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장] 백리설아 3 >
무적세가 대공자 독고준(獨孤俊)이 데리고 온 병력은 모두 만 명이었다.
무적세가 고수들뿐만 아니라 악양 인근의 정의련 무사들을 모두 소집했다.
이장락과 우문호가 매우 기뻐한 것은 물론이었다.
기다리던 지원군.
그것도 가장 무공이 강하다는 무적세가 고수들이 주축이 된 지원군이었다.
특히 어젯밤 대륙표국 표사들이 몰살을 당하고 군량미가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더욱더 기뻤다.
독고준은 군량미까지 가져왔다.
토벌군 전부가 최소 사흘은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독고준은 주요 고수들과 인사한 후 이장락과 우문호의 양보로 총지휘를 맡았다.
무적세가 대공자이자 소가주이기도 한 그의 명성도 높지만, 무엇보다 데려온 병력이 기존 토벌군과 비교해 압도적이었다.
그것도 정예 무림 고수들이었다.
지금은 성벽 가까이 진격한 상태.
수적들의 화살 공격이 미칠 수 있는 거리였으나, 토벌군에는 방패가 있었다.
아직 수적들의 공격은 없어 대치 상태가 지속 중이었다.
독고준이 갑자기 나타나자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화산옥녀 악미미였다.
엉겁결에 서로 인사를 나누긴 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혼사와 관련한 말은 전혀 나누지 않았다.
소강상태가 길어지자 독고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독고준의 얼굴은 절세미남 그 자체로 이름처럼 준수했다.
악미미 또한 절세미인이라 겉보기에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악 소저. 이렇게 만나 뵙게 되는군요. 초상화보다 실물이 더 아름다우신 것 같습니다. 화산에 계실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오시게 된 겁니까?”
“사정이 있었어요. 전황이 어려웠는데 독고 공자께서 많은 무사를 데려와서 다행이네요.”
“마침 인근에 볼일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혼사에 대해서는 들으셨지요?”
“듣긴 들었지만, 저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어요.”
“하하하. 당장 혼인할 상황이 아니라면 약혼이라도 하면 어떻겠습니까?”
“제겐 정혼자가 있어요.”
“어차피 파혼할 것 아닙니까? 정혼자가 바로 천년색마를 제거한 백자안이란 사람이라지요?”
“백 공자를 아세요?”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림맹 순찰당 구급무사라고 하더군요. 기연을 만나 무공이 급상승했고, 흡수대법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안으로 들어가 정탐 활동을 하고 있어요. 사적인 이야기는 그만하죠.”
악미미가 아미를 찌푸렸다.
처음 독고준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호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과의 혼인을 너무 당연히 여기는 태도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독고준의 의사가 확인된 이상 부친인 매화검선이 강력하게 혼사를 밀어붙일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 혼인은 피한다고 해도 약혼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 전에 백자안과 파혼 절차가 진행될 것이었다.
‘백자안 그 바보 자식은 왜 이렇게 소식이 없는 거야?’
악미미는 갑자기 백자안이 보고 싶어졌다.
백자안과 독고준 두 사람 중 누가 더 무공이 높은지 궁금하기도 했다.
‘백 공자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독고 공자 이 사람을 당해내지는 못할 거야. 벌써 독고 가주와 맞먹는다는 소문이 있으니······.’
악미미가 독고준을 유심히 보니 백자안과 마찬가지로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었다.
가히 반박귀진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성루 쪽에 갑자기 수적들이 많아졌다.
한데 그들은 장강수왕을 비롯한 장강수로채 지휘부가 아닌가.
그들 중에는 백자안도 있었다.
게다가 장강수왕의 명으로 백리설아와 백풍도 데려왔다.
두 사람이 자신의 휘하로 들어왔다고 백자안이 말했지만, 장강수왕은 믿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사천사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관아에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위급한 순간에는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수적들의 사기에 큰 영향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모든 수적이 내공환을 복용한 터라 그 무공이 최고조였다.
아무리 무공이 강한 무적세가 고수들이라지만 한번 붙어볼 만한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동정수로채주 원보가 소리쳤다.
“어느 놈이 무적세가 대공자냐?”
“본인이오. 독고준이라 하오.”
독고준이 늠름한 태도로 말했다.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장검을 허리에 찬 채 영웅건을 두른 그는 과연 무림제일후기지수다웠다.
