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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32화 (32/250)
  • < [제11장] 사사천교 1 >

    [제11장] 사사천교

    백자안과 독고준.

    두 사람의 대치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백자안이 성루에서 경공을 펼쳐 내려왔고, 독고준이 이를 맞이한 것이다.

    백자안은 검을 뽑지 않고 있었다.

    독고준은 조금 전과 같이 부채를 들고 있었다.

    지금은 무형의 기세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독고준의 안색이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백자안의 공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공수를 복용했다고 해도 자신 손에 죽은 동정수로채주 원보보다 약해야 했다.

    먼저 공격을 할 수도 있었으나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이 없었다.

    “용왕채주 박무라고 했나? 생각보다 내공이 무척 강하군. 이것도 내공수 덕분이냐?”

    독고준이 물었다.

    백자안이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알 필요 없다. 내가 왜 그런 것까지 가르쳐주어야 한단 말이냐?”

    다른 수적과 달리 내공환을 복용하지 않은 그였다.

    장강수왕의 예측으로는 오늘 정오 무렵 약효가 사라져 이전 공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오가 되면 뇌옥에 매설된 화약이 폭발하는구나. 장강수왕 저자가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되는데······.’

    백자안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뇌옥에 갇혀 있는 천오백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장강수왕이 언제든 마음을 바꿔 그대로 폭발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예가 바로 조금 전 그가 백리설아를 처형하려 했던 것이었다.

    장강수왕은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자였다.

    백자안은 독고준과의 대결에 응하면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는 일부러 져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지게 되면 백리설아와 백풍을 보내야 하므로 두 사람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장강수왕이 약속을 지킬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의 정혼녀인 악미미와 혼인하려는 자였다.

    별다른 악의는 없었지만, 자존심 때문이라도 지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 일단 이자를 이긴 후 생각하자. 악 소저와도 승부를 겨뤄야 하니까 지더라도 그때 져주면 될 것이다.’

    백자안이 결심을 굳히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독고준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기세 싸움에서 밀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구나. 최후에는 비장의 절기를 사용할 수밖에······.’

    독고준이 결심을 굳히고 선공을 가했다.

    기세 싸움의 열세가 이어지면 결국 내상을 입게 된다. 그 전에 선공을 가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고준이 들고 있던 부채를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보이지 않는 막대한 경력이 백자안을 타격했다.

    호신강기가 즉시 발동되어 이를 막았다.

    팡.

    백자안의 신형이 조금 흔들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독고준이 과감하게 부채를 날렸다.

    휙휙휙.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가는 부채가 백자안의 목을 노렸다.

    적중하면 그대로 목이 날아갈 정도의 강력한 공격이었다.

    백자안이 우수를 뻗어 육합장을 날렸다. 부채가 허공에 멈추더니 부들부들 떨다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갈기갈기 찢겼다.

    독고준이 검을 뽑아 쇄도한 것은 그 직후였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였다.

    처음 서 있던 자리에 잔영이 남을 정도였다. 눈 깜박할 사이에 백자안 앞에 당도한 그가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백자안의 정수리를 쳐 반쪽으로 만들 생각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적검법(無敵劍法)이다!”

    무적검법은 영웅세가주 독고승의 독문검법이었다.

    초절정 고수에 근접해야 펼칠 수 있는 검식으로 상대는 절대 피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주위 삼장 이내가 검기막으로 뒤덮이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백자안은 자신의 몸이 무형 쇠사슬에 묶인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온몸이 꽁꽁 묶여 사형대에 올라간 것처럼 뻔히 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처음에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무명심법이 가동되면서 무형 쇠사슬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독고준의 검법이 놀랍기는 했으나 반격을 가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백자안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단순히 육합검법으로 승부를 보기에는 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고준의 내공 역시 대단해 백자안으로서도 파악이 잘 안 되었다.

    물론 백자안의 내공은 거의 무한대라 독고준이 내공에서 밀리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절정고수, 그것도 상급 절정고수와의 싸움에서는 질이 중요했다.

