 사사천교 쪽에서 우리를 못 믿어 독을 포함한 것 같소.”
“고독이라면 그자들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무서운 독이 아닙니까?”
“그렇소. 모두 내 불찰이오. 박 채주라도 고독에 당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오. 이제 어떻게 하겠소? 고독인 걸 알면서도 복용할 것이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복용을 반대했습니다. 문제는 내공환을 복용하지 않으면 제 무공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사실 체질상 내공수와 궁합이 좋아 다른 사람보다 몇 배 이상의 효율이 있었거든요.”
“아, 그래서 그토록 무공이 높아진 것이구려. 대체 어느 정도나?”
“다른 사람보다 대여섯 배 정도입니다.”
“아! 그러면 원래보다 오륙십 배나 더 강해졌다는 말이 아니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때문에 내공환 복용을 미룬 겁니다. 지금 위력으로도 충분하니까 정말 내공수 효력이 사라지는지 확인하고 내공환을 복용해도 되니까요. 한데 고독이 들어 있다니 정오 때까지 기다려봐야겠군요. 공력이 원래대로 돌아가는지 보고 그때 다시 내공환을 복용할지 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때까지 내공환은 내가 좀 더 분석해도 되겠소?”
“네. 대신 정오 때까지 총채주님 옆에 무조건 붙어 있겠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하시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지금 당장 뇌옥에 가봐야 했는데, 날 따라오시오.”
“알겠습니다.”
백자안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뇌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장강수왕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섭혼술이 통할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섭혼술을 특성상 시전자가 피시전자보다 무공이 월등히 높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죽은 박무의 경우에도 세세한 기억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장강수왕만 죽여 놓고 화약을 제거하지 못할 수 있었다.
“으음, 시간이 벌서 이렇게 되었군. 서둘러야겠소. 어서 따라오시오.”
“네.”
백자안이 장강수왕을 따라 뇌옥으로 향했다.
* * *
뇌옥 입구에는 이전처럼 아무도 없었다.
정오가 되기 전까지는 불과 일각 정도 남은 시각.
장강수왕과 백자안은 조금 전 이곳에 도착했다.
“사실 원래는 그냥 폭발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도 있었소. 백자안 그놈이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었소. 놈의 능력이라면 화약이 터지는 것을 감지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무리해서라도 뇌옥에 뛰어들 게 아니겠소? 굳이 놈이 먼저 출입문을 여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지.”
“일리가 있군요. 한데 왜 직접 오신 겁니까?”
“그냥 하루 정도는 더 늦춰도 될 것 같아서요. 그게 사천사자들의 의견이었기도 했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놈은 곧 걸려들 겁니다.”
“그래야겠지.”
장강수왕이 품속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그 열쇠를 출입문 바로 옆에 있는 기둥에 대었다. 오목하게 패인 부분이었다.
순간, 열쇠가 기둥 속으로 푹 들어가며 문이 열렸다.
그때였다.
지하뇌옥에 갇힌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살려주세요!”
“물을 달라!”
간수들이 하루 이상 물과 음식을 제공하지 않은 탓이었다.
백자안이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 뇌옥 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한데 이렇게 생존의 필수요소인 식수까지 제공되지 않고 있었을 줄이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어차피 백자안 그놈과 함께 폭사할 테니까. 먼저 내려가서 이상한 점이 없는지 좀 살피고 있으시오. 혹시라도 간수가 없는 것을 틈타 탈옥을 시도하는 놈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네.”
백자안이 잠시 주저하다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와르릉 소리와 함께 계단이 그대로 폭삭 가라앉는 게 아닌가.
백자안이 경공을 펼쳐 그 자리를 유지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장강수왕은 급히 출입구 쪽으로 다시 나가고 있었다.
“총채주님!”
백자안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장강수왕은 다른 벽면에 있는 볼록한 곳을 누르고 있었다.
“박무! 네놈이 감히 내 지위를 위협했으니 이곳에서 죽어라. 참고로 화약 폭발을 하루 늦추었지만 억지로 문을 부수게 되면 그대로 폭발할 것이다. 그러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알아서 해라. 후후후!”
장강수왕이 벽면을 몇 번 더 두드리자 그그긍, 소리와 함께 출입구가 닫히기 시작했다.
장강수왕이 허리를 숙여 뇌옥 밖으로 빠져나가기 직전 백자안이 흡입장풍을 날려 그를 끌어당겼다.
정오가 다 되어 백자안의 내공이 약해졌을 것으로 생각한 장강수왕이 당황했다.
“네놈이!”
장강수왕이 놀라며 우장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백자안이 우수를 비스듬히 들어 그의 목을 강하게 가격했다.
우두둑!
목뼈가 부러진 장강수왕이 즉사했다.
“크윽!”
그때였다.
뇌옥의 출입문이 그대로 완전히 닫히고 말았다.
쿵.
< [제11장] 사사천교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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