사실 그는 가장 뛰어난 남자 후기지수들을 일컫는 무림오룡(武林五龍) 중 첫째였다.
“독고준 네놈이 감히 우리와 대적하려는 것이냐? 정의련은 중립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무사들을 이끌고 왔느냐?”
“본련이 중립을 원칙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무림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소. 그대들이 무고한 양민을 수없이 해친 일은 용서받기 힘드오. 지금이라도 항복을 하고 뉘우친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약속하겠소. 물론 무공은 폐쇄해야 할 것이오.”
“흥! 말장난하지 마라. 우리가 더 강한데 무슨 항복이냐? 다들 들었겠지만 우리는 모두 무공이 열 배 이상 강해졌다.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신 분들은 사사천교의 사천사자님들이다. 네놈들이 감히 사사천교와 대적할 수 있겠느냐?”
“사사천교!”
“사사천교가 나타났단 말인가?”
토벌군 진영이 술렁였다.
무림맹 무사들은 물론이고 토벌군에 합류한 정의련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사천교의 악랄함과 기괴함은 혈교와 쌍벽을 이루었다.
비록 백 년 전 무림대혈사를 일으킨 후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 흔적은 남아 있었다.
사실 마교가 삼백 년 전 정마대전을 일으켜 전 무림을 초토화하긴 했지만, 최근 백 년 간 무림에 가장 큰 피해를 준 곳은 바로 사사천교였다.
당시 사사천교와 무림맹은 양패구상을 당했다. 사망자만 양측을 통틀어 십만에 가까웠다.
한데 그 공포의 대명사인 사사천교가 다시 발호한 것이었다.
이번 장강수로채 수적들이 일으킨 혈사는 그 시작에 불과한 셈이었다.
우문호가 소리쳤다.
“역시 배후가 따로 있었구나. 사사천교가 다시 발호하다니. 하지만 당금 무림의 힘은 사상 최강이다. 무림맹과 정의련이 지금처럼 합심한다면 사사천교를 이번에 발본색원할 수 있을 것이다.”
“내상도 깊은 놈이 입만 살았군. 좋다. 우리 무공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가르쳐주지. 누가 나와 겨뤄보겠느냐?”
원보가 검을 뽑고 소리쳤다.
그는 장강수왕 다음으로 실세인 자였다.
선봉대 격으로 공격을 가해 악양성을 가장 먼저 점령한 장본인이었다.
상대의 사기를 누르고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이번에도 도발한 것이었다.
물론 그 내심에는 강해진 무공을 보여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이놈! 네놈은 내가 상대해주마.”
노성과 함께 토벌군 쪽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그는 체구가 보통 사람 두 배 정도의 거한이었다. 대장군 이장락 휘하의 부장 송간(宋間)이란 자였다.
그는 선봉대장으로 이번 출정에 참여했다. 무림인 출신으로 그 무공이 남달라 장사성 관부 최고무사로 불리곤 했다.
하기야 향후 대장군 자리를 노리는 송간으로서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장강수왕은 모르겠지만 원보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휙휙.
송간이 마상에서 내려와 창을 열십자로 휘두르며 앞으로 나왔다.
원보가 성벽 위에서 경공을 펼쳐 유유히 내려왔다.
양 진영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나는 장사성 선봉대장 송간이다. 원보 네놈의 목을 베어 양민들의 복수를 하겠다.”
송간이 빠르게 나아가 창을 찔렀다.
쐐애액.
내공이 실린 창이 파공성을 일으키며 일직선으로 뻗어갔다. 원보가 옆으로 비키며 검으로 창대를 후려쳤다.
눈 깜박할 사이였다.
창대가 그대로 잘려 나가자 송간이 좌장으로 장풍을 날렸다.
근거리에서 날린 장력은 상대를 피떡으로 만들 수 있었다.
원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신형을 솟구쳤다.
장풍이 빗나가자 원보가 허리를 굽히며 빠르게 쇄도해 검을 찔렀다.
송간이 급히 피하려 했으나 검은 이미 그의 가슴에 박힌 후였다.
푸화확.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송간이 비틀거렸다. 원보가 검을 빼낸 후 신형을 회전하며 가볍게 호선을 그렸다.
댕강.
“크윽!”
송간의 목이 그대로 떨어졌다.
와아아.