    내공이 열 배 이상 높다고 해도 초식에서 밀리면 패배할 가능성이 컸다.

    ‘무명검법을 펼쳐야 이길 수 있다.’

    백자안이 결단을 내리고 우수를 들어 무명검법 중 일초식인 무명천하를 펼쳤다.

    검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독고준의 목숨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였다.

    저번처럼 부러진 검의 파편이 자신에게 튈 것을 염려한 때문도 있었다.

    참고로 무명검법은 심검을 지향하고 있는 초식이기 때문에 빈손으로도 펼칠 수가 있었다.

    내기를 손으로 뿜어내고 그것을 검 모양으로 만들어 검법을 펼치는 것이다.

    물론 검을 사용할 때보다 그 위력은 매우 낮았다.

    하지만 그 세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백자안은 독고준이 중상을 입지 않을 만큼 세기를 조절했다.

    까앙.

    독고준의 검과 백자안이 뿜어낸 내기가 그대로 충돌했다.

    “으윽!”

    독고준이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그의 검은 두 동강 나 있었다.

    가벼운 내상까지 입어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그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악미미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자리였다.

    한데 검을 든 그가 맨손의 상대에게 밀린 것이다.

    검 또한 부러졌다.

    내상까지 입어 반나절 정도는 운공을 해야 회복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무슨 이유인지 상대는 자신을 배려해주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점이 그를 더욱더 치욕스럽게 했다.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가.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무적심법(無敵心法)이 칠성에 달하지 않으면 무적검법의 위력이 일 할도 채 발휘되지 않는다고 하셨지. 육성에 달한 것만으로 기고만장해 겁 없이 강호에 나온 내 잘못이다.’

    독고준이 착잡한 표정으로 부러진 검을 바닥에 던졌다.

    “내가 졌다.”

    “운이 좋았다. 솔직히 패배를 인정하는 그 용기가 너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무명검법을 기형적으로 펼쳤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맨손으로도 시전이 가능한 검법이라고 하지만 정석은 아니었다.

    무명검법의 정석이 이루어지려면 지존검이 필수였다.

    ‘앞으로 무명검법을 펼치는 것은 자제해야겠다. 자칫하면 주화입마될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백자안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조속한 시일 내에 나머지 팔대무공을 연습할 것을 다짐했다.

    지존검이란 병장기가 필요한 무명검법과 달리 다른 팔대무공은 별다른 무기가 필요 없었다.

    다만 무명부록 상의 각종 비술과 달리 여러 번의 연습이 필요했다.

    사실 그가 무명천하 초식을 두 번이지만 바로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무저곡에 있을 때 여러 번 시도했던 덕분이었다.

    주화입마의 위험을 느끼고 곧바로 중단했었지만, 그런 과정에서 그 구결의 묘리를 깨우쳤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팔대무공은 그저 구결만 암기한 수준이었다. 그중 경공인 무명비는 조금 연습했었지만, 실제 제대로 펼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무명검법의 나머지 초식 또한 지금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참고로 무명검법은 모두 아홉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초식 한 초식이 단계마다 깨달음이 필요했다.

    백자안은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 최대 삼초 정도까지 정도만 익힐 수 있으리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지존검을 확보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결론적으로 아직 무형검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그로서는 팔대무공을 익히더라도 초보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흥! 독고 공자를 이겼다고 기고만장하구나. 분명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술을 사용했겠지. 네놈 역시 필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니 나를 쉽게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악미미가 검을 들고 다가왔다.

    지난번에 설중화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절치부심했던 그녀였다.

    그 때문일까.

    이곳 악양으로 오면서 기적적인 무공의 상승이 있었다.

    일종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옥녀심공의 한 구결에 대한 해석이었다.

    <가장 느린 것이 가장 빠르다.>

    지금까지 이 구결에 대한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자만심을 버리자 그 의미가 다가왔다.

    바로 무집착을 의미한다는 것을.

    ‘마음에서 기가 생겨난다. 교만한 마음은 기 또한 약하게 만들게 마련이지. 가장 느린 마음으로 무공을 펼치면 오히려 빨라지고 굳건해지는 것이다.’

    악미미가 마음을 편안히 하며 자세를 잡았다.

    백자안이 흠칫했다.

    ‘역시 무재가 남다르구나. 짧은 시간 안에 두 배 이상의 진보를 이뤘다.’

    백자안은 무리한 무명검법의 사용으로 가벼운 내상을 입은 상황.

    악미미에게 일부러 져주려던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난감하구나. 다시 무명검법을 펼칠 수도 없고, 적절하게 힘을 배분하기도 어렵다.’

    백자안이 천천히 우수를 들었다.

    안전하게 육합장을 펼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악미미가 기합과 함께 검을 수평으로 갈랐다.

    검광이 일어나며 검기 다발이 강력하게 쇄도했다.

    검기가 마치 파도처럼 연쇄적으로 백자안의 사혈을 파고들었다.

    백자안은 그 자리에 서서 육합장을 날렸다.

    쏴아아.

    장세가 마치 거대한 벽처럼 나아가 검기 다발을 막아냈다.

    반탄력을 느낀 악미미가 급히 다시 검초를 뿌리려 했다. 하지만 옥녀진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아, 옥비녀가 없는 것이 치명적이구나.’

    악미미가 참담해 했다.

    옥비녀를 귀면탈 소녀에게 빼앗긴 후 늦지 않게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단계 무공이 상승한 지금 옥비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는 같은 옥녀심공 칠성이라도 깨달음이 깊어져 보다 강한 진기가 필요한 때문이었다.

    특히 옥비녀는 경지가 높을수록 더 많은 옥녀진기를 보충해주는 특징이 있었다.

    악미미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느꼈다.

    백자안이 날린 육합장이 지금 세기로 계속 날아들면 자신의 육신은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 아쉽구나. 내가 너무 교만했던 것일까. 아, 한데 왜 지금 백자안 그 자식이 생각나는 걸까. 지금 나를 구해주면 내가 마음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죽음 앞에 선 악미미가 눈을 감았다.

    자신의 육신이 터져나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귀에 전음이 들렸다.

    「악 소저. 용서하시오. 백자안이오. 부득이하게 용왕채주 박무로 역용하고 있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백자안의 전음이었다.

    순간, 그녀를 압박하던 장세가 사라졌다.

    다만 그 여파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으윽!”

    악미미가 신음과 함께 비틀거렸다.

    죽은피이기는 하지만 한 모금 선혈을 토해냈다.

    그 바람에 내상을 입는 것을 막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그녀의 패배였다.

    악미미가 백자안에게 전음을 날렸다.

    「정말 백 공자인가요? 무슨 계획으로 이러는 거죠?」

    「수적들이 복용한 약을 분석해 역이용하기 위해서요. 조만간 장강수왕을 처치한 후 그 계획을 실천할 생각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용왕채주 박무로 행세할 수밖에 없었소. 차라리 나를 믿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소? 백리 소저 역시 내 뜻을 알고 협조 중이오.」

    「흥!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내게 한 약속이 무엇인지 말해 봐요. 내가 찾아달라고 한 물건이 무엇이었죠?」

    「옥비녀를 말씀하는 것이오?」

    백자안의 전음에 악미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내가 졌다.”

    “하하하. 역시 여장부구나.”

    백자안이 껄껄 웃으며 악미미의 손을 잡고 다시 성루 위로 올라갔다.

    와아아.

    수적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독고준을 비롯한 토벌군 진영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이대로 전면전이 벌어지면 패배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한 이장락이 철군을 주장했다.

    “무사들을 외곽으로 물리고 다시 계획을 세우는 게 좋겠습니다.”

    “동감입니다.”

    우문호까지 찬성하자, 독고준 역시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밤이 되기 전에 나 혼자라도 성안으로 들어가 악 소저를 구해야겠다.’

    독고준이 총지휘자 자격으로 소리쳤다.

    “모두 물러나라!”

    < [제11장] 사사천교 1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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