수적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내공환 덕분에 내공이 강해져서인지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하하하! 또 누가 덤비겠느냐? 독고준! 네놈이 직접 나오너라. 항간에 네놈의 무공이 매우 높다고 알려져 있으나, 나는 안다. 그게 다 허명이라는 것을. 무적세가에서 일부러 사람을 시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필시 네놈은 다른 사람을 내세우려 하겠지? 야비한 놈!”
원보가 내친김에 독고준을 지목했다.
사실 그의 말도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독고준의 무공에 대해 소문은 많았다. 하지만 실제 그의 무공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백면서생처럼 보이는 지금 모습이 진짜 모습이며 실제로도 무공을 전혀 모른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원보 입장에서도 무적세가의 다른 고수보다 독고준이 더 수월할 수 있었다.
대결은 수월하지만 그를 이겼을 경우 효과는 매우 클 게 분명했다.
독고준은 담담했다.
아직 자신의 무공을 강호에 나가 펼쳐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는 문제였다.
“좋소. 대결을 받아들이겠소.”
독고준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는 검을 뽑지도 않고 소매 속에 넣어두었던 부채를 꺼내 들고 있었다.
원보가 분노했다.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대갈통을 잘라주마.”
스스슷.
원보가 유령과도 같은 신법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 송간과 싸웠을 때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였다.
독고준은 그대로 서 있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원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찔렀다.
독고준의 목에 검이 박히려는 찰나.
독고준이 들고 있던 부채를 흔들었다.
순간 팡하는 소리와 함께 원보의 신형이 튕겨 나갔다. 다가왔던 속도보다 두 배나 빨랐다.
성문 쪽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지켜보고 있던 장강수왕이 흡입장풍을 날려 그를 받았다.
하지만 이미 칠공에서 피를 흘린 채 숨이 끊어져 있는 게 아닌가.
“독고준 네놈이!”
장강수왕이 분노했다.
원보는 그가 가장 믿는 자였다.
그래서 악양성 함락 작전에 선봉을 맡긴 것이다.
장강수왕이 백자안 옆에 있는 백리설아를 가리켰다.
“저 계집을 참수해라. 박 채주!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정을 끊어야 하니 양해하기 바라오.”
“무슨 말씀입니까? 백리 소저는 이제 제 여자입니다. 왜 화풀이를 엉뚱한 곳에 하십니까?”
백자안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장강수왕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박 채주! 계집을 지키고 싶으면 저 독고준이라 놈을 물리치시오. 총채주로서의 명이오.”
“알겠습니다. 백리 소저는 대륙표국주의 금지옥엽으로 이제 제 처가 되었으니 당연히 지켜야지요.”
백자안이 내공을 일으켜 소리쳤다.
토벌군 쪽에서 이를 듣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백리설아를 발견하고 많은 사람이 웅성대고 있었다.
토벌군, 특히 정의련 무사 중에는 대륙표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백리설아를 구할 수만 있다면 큰 상이 내릴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독고준이 소리쳤다.
“소저께서 대륙표국의 소국주 백리설아 소저이시오?”
“그래요.”
백리설아가 담담히 말했다.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아 무표정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독고준이 말했다.
“소저의 아버님과 제 부친께서는 친분이 두텁다고 알고 있소. 내 반드시 소저를 구해주겠소. 박 채주란 놈은 들어라. 어째서 백리 소저가 네 놈 여자란 말이냐?”
“하하하. 물론 아직 합방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내가 염왕채주로부터 빼앗았으니 내 여자가 아니겠느냐?”
“잔말 말고 백리 소저를 풀어줘라.”
“독고 공자. 백리 소저 옆에 있는 분도 구해주세요. 제 숙부님이세요.”
백소영이 간청했다.
그녀가 백풍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했다.
대륙표국 표사들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설마 했지만, 실제 백풍이 수적들에게 잡혀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박 채주! 나와 대결을 벌여 내가 이기면 백리 소저와 옆에 있는 표사분을 우리에게 넘겨라. 그럴 자신이 있느냐?”
“좋다. 만약에 네놈이 지면 어떻게 할 거냐?”
“조건이 있으면 말해라.”
독고준이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미인은 다다익선이라 했다. 나는 화산옥녀를 원한다. 같은 무림삼미이니 대등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건······.”
독고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악미미가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저까지 이겨야 한다는 조건이에요.”
< [제10장] 백리설아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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